귀촉도

 

80이 넘어서 백내장수술을 받게 된 것은 발 아래 등산로가 흐릿하게 보여, 몸의 균형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고, 그래서 좋아하는 등산을 포기하게 된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백내장수술을 받은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시기라 먼 곳을 보기위한 안경도수가 정해지지 않아 사물을 뚜렷이 보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수술 받은 눈의 제 시력이 나타날 때 까지는 한두 달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한다.

 

하지만 가까운 거리에 초점을 맞춘 인공수정체로 교체한 이후 가까운 것들은 선명하게 잘 보여, 옛날에 보던 시집을 꺼내보니, 옛날 책 작은 글씨인데도, 보는 데 별다른 지장이 없어 놀랐다.

 

국화 옆에서

 

나는 고도근시이기 때문에 가까운 곳 보는 안경과 먼 곳을 보는 안경, 두 개를 항상 가까이에 두고, 상황에 따라 바꾸어 가며, 사용해 왔으나, 70고개를 넘어서자 근거리 안경을 쓰고도 책 읽기가 어려워지면서, 최근 5년 동안은 전자책 외에는 종이책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다시 책을 볼 수 있다니 얼마나 반가운 변화인가? 다시 보고 싶었던 옛날 책, 엑소더스 상, 하 두 권을 꺼내 조심스럽게 보기를 시도한다. 다 낡은 책이라 보기에도 불편하고, 60여 년 전에 출판 된 책이다 보니, 생소한 표현이 낮 설기는 하지만 원작자의 스피디한 스토리 전개솜씨에 흠뻑 빠져, 이미 상권 읽기를 마치고, 하권을 펼쳐들고 있다

 

엑소더스 상

 

책 내지

 

요즈음의 책들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만큼 현격한 차이가 나는 열악한 책들을 보면서 지내온 우리들은 옛날 책에 대한 향수(鄕愁)를 느껴, 이를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책들을 다시 볼 수 있는 시력(視力)을 다시 갖게 되다니, 좀처럼 믿겨지지가 않는다.

 

 

 

(2023.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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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인의 눈과 백내장 말기인의 눈 차이(펌)

 

눈이 침침하고 흐릿하게 보여 가까운 동내 송안과에 갔더니, 백내장 증상이 있다며, 수술을 받으라고 권하면서, 이곳에서는 수술은 안 하니, 국립병원에 가서 하라고 권한다.

 

백내장 수술은 어떤 수술인가? “백내장 수술은 수정체 교체 수술이라고도 불리며, 눈 안의 뿌옇고 혼탁하게 된 수정체(백내장 수정체)를 제거하고, 인공수정체를 삽입하는 수술인데, 방치하면 시간 경과에 따른 수정체 섬유의 대사변화로 수정체 손상 또는 시력 상실을 유발한다.” 라고 한다

 

 

지난 44()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안과 이형근 교수의 집도(執刀)로 양안(兩眼) 백내장 수술을 동시에 받았다. 수술시간은 약 30. 국소마취를 해서일까? 거의 통증을 느끼지 않고 수술이 진행됐다.

 

경험이 많은 집도의(執刀醫)는 환자의 불안을 해소하려고, 수술과정을 수시로 설명하면서, 고령인데도 잘 견디고 있다고 안심시킨다. 수술이 끝난 후 1일 입원병실로 이동하고, 간호사는 보호자로 따라온 집사람에게 안약 투약과 안대사용 방법, 그리고 합병증 방지를 위해, 지켜야 사항을 설명한다. 1일 병실에서 한 시간쯤 안정을 취하고, 퇴원해도 좋다는 간호사의 통보를 받고 바로 퇴원했다.

 

백내장 수술에는 중요한 몇 가지 선택해야할 사항이 있다. 하여 이를 위한 참고가 되라고 내 경험을 기술한다.

 

백내장 수술은 교체하는 인공수정체에 따라 단 초점 수술과 다 초점 수술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단 초점 수술은 인공수정체의 초점을, 먼 곳, 또는 가까운 곳 한 곳에만 맞추기 때문에, 먼 곳에 초점을 맞춘 인공수정체를 선택한 사람은 가까운 것을 잘보기 위해서는 돋보기를 써야하고, 반대로 가까운 곳에 초점을 맞춘 인공수정체를 선택한 사람은 먼 곳이 잘 보이는 안경을 써야한다고 한다.

 

이에 비해 다 초점 인공수정체의 경우에는 먼 곳과 가까운 곳을 모두 잘 볼 수 있어서 안경이 필요 없다고 한다. 하지만 다 초점 수술은 단 초점에 비해 어렵고, 비용면에서도 큰 차이가 난다. 단 초점의 경우는 수술비용의 80%이상을 의료보험으로 커버되지만, 다 초점의 경우는 의료보험의 혜택을 전혀 받을 수가 없어서 수술비용이 천만원대까지 이를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가까운 거리에 초점을 맞춘 단 초점 인공수정체를 선택했지만, 알고보니 종합병원에서는 고령자의 다 초점 백내장수술은 해주지 않는다고 한다.

 

또 다른 선택은 백내장 수술을 국립병원 또는 종합병원에서 할 것인가? 아니면 개인 전문병원에서 할 것인가의 선택이다. 내가 수술실에서 수술을 받는 동안,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람은 다른 수술을 받으로 온 환자의 보호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내가 백내장수술을 받으러 왔다고 하니, “백내장 수술을 종합병원에서 받는 사람도 있네요.” 라며 놀라더라고 한다.

 

우리나라 수술환자들 중에서 백내장 수술환자가 가장 많다고 하더니, 아마도 백내장환자의 대부분은 개인 전문병원에서 수술을 받는 모양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고령자가 구지 백내장수술을 받아야하는가? 라는 의문이다. 백내장의 원인으로 선천적인 요인이 꼽히기도 하지만, 가장큰 요인은 노화(老化)라고 한다, 40대는 40%, 50대는 50%, 60대는 60%, 70대는 70%, 80대는 80%가 백내장환자라고 한다, 하지만 백내장 수술을 가장 많이 받는 연령대는 60, 70대이고, 80대 백내장 환자 수는 60, 70대에 비해 적다고 한다. 아마도 80대가 넘어 달관한 사람들은 수술을 받기보다 세월의 흐름을 따르겠다는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중학교에 입학해서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한 고도근시다. 안경을 벗으면 마누라도 알아보지 못하고, 냄새로 알아야 할 정도이니, 평생을 안경의 도움으로 사물을 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여 시력에 관심이 많고, 눈의 소중함을 항상 의식하고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2년 전부터 사물이 흐릿해 보이고, 가끔씩 사물이 둘로 보이는 증상이 나타나는가 하면, 특히 산행 시 발아래 높낮이가 뚜렷하지 않아 몸의 균형을 유지하기 어려워 스틱에 의존하는 빈도가 늘어나자, 한겨울 동안 산행을 중단해 왔었는데, 올 들어 내가 다니던 동내 송안과 원장으로부터 국립병원에서 백내장 수술을 받아보라는 권유로 백내장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송안과 원장의 권유도 있고, 평소 눈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는 나는 개인 전문 병원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적당한 국립병원을 찾아보았으나 교통이 불편한 편이라, 강남세브란스병원에 전화하여 217830분 이형준 교수의 진료를 받기로 예약을 한다.

 

2023년 2월 17일 진료

 

송안과의 진료의뢰서를 들고 병원을 찾는다. 외래원무과에 진료비 21,500(28,380에서 보험공제 후 금액)을 납부하고, 안과에서 여러가지 검사를 마친 후, 이형준교수와 면담을 한다.

 

이 교수는 80대 고령인데 왜 백내장 수술을 받으려고 하느냐 묻는다. 내가 느낀 백내장 증세를 이야기하고 특히 등산 시 발아래 높낮이 구분이 않되어, 균형을 잃을 때가 많아, 좋아하는 등산도 중단한 상태라고 이야기하니, 이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백내장수술을 하면 백내장 증세가 완화될 터이니 단 초점수술을 해보자며, 근거리초점, 원거리초점 수정체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한다, 나는 두 수정체의 차이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근거리초점 수정체를 선택한 후, 진료실을 나와 간호사와 만난다.

 

간호사는 3314시 진료 및 검사예약을 하고, 44일 수술을 하자고 한다. 나는 첫 진료 후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려 놀랐으나, 시간을 다투는 수술도 아님으로 동의한다. 세브란스 안과에는 백내장 전문의는 두 사람 뿐이다. 한분은 중년을 훨씬 넘긴 이 교수이고 다른 한분은 젊은 의사이다. 하여 많은 환자들이 경험이 많은 이 교수를 택해, 수술 일정이 많이 밀린 것이라고 이해한다.

 

3월 31일. 수술 전 검사

 

검사 전 4시간은 금식을 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고, 점심도 굶은 채 330분 경 병원에 도착하여, 우선 심전도, 혈액검사 등 수술 전 기본검사를 받는다. 4시부터, 2시간 이상이 걸린다는 수술 전, 눈 정밀검사를 받으러 대기한다. 호출을 받고 한 가지 검사가 끝나면, 다음 검사를 위해 대기한다. 무슨 검사를 하는지 알려 주지도 않고, 이런 검사, 대기과정이 수 없이 계속되어, 6시가 넘어도 끝날 줄을 모른다. 안과외래에서 대기하던 많은 환자들도 모두 사라지고, 퇴근 시간이 지나 간호사들도 모두 퇴근해서, 너른 대기실에 달랑 혼자 남아 있으니 무척 견디기 힘들고 화가 난다. 610분경 호출을 받고 진료과에서 젊은 의사를 만난다. 오늘 검사가 끝났으니 원무과 무인수납기에 검사비용을 지불하고, 처방전을 받아 병원 부근 약국에서 약을 구입하라고 한다.

 

3월 31일 비용 : 513,300원

- 수술 전 기본검사 66,800(111,422원 중)

- 수술전 정밀검사 409,400(451,833원 이중 30만원은 비보험 검사)

- 약값 37,100

 

4월 4일 수술 : 485,870원 (2,660,890원 중)

 

오전 745분 응급실 원무과에서 1일 입원실을 배정받고 입원실로 이동.

8시경 휠체어 타고 수술실로 간다. 이어 대기 후, 수술실로 들어가 이형근 교수의 집도로 양안 수술.

 

4월 5일 검사 및 진료 : 33,000원

- 진료비 20,600(22,800원 중)

- 검사료 12,400(20,683원 중)

 

4월 12일 검사 및 진료 : 27,300원

진료비 20.600(22,800원 중)

검사료 6,700(11,323원 중)

 

5월 12일 진료예약

 

이하 항목별 비용과 총비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진료비 3 67,200

- 검사료 2 19,100

- 수술전 기본 및 정밀검사 476,200

- 수술비 485,000

- 원외 처방약값 32,100

  총 비용 1,079,800원

 

분당 서울대 병원은 백내장 수술비용에 대한 문의에, “백내장 수술은 의료보험이 적용 되고, 비용은 쓰는 약 및 입원실 등급에 따라 다르지만 약 100만원에서 150만원 정도를 퇴원 시 준비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답하고 있다.

 

이를 보면 수술을 해야 하는 병원선택에서 비용문제에 관해서는, 분당 서울대병원과 종합병원의 소요비용에는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개인 전문병원은 비용이 다양 하지만, 단 초점 양안 수술 시, 수술비 50만원, 검사비 등 20만원 합계 70만원 정도인 경우가 대다수인 것 같다.

 

또 한 가지 환자의 입장에서는 양안을  함께 수술하는 것이 편함으로 이를 권장한다.

 

 

(2023.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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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선생 서거 85주기 추모 화환

 

2023310일은 도산선생의 서거 85주기다.

도산 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에서는 선생의 서거 65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3월을 도산선생 추모의 달로 정하고, 도산공원 개원 및 도산선생묘소 이장식 사진전과 추모강연회를 갖는다.

 

 3월은 도산선생 추모의 달

 

 도산공원 개원 및 도산선생묘소 이장식 사진전 안내

 

 도산공원 기공식 장면

 

 박정희 대통령 도산공원 시찰장면

 

 도산선생 이장식장

 

 도산선생 부부 운구 장면

 

 박정희 대통령 도산선생 묘소시찰

 

 추모강연회 안내

 

 

 

2023324일 김형석 교수의 도산선생 추모 강연을 듣기 위해 350분 경 도산기념관 강당으로 들어선다. 12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에 강연시작 10분 전인 시각, 절반 정도의 자리에 방청객들이 자리를 잡고 있고, 강연시작 시간에 임박해서는 거의 만석일 정도로 성황을 이룬다.

 

 강연장 윤석열 대통령이 보낸 화한이 눈길을 끈다.

 

350분 현재 방청석

 

4시 정각 김형석 교수가 모습을 보이고, 주최 측에서 추모강연을 열게 된 취지를 설명 한다. 이어 국기에 대한 경례, 도산선생과 순국선열들에 대한 묵념이 끝난 후, 김형석 교수가 요원의 안내로 연단에 좌정하고, 마이크를 잡더니 바로 강연을 시간한다. 김형석 교수는 1920년생이다. 우리 나이로 104세 고령이신데도, 이처럼 강연을 하실 정도로 정정하시니 놀랍다.

 

 강연하시는 김형석 교수

 

하지만 강연이 시작되면서 내게 문제가 생긴다. 마이크의 울림소리와 내 오른쪽 귀의 난청기로 교수님의 말씀을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다. 교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려고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 말씀의 요지를 메모하려고 수첩까지 준비했는데 말이다. 교수님의 강연은 1시간여 계속되고, 510분경에 끝난다.

 

아마도 김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과 다를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이 강연장의 분위기를 통해 느낀 느낌을 토대로 교수님의 말씀이라고 짐작되는 내용을 정리해본다.

 

1. 나라를 잃고 일제치하에서 살던 도산선생의 제일의 소망은 나를 되찾아야 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우리민족이 해야 할 일들을 도산선생이 널리 알렸던 사실에 대해 교수님은 자세히 말씀하셨을 것 같고,

 

2. 도산선생은 우리는 일제의 만행을 결코 잊어 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독일과는 달리 일본은 결코 사과하지 않을 터이니, 장기적으로 대응하여 일본 스스로가 자멸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한 점을 언급하며, 김 교수는 단기적이 아닌 장기적 접근이 필요하고 말씀하셨을 것 같으며,

 

3. 도산선생이 당면한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글로벌한 발상이 필요하다고 한 점을 언급하며, 김 교수는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의 중국에만 국한하지 않고 전 세계를 상대해야한다는 말씀을 언급했을 것 같다.

 

이상이 김형석 교수의 강연요지라고 짐작을 하고 내용을 정리해 본 것이다. 잘못된 점이 있더라도 널리 양지해 주시기 바란다,

 

아래 사진은 도산 안창호기념관에 걸린 사진이다. 일본의 탄압에 쫓겨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으나, 도산선생은 교민사회 활동과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동분서주해야 했던 경로를 그린 사진이라고 한다.

 

 안창호의 독립운동 발자취

 

1926년에 잠시 미국에 들렀을 때, 로스앤젤레스 YMCA의 도산 송별식장에서, 도산은 자기 가족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지금까지 아내에게 치마 하나, 저고리 한 감 사 준 일이 없었고, 필립에게도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 못 사주었다. 그러한 성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랬는데, 여간 죄스럽지 않다.”

 

민족의 선각자이며 독립운동의 위대한 지도자이신 도산선생의 자괴(自愧)하는 모습이 우리들을 더 없이 부끄럽게 한다.

 

 

 

(2023.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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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마산 산행 2

잡기 2023. 2. 26. 11:59

 용마산에서 본 서울

 

2023220()

 

2시간 남짓한 코스를 택해 몇 차례 용마산에 오르다 보니, 용마산이 가벼운 산행의 대상으로는 최선이 아닌가 싶다. 높지 않은 나지막한 산이지만 거칠고 가파른 능선이나, 산 사면길에는 데크 계단을 설치하여 위험을 방지한 것이 좋다. 하여 서둘지 않고 쉬엄쉬엄 오르내리며 즐길 수 있는 주위 조망이 큰 즐거움을 준다, 동쪽을 제외한 동남방향에서 서쪽과 북쪽방향의 낮 익은 산들과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둘레길에서는 볼 수 없는 멋진 조망이다.

 

용마산에 마련된 3군데 전망대와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며 보는 조망을 한자리에 뫃아, 용마산의 좋은 점을 알리고자 한다.

 

첫 번째는 용마산정에서 보는 조망이다. 용마산정 안에는 서울시 선정 우수 조망명소안내판이 멀리 청계산, 관악산, 남산, 안산, 인왕산 방향의 조망을 소개하고 있고, 가까이로는 중랑구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용마산정

 

 ‘서울시 선정 우수 조망명소안내판

 

 

다음은 용마산 정상 남쪽 전망대에서 본 조망이다. 이곳에는 조망안내판은 없지만, 조망 즐김에는 별다른 문제는 없다

 

 용마산 정상 남쪽 전망대

 

 동남쪽 조망

 

 관악산 방향

 

  남산방향

 

다음은 용마산 정상 전망대다. 이곳에는 용마산에서 본 서울이라는 조망안내판이 있다

 

 용마산 정상 전망대

 

 용마산에서 본 서울

 

 북한산 방향

 

 봉화산, 불암산, 수락산 방향

 

용마산 6보루 쪽으로 하산하다 뒤돌아본 용마산 정상

 

 하산하면서 본 안개 속의 롯데월드 타워

 

주말 용마산은 등산객들로 가득하다. 특히 젊은 초보 등산객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다 보니 시끄럽고, 왕왕 산행 기본 에티켓도 지킬 줄 몰라, 주위사람들을 당황하게 한다. 하여 주말을 피해 주중에 가 보았다. 월요일인데도 인근의 나이 드신 분들, 중년 아주머니 분들이 혼자서 산행을 즐기시는 모습이 보기 좋다. 우측통행을 준수하고, 서둘지 않으며, 기다릴 줄도 알아, 함께하는 산행이 즐겁다.

 

 

(2023.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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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객의 정기산행

잡기 2023. 2. 15. 11:35

용마산 정상

 

70고개를 훌쩍 넘어서자, 순발력이 떨어지면서, 산악회를 따라 산행하기가 어려워진다. 최후미로 쳐져,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생기다 보니, 산악회를 졸업해야할 때가 왔음을 자각하게 된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산행을 접을 수도 없는 일.  그래서 집 근처의 적당한 산을 골라 혼자서라도 정기적으로 산행을 즐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여 서울 근교의 산 가운데 집에서 가깝고,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산으로 불암산(佛巖山)을 선택한다.

 

불암산은 508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크게 보면 거대한 바위 하나로 된 산이라 할 수 있어, 티베트의 6,638m의 명산 수미산(須彌山)처럼 웅장하다, 그리고 산 밑에까지 아파트와 학교들이 자리를 잡고 있고, 그래서 유흥업소들이 없어 조용하다. 게다가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그런 산이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불암산(펌)

 

                카일라스(수미산)

 

불암산에는 정규등산코스가 10여 군데 있지만 나는 2014년부터, 상계역에서 출발하여, 6코스로 정상에 오르고, 4코스로 하산하여 상계역으로 되돌아오는 코스를 줄곧 고수해 왔다

 

이처럼 2014년부터 2021년 겨울까지 약 7년 동안 월, , , 3회 줄곧 불암산을 다녔었는데, 21년 겨울산행을 하다 보니, 웬 지 몸의 균형 잡기가 힘들어지는 느낌이 들고, 인근에 멧돼지가 출현한다는 안내판을 보게 되니 겁이 더럭 난다. 하여 불암산 산행을 포기하고, 집에서 가까운 도산공원의 10.000보 아침산책으로 대신한다.

 

2022년 가을, 도봉산 만월암에서 포대능선까지, 그리고 거북골로 이어지는 단풍이 일품이라는 소리를 듣고 단풍구경에 나선다. 코스는 <도봉탐방지원센터 만월암 포대능선 정상 주봉 - 거북바위 도봉탐방지원센터>으로 산행거리는 7Km, 산행시간은 4시간 정도인데, 3.6Km정도의 구간은 난이도가 높다고 한다.

 

 포대정상 가는 길의 단풍

 

1년 가까이 산행을 안 하다가, 옛날 생각만하고 떠난 단풍구경은 11시경에 도봉탐방지원센터를 출발하여, 13시경에 도상거리 2,5Km 떨어진 만월암에 도착하고, 만월암에서 약 1Km 정도 떨어진 신선봉, 주봉 갈림길에 도착한 시간이 1520분경이다. 이곳에서 잠시 망설인다. 예정대로 주봉을 지나 거북바위 계곡으로 진행하면 해지기 전의 하산은 불가능하겠다.

 

어쩔 수 없이 마당바위 쪽으로 하산기로 하고, 1735분경에 도봉탐방지원센터에 도착하여 산행을 마치고, 충격에 빠진다. 1년 가까이 산행을 중단하고, 공원산책으로 대신한 결과가 이런 것인가? 아니면 80고개를 넘어서고 보니 1년도 안되어 그 만큼 늙었다는 이야기인가? 아마도 두 가지 원인이 함께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한다. 그렇다면 산행을 포기한 결정이 너무 성급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어, 앞으로는 주 2, 2시간 정도 산행을 계속해볼 생각이다.

 

이제 6코스 등정, 4코스 하산의 불암산 산행은 무리인 것 같아 제외하고, 용마산과 아차산둘레길을 선정하여 정기산행지로 삼으려고 한다. 참고로 정기산행지로 선정한 용마산과 아차산둘레길의 트레킹코스와 통계자료를 올린다.

 

                             용마산 트랙과 통계

 

                              아차산둘레길 트랙과 통계

 

 

(2023.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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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집회에 모인 인파, 인파, 인파...엄청나게 모였다.

 

2022815

주사파를 척결하고, 윤 대통령이 원활하게 국정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여, 자주통일의 기반을 이룩하자고, 일천만 보수 세력이 광화문 이승만 광장에 모였다,  

 

이준근 대장이 이끄는 19나라사랑 애국동지모임은, 인파로 넘치는 광화문 광장을 피해, 서울시 시민청 입구에서 만나기로 한다.

 

 하나 둘... 모이는 대원들

 

 대원들 기념사진(부분)

 

오늘 집회의 분위기를 사진으로 전한다.

 

 

 

 

(2022. 8. 15.)

Posted by Urim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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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공원 아침산책

잡기 2022. 8. 3. 11:04

 

 한여름의 도산공원

 

도산공원은 만평도 되지 않는 작은 근린공원이지만, 나무가 많다보니, 공원으로 들어서면, 깊은 숲속에 들어선 느낌이다. 그리고 많은 관리요원들이 유서 깊은 이 공원을 열심히 관리하는 덕에 항상 조용하고, 깨끗해서 좋다.

 

요즈음에는 짙은 녹음 속에서 붉은 목 백일홍이 한창이고 무궁화 꽃이 피기 시작하여 공원이 한층 환해진 느낌인데, 여름을 보내는 것이 아쉬운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요란하다,

 

 도산공원의 유래

 

 배치도

 

 묘소

 

 동상

 

 도산의 말씀

 

 도산기념관

 

 주 산책로와 외각 산책로

 

주 산책로와 숲속 오솔길

 

 참나무 숲길

 

발 지압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목백일홍

 

 목백일홍과 무궁화

 

도산 안창호 선생은 어떤 분인가? 젊은이들은 아마 잘 모를 수도 있겠기에, 어떤 분인가를 설명을 하려면 한 없이 길어지겠다. 하여 190711, 조선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안창호 선생이 만나서 나눈 대화를 소개한다, 이를 통해 안창호 선생이 어떤 분인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온 편지 - LA독립운동가의 꿈, 안창호 선생님

 

190711월 어느 날...

 

일본 근대화의 주역이자 일본 제국주의 최고 외교 정치가로

평가를 받으며, 일본 총리대신 등 40년간 일본 국가지도자로 활동하고

 

이러한 일본 국가지도자 앞에 29세의 한국 청년이 서 있습니다.

심지어 이 만남은 이토 히로부미가 이 청년에게 직접 요청한 것입니다.

 

이 청년은 누구일까요?

 

이 청년과 이토 히로부미의 대화

 

이토 히로부미:

나에게는 평생에 세 가지 꿈이 있습니다.

첫째, 일본을 서양 열강과 대등한 현대국가로 만드는 것이고,

둘째, 한국을 그렇게 하는 것이요,

셋재, 중국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특히 일본의 힘만으로는

서구열강의 아시아 침입을 막을 수 없어

일본은 한국과 중국의 힘을 키워

열강과 싸울 대등한 힘을 모으고자 합니다.

 

그런 이유로 지금 일본은

한국 발전에 온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선생도 아시아를 향한

일본의 위대한 꿈에 함께 해주시오

 

청년의 대답;

한국, 중국, 일본의 협력이

아시아 평화의 시작이라는 것에 동감입니다.

 

또한 당신이 일본을

변화시킨 공로도 알고 있습니다.

한국발전을 위해 노력하려는 것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우리 한국을

진정으로 발전시키고 싶다면

우리 한국은

한국인의 손으로 혁신하게 해 주십시오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위한다며

청일, 러일 전쟁을 했지만

두 전쟁에 승리하고

일본은 한국의 주권을 빼앗지 않았습니까?

 

일본에 침략 당한 한국은

결국 미국이나 러시아에 도움을 구할 것입니다.

 

일본 제국주의 성장을 원치 않는 서구 열강은

한국의 요구를 들어 줄 것이고

결국 일본은 세계의 적이 될 것입니다.

 

당신과 같은 큰 청치가가

일본이 세계의 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해주길 바람니다.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당하고 있었지만

당당히 자기 소신을 말했던 청년.

일본에 협력하면 청년내각의 요직을 주겠다며

이 청년을 회유했던 이토 히로부미.

 

그리고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국가 지도자로 성장한 청년

그는 누구일까요?

 

(이상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의 동영상에서 발췌)

 

우리 집에서 도산공원까지는 걸어서 15분정도 걸린다. 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관계없이, 매일 아침 1시간 30분 정도 이 유서 깊은 도산 공원을 산책한다. 조용하고 잘 정비된 공원을 걷다보면, 여러 가지 상념에 잠기곤 한다.

 

오늘 아침에는 나이와 운동 그리고 건강에 대한 생각이 떠올라 참고로 이를 정리를 해본다.

 

나는 19411020일 생이다. 태어 난지 2달도 안 된, 128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폭격하여,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해이다

 

우리나이로 올해 82. 살만큼 살았다는 생각이다. 동년배 죽마고우 2명이 2~3년 전에 타계했고, 한 살 위인 사촌누이는 치매로 요양병원에서 5년 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 끝에 귀천(歸天)한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다

 

“99 88 234“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는 말을 믿는다. 이제 살만큼 살은 내가 바라는 것은,”00 88 가내사(家內死)“이다. 언제까지 살지는 모르지만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살다,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서 죽지 않고, 집에서 죽는 것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도 같은 바람일 것이다. 바라기만 해서는 염치없는 일이겠다. 바람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경주되어야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도산공원 아침산책으로 하루도 빼지 않고 매일 8,000(10,000보에서 2,000보를 줄임)를 걷고, 벤치프레스/20Kg 60(100번에서 줄임) 윗몸 일으키기 24(32번에서 줄임) 푸쉬 엎 50(100번에서 줄임) 하는 것이 내가 하는 노력이다.

 

 벤치프레스

 

 윗몸 일으키기

 

운동량을 줄인 것은 가깝게 다니는 내과의사와 고혈압 약을 먹을 것인가를 놓고 의논을 할 때, 의사양반이 내가하는 운동에 대해 묻길 레, 줄이기 전 운동량을 이야기 했더니, 이 양반 딱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지금 내가하는 운동량은 젊은이들 기준이고, 80이 넘은 노인에게는 과다한 운동량이라며, 10,000보를 8,000보로 줄이고, 다른 운동도 적절히 줄이라고 한다.

 

의시양반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든다. 늙은이가 운동하는 것이 현재보다 체력을 더 키우고, 근육을 늘리기 위해서 이기보다는,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최상이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기 때문이다. 3개월 전의 이야기이다.

 

운동량을 줄이니, 부담이 되던 운동이 훨씬 수월해져 생활의 일부가 된 느낌이다, 그리고 1년 이상 밀당을 계속했던 고혈압 약 복용문제도 의사양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독립운동가,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 하지만 독립운동가나 정치가보다는 사상가, 교육자로 더욱더 추앙을 받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추모공원이 집 가까이에 있어, 매일 아침 유서 깊은 그 곳에서 산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라 생각한다.

 

 

 

(2022.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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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장군 초상(펌)

 

일본이 전쟁의 목표를 수정하고 제해권 확보에 전력을 다하고 있을 때, 조선 수군은 지휘부교체로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원균이 수군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2년 반 만이었다. 그동안 남해안의수군은 이순신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그들만의 믿음을 가꾸어 온 것이다.

 

이 견고한 유대관계에 원균이 갑자기 끼어든 것이다. 더구나 원균은 조정 대신들과 손잡고 이순신과 조선수군의 위상을 흔든 장본인이었다. 그런 원균이 수군 내에서 고립된 것은 당연했다. 군중에서 수군거리기를, “왜적을 만나면 오직 도망가는 것이 수.”라는 말이 퍼지고 있었다. 이런 장수와 부하들 간의 불신은 조선수군을 안으로부터 무너뜨리고 있었다.

 

조정은 계속 바다를 건너오는 일본군을 바다에서 막으라고 원균을 재촉했다. 하지만 원균은 먼저, 부산으로 나가는 길목인 웅천, 안골포, 가덕도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는 일본수군을, 수륙합동작전으로 제거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수륙합동적전에 대한 육군의 생각은 달라, 조종 신료들 간의 견해도 엇갈려 의견이 분분해지면서, 도체찰사 이원익은 도원수 권율에게 명하여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 원균을 곤장으로 다스리게 한다.

 

1만 수군이 몰살된 칠천량 전투

 

원균과 칠천량 전투 참패

 

선조 3075, 100여쳑의 함선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한 조선수군은 부산 앞바다에 진출하여 항구를 막았다. 하지만 한산도 해전에서의 참패를 설욕하기 위해 4년 동안 준비를 해온 일본은 조선수군이 부산 앞바다에 진출하자 대마도 쪽에서 대기하던 1,000여척의 함대를 움직여, 조선수군을 칠천량에 몰아넣고, 다음날 새벽 조선함대를 총공격한다.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좁은 물길인 칠천량은 일본함선으로 가득 찼다 그들은 조선수군을 겹겹이 포위했다, 단병접전(短兵接戰)에는 세계 최강인 일본수군이 포위된 조선함선에 올라탔다면 그것으로 싸움은 끝난 것이다.

 

원균은 포위망을 뚫고 춘원포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려 도주하려했으나 결국 추적에 나선 이름 없는 일본군 병사의 손에 죽고 만다. 이 패전에서 배설이 판옥선 12척을 끌고 도망했을 뿐,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 장수들과 일만여 명의 수군이 몰살당하고, 조선 수군의 함선들이 사라졌다.

 

 

조선수군 명량애서 되살아나다.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명받아 감옥에서 풀려난 것은 선조 30, 정유년 41일 이었다. 이순신이 칠천량 패전소식 들은 것은 718, 권율 막하에서 백의종군 할 때이고, 그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라는 명을 받은 것은 83일이었다.

 

이순신은 83일부터 29일까지 거의 한달 동안 전라도에서 수군의 재건을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흩어진 군사들을 모으고. 군량을 확보한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판옥선 12척을 인수했다.

 

815일 이순신은 수군의 전력이 너무 약하니, 권율의 육군과 합류해 전쟁에 밈하라.”라는 명령을 받고, 아래와 같이 장계를 올린다.

 

이순신의 노력은 이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둔다. 이순신 장군이 돌라왔다는 소문이 삼남지방으로 급속히 퍼져나가자, 칠천량에서 살아남아 숨어 지내던 병사와 장교들이 모여들고, 전라도의 유력한 백성들이 찾아와 도와주었다.

 

914, 적선 200여척 가운데 55척이 어란포에 들어왔다는 보고가 올라온다. 이순신은 곧바로 진도 벽파진에서 바다를 건너, 전라우수영으로 진을 옮긴다. 우수영 앞은 전라도 맨 서쪽 끝, 명량해협이다. 이곳이 뚫리면 곧바로 서해로 진출할 수 있다. 바로 명량이 일본군의 한강 진출을 막는 최후의 방어선인 것이다..

 

이순신은 휘하 전 장병들에게, 아래와 같은 군령을 내리고, 916일 전 함대의 출동을 명한다,

 

 

전 함대라고 해봤자 모두 13척에 불과했다. 노를 저어 좁은 명량해협을 가로 막자, 자 멀리 적함이 보였다. 133척의 대 함대였다. 조수의 흐름이 조선수군 쪽으로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조선군과 일본군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러나 수로가 좁아 적이 한꺼번에 달려들 수는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던 순간, 이순신이 탄 배가 앞으로 치고 나갔다.

 

이윽고 이순신의 함선이 적을 향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지자총통, 현자총통의 포탄에 적선이 화염에 휩싸이고, 이을 본 병사들의 눈빛은 어느새 지난날 용맹한 조선수군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한동안 이순신의 함선만 적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순신의 뒤를 받치고 있던 열두 척의 전함은 여전히 두려움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채 앞으로 나지도 못하고 물러서지도 못하는 사이에 역류하는 조류는 그들을 뒤로 밀어내어 이순신이 탄 외로운 함선은 차츰 함대와 멀어지고, 이순신의 함선은 치쳐가고 있었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바로 이때 초요기(初療飢-대장의 신호기)가 오르고, 이를 본 중군장 김응함은 전진하라고 소리치고, 거제현령 안위도 목청을 다해 전속력으로 전진하라는 명을 내렸다. 안위의 함선이 제일 먼저 이순신의 배에 다가갔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해서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

 

이순신의 호령에 안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배는 힘을 다하여 적진 속으로 돌격해 갔다. 뒤이어 이순신의 호통을 받은 김응함의 배도 적선을 향해 돌진했다. 일본군은 세 척의 조선 함선을 둘러싸고 사방에서 총을 쏘았다. 그러자 조선함선은 적함을 그대로 들이 받았다 순식간에 적선 세척이 뒤집혔다

 

뒤쳤던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정응두의 배가 전투에 가담하고. 전투는 더욱 치열해 졌다. 바다에 떠다니는 적군의 시체 중에서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를 발견한 이순신은 그의 목을 베어 함선 돛대에 걸었다. 일본군은 충격에 휩싸였다. 겨우 다섯 척의 조선함선에 1백 척이 넘는 일본함대의 선봉이 여지없이 격파당하고 있었다.

 

이때 역류하던 조류가 바뀌었다. 그러자 열세 척의 조선함대가 일제히 빠르게 흐르는 울돌목의 조류를 타고 일본함대를 향해 돌진하자, 순식간에 일본 함선 서른한 척이 울돌목의 빠른 조류에 수장되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한 일본군은 달아나기 시작했다. 일본군도 조선군도 쉽게 믿기지 않는 조선군의 완전한 승리였다.

 

일본수군의 위축을 틈타 이순신은 수군의 재건에 온힘을 기울였다. 이듬해 2월경이 되자 조선 수군의 병력은 8천을 헤아렸고, 전선은 60척에 이르렀다.

이런 군세에 힘입어 이순신은 수군기지를 완도군의 고금도로 옮겼다. 칠천량 패전 후 반년 만에 대략 수군 전력의 절반을 회복한 것이다.

 

이순신 해전(펌)

 

조명연합군의 총공세

 

임진년에 명이 동원했던 군사는 4만이었다, 이번에는 압도적인 군사로 일본군을 완전히 제압하려고 남방군까지 동원하여 8만의 대군을 조손에 파병했다 군량고 병기도 충분했다, 그런데 일본은 이기던 싸움을 갑자기 포기하고 명군과 부딪쳐 보기도 전에 거의 다 점령했던 전라도, 충청도에서부터 빠르게 철수해 남쪽으로 내려가 버렸다.

 

하지만 명은 엄청난 군사력과 비용을 쓰고도 얻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방어하기 좋은 곳에 견고한 성을 쌓고 웅크리고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강 이남의 4주를 노리는 일본은 명을 지치게 만들어 스스로 철수하게 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 챈 명은 전쟁을 조속히 끝내려고 조명연합군을 총동원하여 동로군, 서로군, 중로군, 그리고 수로군을 편성하고, 이들이 동시에 일본군을 공격해서 섬멸시키는 사로병진책(四路竝進策)을 수립한다.

 

사로군은 선조 31818일 서울을 출발하여 남쪽으로 내려간다. 이 작전에 동원된 명군이 모두 92,100, 조선군, 2985, 11만 명이 넘는 대군이었지만, 동로군, 서로군, 중로군이 모두 왜군과의 싸움에 이기지못하고 철수하자, 결국 수로군도 철수한다. 이렇게 조명연합군의 총공세가 실패하자, 조선의 모든 전선이 다시 소강상태로 되돌아갔다

 

도요토미의 죽음

 

임진왜란을 기획하고, 조선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선조 3188일 오사카성에서 숨을 거두었다. 일본은 전쟁의 모든 책임을 죽은 도요토미에게 돌리고 무조건 철수하기로 한다.

 

비밀리에 철군을 준비하던 일본군이 명군에 공식적으로 철군을 통지한 것은 10월 말이었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조선은 명군의 움직임을 살피다 일본군이 명과 철군협상을 시작한 사실을 알게 된다.

 

명나라 육군은 싸우지 않고 왜교성을 넘겨받는 대신 일본군의 철군을 방임하기로 합의한다.

 

일본군의 철수예정일은 11월 중순이고, 이미 전 일본군 진영에서 철군준비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순신이 고니시의 철군계획을 알게 된 것은 118일이라고 한다. 도독 진린이 이순신에게, “순천 왜교성의 적들이 1110일쯤에 철군한다는 기별을 육지에서 통지해 왔다.”고 알렸다. 아울러 그는 이순신에게 철군협상 내용도 알려준다. 하지만 이순신은 저들끼리의 야합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결연히 고니시의 철군 길을 막아섰다.

 

고니시는 당황했다. 그는 부산의 일본군 지휘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진린에게 길을 열어달라며 뇌물공세를 퍼부었다. 고니시의 뇌물에 마음이 흔들린 진린은 이순신의 출병을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 이순신은 왜교성 앞에 있는 장도에 주둔하고, 고니시의 철군 길을 막았다. 고니시는 부산의 일본군 지휘부에 도움을 청하고, 지휘부는 500여척에 이르는 대규모의 구원함대를 편성하여 출항시킨다.

 

일본의 구원함대가 순천으로 올 것을 예상한 이순신은 장도에서 적을 기다리지 않고 순천으로 오는 일본함대를 관음포 앞바다에서 맞아 싸우기로 한다. 장도에서 관음포까지는 20Km가 넘는 거리다. 이순신은 60여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관음포로 은밀히 나아갔다. 진린의 명 수군 함선 300척은 이순신 함대의 좌측 죽도에 포진했다.

 

선조 311119, 캄캄한 이은 새벽에 멀리서 노 젓는 소리가 파도소리에 섞여 들려 왔다, 이윽고 적선이 어둠과 짙은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순신 함대의 포들이 적함을 향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선두의 일본 함선에서 불길이 솟았다. 뒤이어 명나라 함선에서도 포가 작열했다. 짙은 안개와 어둠속에서 기습을 당한 일본군도 전력을 다해 대응했다.

 

차츰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관음포 바다는 피아 1첱 척에 이르는 전함들이 동시에 쏟아내는 포와 불화살, 비명과 연기로 가득 찼다. 이순신의 전함이 앞장서서 그 가운데를 돌파하고 있었다. 조선함대의 대담한 공격에 일본 함대는 흩어지고 부서지고 가라앉았다.

 

드디어 완강하게 저항하던 일본함대가 왔던 길을 되돌아 노량해협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도주하는 일본함대를 놓아주지 않았다. 조선함대가 선봉에 서고, 명 함대가 뒤를 받치며 바짝 추격해 갔다. 뒷덜미를 잡힌 일본군은 결사적으로 저항해왔다. 이순신의 대장선이 제일 선봉에 서서 전 함대에게 더욱 분발하라는 북소리를 울렸다.

노량해전(펌)

 

바로 그 순간, 일본군의 조총이 불을 뿜었다. 달아나던 적군이 쏜 총탄이 이순신의 가슴에 박혔다.

 

전투가 급하다,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은 조선수군의 승리로 끝났고, 격전 중에 살아남은 구원함대 대장은 남은 배를 이끌고 도주했고, 왜교성의 고니시는 해전이 한창일 때 숨겨두었던 500여척의 전선을 끌고 장도와 유도를 지나 전투지역을 우회하여 곧장 남하하여, 부산으로 탈주하는데 성공했다.

 

이순신은 노량진 최후의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향년 54세였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다 호남 일대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슬피 울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런데 선조는 다만 알았다.”라고만 했다.

 

모든 책임을 유성룡에게 씌우다.

 

이순신의 노량해전을 끝으로 임진년에 시작된 전쟁은 7년 만에 무두 종결되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뒤이어 닥칠 전쟁의 후폭풍을 예상하고 모두들 몸을 사렸다. 무엇보다 전쟁을 불러들이고 막아내지 못한 책임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이순신이 노량에서 전사한 날, 유성룡이 파직되었다. 이제 전쟁의 모든 책임은 유성룡에게 전가되었다. 당쟁도 그의 책임이었고, 조선이 자강지책(自强之策)을 세우지 않은 것도, 화의를 주장하여 목전의 안일만을 추구한 것도 모두 그의 죄였다

유성룡 초상(펌)

 

선조는 전쟁이 끝나면 물러나겠다고 전쟁 중에 아홉 번이나 약속을 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끝나자 태도를 바꾸었다. 신하들도 임금이 물러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임금이 물러나면 그들도 함께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성룡을 몰아낸 후, 조정에서는 아무도 더 이상 전쟁에 대한 책임을 거론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지 3년이 다 되어 가는 때, 비로소 조선조정은 전쟁을 승리로 규정하고 승리한 전쟁에 뒤따르는 공신책봉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때 선조는 자신의 속내를 밝혀 공신책록(功臣冊錄)의 기본전제를 제시한다.

그림 4-5

 

선조의 공신책록 기본에 따라 공신책록 대상자가 전쟁에서 직접 공을 세운 사람보다 전쟁 중에 임금의 측근에서 임금을 모신 사람 위주로 압축되고, 전쟁 중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목숨을 걸고 적과 싸운 장수나 의병이 아니라, 명나라 군대를 불러 온 사람, 바로 선조 자신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다 비웃을 일이었지만 공신책록은 이런 방향으로 흘러 임란공신이 확정되었다.

 

그 중 사람들은 원균이 이순신, 권율과 나란히 정왜 공신 1등에 책록 되는 것에 의문을 표했으나, 선조는 굳이 원균을 1등 공신에 책록하라고 고집했다. 아마도 원균을 1등 공신에 밀어올림으로써 이순신의 공을 깎아내리려는 심보가 작용했던 모양이다. 그뿐인가? 선조자신은 정륜입극 성덕홍령 기성대의 격천희운(正倫立極性德洪烈聲大義格天熙運) 16자 존호를 받는다. “주자학적 가치를 높이 세우고 지극한 마음으로 중국을 섬겨 천하대의를 실천해 나라를 태평하게 만든 임금.”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에필로그

 

임진왜란은 일찍이 서구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이 부강해지면서, 도요토미가 전국을 통일한 후, 조선을 앞세워 쇠약해진 명나라 공격하여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잡아보겠다는 망상에서 시작된 전쟁이었다.

 

이처럼 한 국가의 운명은 자국 내의 문제로 결정되기보다는 주변국들의 정세 변화에 따라 결정되기 마련이다. 임진왜란 후 300년이 지나자, 일본은 명치유신으로 세계열강들과 겨눌 수 있을 만큼 국력이 강해져, 청일전쟁, 노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을 합병했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일본은 임진왜란 때처럼, 주변정세,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만주사변 후, 전선이 확대되면서, 급기야 진주만 폭격으로 까지 치닫다가 결국 무릎을 꿇는 바람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지만, 김일성을 앞세운 소련의 침공으로 6/25 사변이라는 비극을 맞는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 같은 리더가 없고, 임진왜란 때의 선조 같은 사람이 나라를 이끌었다면 대한민국은 아마도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저자는 아래와 같이 이 책을 끝마치며 우리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2021, 5. 8.)

Posted by Urim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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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첩 때 사용했던 화차

 

서울로 쫓겨 온 일본군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 전투에서 기선을 제압하고, 내성으로 공격해 들어간다. 이에 일본군은 조총으로 집중사격을 가하여 명나라군사가 많이 죽었다. 이를 본 명나라 이여송은 일본군에게 퇴로를 차단하지 않겠다고 제안하자, 고니시군은 간신히 전멸을 면하고, 동강을 건너 패주한다,

 

조명 연합군과의 평양성을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은 후퇴하는 4만의 군사를 은밀히 숨겨두고, 추격해온 이여송 군대 2만과 벌인, 백제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체면을 세운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3만 대군을 동원하여 권율의 군사 2,300명과 처영(處英)이 이끄는 승병들이 방어하는 행주산성을 공격한다.

 

선조 26(1593) 212일 새벽부터 시작된 전투는 저녁까지 이어졌다. 일본군은 장창과 일본도를 뽑아들고 목책으로 달려들고, 조선군은 일제히 화살과 대포, 그리고 각종 화약무기로 응전했다. 일본군은 조선군의 열 배나 되는 대군을 동원하여 끊임없이 공세를 취했으나, 조선군의 결사적인 방어와 가공할 화약무기의 위력에 밀려 쉽사리 산성을 파하지 못한다.

 

하지만 새벽부터 저녁까지 이어진 공방전에서 조선군의 회약무기와 화살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고, 일본군이 토성 앞 까지 진출한 위기의 순간에 충청수사 정걸(丁傑)이 배 두 척에 화살을 가득 싣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오자, 결국 일본군은 공격을 단념하고 서울로 퇴각한다. 대군을 동원하고, 총사령관이 직접 지휘한 전투였기에 일본군은 반드시 이겼어야 했던 싸움이었다.

권율장군 초상

 

선조 26320일 현재, 서울에 집결한 일본군 병력은 53. 그리고 서울이남 점령지에 분산 배치된 병력이 약 6, 하여 잔존 일본 병력은 모두 12만에 불과했다. 바다 건너온 약 20만 명 중에 8만 여명이 생명을 잃은 것이다.

 

패배한 적군의 희한한 철수

 

195333, 조선 주둔군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는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최고위 장수들을 불러 모은다. 이 자리에 모인 17명의 장수들은 조선에 진출한 일본군의 처지를, 전원의 연서로, 도요토미에게 알리고,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도요토미는 서울 주둔군에게 경상도 남부지역으로의 철수를 허락한다.

 

도요토미의 철수허락은 떨어졌지만, 적지 한가운데를 뚫고 1천리가 넘는 길을 후퇴해야 하는 일본군은 공포에 휩싸이고 만다. 이제 싸움에 패하여 후퇴하는 길에는 날카로운 조선군의 창검이 기다릴 터인데, 이런 속을 군량부족으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후퇴하다보면,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였던 것이다.

의병봉기와 3대 대첩(펌)

 

난국에 처한 일본군 지휘본부는 서울 철수결정을 극비에 붙이고, 명나라와 협상을 시작하여, 선조 2648, 고니시는 전쟁종결을 서두르는 심유경과 신속하게 강화회담을 타결한다.

 

협의의 요지는 일본군이 서울을 명군에 내주는 대신, 명군은 남해안까지 일본군의 안전한 철수를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은 강화는 믿을 수 없으니, 궁지에 몰린 일본군을 공격해야한다고 주장했으나, 이 협상에 조선이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었다.

일본군의 서울 철수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일본군은 철수하는 군대를 김해와 창원에 모은 후, 호남에 그들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진주성을 공격했다. 도요토미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는 판단 하에, 전쟁목표를 바꾸어. 중국정벌은 장기적 과제로 미루고, 우선 조선을 확실하게 점령하기로 하고, ‘진주성을 필히 공략하여 경상, 전라 양도를 장악하라.’라고 엄명했다.

 

일본군은 진주성 공격에 5개 부대를 편성하여, 10반의 군사를 동원하고, 일본 수군 8천도 가세했다. 사실상 조선에 있는 일본군을 총동원한 것이다. 하지만 대군을 동원하여 일본군과 맞서기를 꺼리던 명군은 일본의 속임수에 깊이 말려들어 공성책(空城策)을 주장했다. 성을 비워서 적의 예봉을 피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입장은 달랐다. 진주성은 호남을 지키는 요충이니 잠시라도 적군에게 내어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호남, 경상, 충청에서 의병들이 진주로 달려 왔으나 모두 합친 군사 수는 2,300에 불과했고, 진주성 안에는 조선군사 3,400명과 민간인들을 합쳐 6만 명이 있었다.

 

하지만 명과의 협상에서 조선의 남부 4도를 얻어내려고 했던 일본군운.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서 진주성을 반드시 손에 넣어야했다. 그들은 죽기 살기로 공격을 퍼 부었다, 629, 전투 8일째였다. 장맛비에 흠뻑 젖은 낡은 동쪽 상벽이 무너지고, 일본군이 성안으로 밀려들어, 6만의 군민을 관아 창고에 몰아 고 불을 질러 모두 학살했다.

진주성 혈전

 

진주목사 김시민()와 의병대장 김천일장군() 초상

 

조선반도 남쪽을 요구하다.

 

진주성을 차지한 일본군도 이 싸움에서 2만이나 전사했다. 많은 군사력을 소진한 일본군은 더 이상 호남으로 진출할 힘이 없었다. 일본군은 진주성 공격으로 협상력을 높인데 만족하고 진주성에서 철수하여 쫓기듯 서둘러 부산으로 물러났다. 진주성을 발판으로 호남으로 진출하려던 일본군의 야심은 또다시 좌절되고 만 것이다. 일본군은 조선 남쪽 해양에 왜성을 쌓고 장기전에 대비한다.

순천왜성(펌)

 

선조 26(1593) 722일 일본은 조선에 6만 병역만 남기고, 주력군의 철수를 시작한다. 이에 명군도 철수를 시작하여 16천 명의 병력만 부총병 유정(劉綎)의 휘하에 남겼다. 그리고 1년 후인 선조 278월이 되자 명군의 대부분이 조선에서 철수했고, 일본도 38천의 병력만 조선에 남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렇게 전쟁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일본의 속셈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차음부터 잘못된 협상은 조선에 기나긴 고통을 안겨준다, 차음 협상을 구걸한 쪽은 일본군이었으이, 일단 포위망에서 벗어나자, 일본군은 협상을 서두르지 않았다.

 

선조 29(1596), 4년 동안 끌어온 강화협상이 결렬됐다.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였다. 교활한 일본의 잔꾀에 속아, 명나라 서툰 협상가들이 공을 서두르다 당한 협상이었다. 일본은 심유경이 조선의 남쪽 4개도를 조선에 넘겨주고 명의 황녀를 도요토미의 후궁으로 보내준다는 합의를 이행하지 않아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큰소리를 쳤고. 심유경을 비롯하여 명에서 협상을 주도한 사라들은 협상실패에 책임을 지고 모두 죽은 반면, 일본에서 협상을 주도한 사람들은 모두 살아서, 조선을 재침략하는 장수가 되어 돌아왔다.

거짓협상

 

정유년, 일본군이 되돌아오다.

 

일본은 다시 전쟁을 준비했다. 아무런 성과도 없이 전쟁을 끝내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컸다. 많은 병사의 희생과 막대한 재정을 투입했음에도 성과 없이 전쟁을 끝냈을 때 터져 나올 반발을 미연에 방지하고, 도요토미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강이남 4개도의 일본편입이 필요했고, 이를 위한 전쟁재개는 불가피했던 것이다. 결국 도요토미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일본과 조선, 그리고 명나라의 수많은 백성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추악한 전쟁을 재개한 것이다.

 

일본이 제2차 조선침략에 동원한 병력은 새로 투입한 12만 명과, 남해안에 견고한 왜성을 쌓고 조선에 남아있던 일본군 2만 명을 합하여 모두 14만이었다. 임진년에 동원했던 20만 명에 비해 축소된 규모다. 이는 전쟁을 재개한 일본의 속셈이 조선의 남쪽 점령에 있었기 때문이고, 이제 전쟁은 남쪽 해안에서, 제해권 장악을 위한 수전이 중심이 되게 된다.

 

선조 30(1597) 정유년 1, 고니시의 제114,700명이 다시 부산포에 상륙하고 뒤이어 가토의 부대도 서생포에 상륙했다. 일본군이 다시 바다를 넘어 조선으로 들어오고 있었지만, 남해의 제해권을 잡고 있던 이순신이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앉자, 수군을 부산 쪽으로 옮기고, 육군으로 재직하던 원균을 수군으로 재기용하여 거제도로 보내자는 좌의정 김응의 주장과 좌찬성 윤근수의 한산도 전진기지를 폐쇄라고 거재도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거론되면서 조정과 수군의 갈등이 심화된다.

 

이순신을 죽여라

 

여기에 요시라의 음모가 작용하여 선조는 왕의 명령에 따르지 않은 이순신을 죽이라고 한다. 요시라는 고니시의 수하병사로 경상우병사 김응서와 친하게 지낸 자이다. 이런 요시라가 김응서를 몰래 찾아와 고니시가 강화를 이루지 못한 것은 가토 때문이라면서, 가토가 며칠 후 바다를 건너올 예정라고 알려준다.

 

김응서는 이 내용을 비밀 장계로 조정에 알렸고, 조정은 이순신에게 가토의 도해를 차단하라고 지시를 내렸지만, 이순신은 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순신도 항명이 얼마나 중한 죄인지를 잘 알았으나, 전장에서 수많은 군사의 목숨과 국가의 안위를 책임진 장수로소 불확실한 정보를 믿고 군사의 진퇴를 결정하는 것은 쉽게 결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처럼 이순신이 수군의 전진 배치를 적극 수용하지 않고, 가토의 도해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죄를 물어 선조는 이순신을 죽이라고 지시하고, 선조 3026일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선조 303월 서울로 잡혀온 이순신은 한차례 고문을 받았으나, 투옥된 지 28일 만에 풀려났다 여기에는 지중추부사 정탁이 상소문을 올려 이순신이 공을 세워 죄를 씻게 해 달라고 호소한 것이 선조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선조는 이순신을 풀어주는 대신 권율의 막하에서 백의종군 하라고 명한다.

 

한편 일본의 고니시군대가 다시 부산포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한 명나라는 내키지는 않지만 자국의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시 대규모의 원군을 조직하여 조선으로 파견한다. 선조 3011, 명이 파견한 병력은 8만 명에 이르렀다

 

 

(2021.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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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5년 명나라 군대 모습(펌)

 

궁지에 몰린 임금이 세자와 권력을 나누다.

 

파천(播遷)이 결정되자 선조는 피란을 재촉한다. 파천이 결정된 다음날(429) 어두운 밤,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속에 임금이 궁궐을 떠났다. 뒤이어 백성들이 대궐로 뛰어들었다. 약탈과 파괴가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백성들은 궁궐에 불까지 질렀다.

아수라장

 

어가는 다음날 저녁 무렵에 임진강에 도착한다. 줄기차게 내린 비로 강물이 불어나 넘실거리는데 쓸 수 있는 배는 5~6척에 불과했다. 이 배로 강을 건넌 선조는 배를 가라앉히라고 명하고, 아울러 가까운 곳의 인가도 철거하라고 지시한다, 임금의 명에 따라 근처의 집과 정자에 불길이 올랐다. 강을 건너지 못한 절반이 넘는 신하들은, 빗속에서도 거세게 타오는 불길을 뒤로하고, 북쪽으로 도망하는 어가를 바라보며 허탈과 분노에 휩싸인다.

 

어가가 동파(파주)에 닿은 것은 깊은 밤 심경(11~1)이었다.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질척거리는 길을 걸었으나, 임금만 겨우 허기를 면했을 뿐, 모두가 끼니를 굶었다. 동파 역에서 밤을 보낸 행차는 아침이 되어도 출발할 수가 없었다, 말을 모는 사람과 교꾼 노릇을 하던 병정, 인근 백성들까지 모두 도망가 버렸기 때문이다. 경기감사가 병사들을 꾸짖어 겨우 행차가 출발을 했지만 군졸들이 모두 도망가서 호위할 사람도 없었으나, 때마침 황해감사 조인득(趙仁得)의 군사가 어가를 호위하려고 달려와, 431, 어가는 겨우 개성부에 도착했다,

 

일본군이 서울에 당도한 것은 52, 고니시부대가 먼저 도착하고, 그 이튿날 가토부대가 도착했다. 서울이 함락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임금은 53, 날이 어두워질 무렵 개성을 떠났다. 신하들이 위의(威儀)를 갖추어 떠나자고 했지만, 겁에 질린 임금은 황급히 떠나자고 재촉했다. 백성들은 이런 임금을 비웃으며 욕했다. 어가는 58일 평양에 도착했다.

 

뒤늦게 평양에 돌아온 이덕형(李德馨)이 광범위하게 번져가는 민심의 이반을 걱정했다. 그가 말한 별다른 조치란 전란의 책임을 지고 임금이 물러나야한다는 말이었다.

이덕형의 민심 이반 걱정

 

일본군이 527일 임진강를 건넜다는 소식이 평양으로 전해진 것은 61일이었다. 평양성을 사수하여야한다는 대신들의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68, 임금의 행차가 평양을 떠나려는데, 아전과 백성들이 원망하고 격분해서 폭동을 일으켜, 창과 칼이 마구 휘둘러지고, 종묘 위패가 땅에 팽개쳐졌다. 백성들의 저항으로 임금의 행차가 며칠이나 떠나지 못하다가, 11일에야 겨우 평양을 떠나 영변으로 향했다. 이튿날 안주에 이르니 백성들은 모두 임금을 피해버리고, 호종하던 관원들도 도망가, 행차를 따르는 사람은 10여명이 되지 않아, 임금은 밥을 굶었다.

 

일본군의 막대한 군사력에 조선군이 연전연패하자, 선조는 상황이 급박하면 요동으로 피신하여, 명나라의 원군을 요청해야한다고 주장했으나, 대다수의 신하들은 선조가 조선 땅을 떠난다는 것은 조선을 버리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명나라에 청병하는 것도 소극적이었다. 그들은 일본군을 막는 주체는 조선군이 되어야하며, 명군은 어디까지나 조선군을 원조하는 수준이어야한다고 믿었다

 

평양을 떠난 대가(大駕)가 영변에 도착했을 때 선조와 신하들은 임금이 요동으로 들어가야 하느냐 아니면 조선 땅에 남아 항전을 해야 하느냐를 두고 또 다시 논쟁을 벌인다.

 

대부분의 신하들은 임금이 의주로 가지 말고, 함경도나 평안북도 산골짜기로 들어가서 일본군과 항전을 계속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선조는 계속 중국으로 들어가서 명나라의 힘을 빌리자고 고집했다.

선조의 몽진도(펌)

 

이런 상황에서 비변사 당상 이성중 등이 국왕의 요동 행을 전제로, 세자가 조선에 남아 대 일본항전을 이끌자는 절충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재야에서는 왕위를 아예 세자에게 선위(禪位)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공개적으로 선조를 압박했다

세자에게 선위할 것를 청하는 상소

 

선조는 고심 끝에 타협안을 내 놓는다. 바로 본 조정 외에 별도로 임시조정을 두어, 세자에게 임시로 나랏일을 대신하는 지위를 부여한 후 조선에 남고, 선조 자신은 요동으로 피란하는 것으로 신하들과 타협한 것이다.

 

615, 임금의 행차가 박천에 도착한 날, 저녁에 평양이 함락됐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세자는 종묘위패를 모시고 임금과 헤어져 산군(山郡)으로 향하고, 임금은 이경(二更-9~11)에 의주로 급히 떠날 것을 재촉하자, 온 고을이 소동하여, 저녁밥도 굶고, 길을 떠났으나, 비는 내리고 길은 질었다. 이때 조정신하로 행차를 따른 자는 겨우 10여 명에 불과했으나, 선조는 명나라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먼저 요동으로 건너가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다.

 

일본의 좌절- 개전 3개월 만에 찾아온 불안

 

일본군이 서울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고, 도요토미는 63, 명나라 정벌계획이 담긴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하지만 그 후 도요토미의 군사, 구로다 요시다카 등이 조선으로 건너와 전선을 직접 살피고 도요토미에게 현황을 보고하자, 도요토미는 명나라 정벌계획을 변경한다. 임진년에는 조선평정을 완전히 이룩하고, 명나라 정벌문제는 자신이 도해(渡海)한 후 이듬해 봄에 결행한다고 715, 장수들에게 밝힌 것이다.

 

이처럼 명나라 정벌계획을 바꾼 것은, 조선 왕의 피란으로 조선의 인력과 물자를 동원할 수 없게 되었고, 전선 전역에서 일어난 조선 의병들의 활약과 수군의 등장으로 일본군의 일방적인 진격에 제동이 걸렸기 때문이다.

 

의병 봉기와 3대첩(펌)

전쟁은 이제 장기전으로 전환되었다. 고니시가 더 이상 북진하지 않고 평양성만 확보하고 있으면서, 조선 점령정책이 안정될 때, 나고야에 대기하고 있는 일본군 예비병력 10만이 서해안을 돌아서 평양성에 도착한다는 계획이다. 고니시는 평양성에서 선조에게 조롱하는 글을 보냈다

 

고니시의 선조 조롱

 

그랬다. 고니시의 말대로 일본의 예비병력 10만이 서해안을 돌아 평양에 들어오는 순간, 일본의 대명 전쟁준비는 완성되는 것이었다. 이른바 수륙병진(水陸竝進) 전략이었다. 그들의 행보가 신중해졌다. 전격전의 전략은 이미 틀어져버렸다.

 

일본군을 더욱 당황하게 만든 것은 예상보다 빠른 명나라의 참전이었다. 조승훈이 이끄는 요동병 3천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들어온 것은, 전쟁 발발 두 달 만인 선조 256월이었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에 정식으로 참전을 요청하지 않았으나, 명나라는 전쟁 상황과 정보 수집을 목적으로 서둘러 파병한 것이었다,

 

그런데 1592717, 조승훈이 이끄는 명군이 평양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하자 명은 충격에 휩싸였다. 명은 일본군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과, 그들을 제압하려면 요동병력만으로는 어렵고, 남방을 포함한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국경 밖 자체 방어선으로 평양을 설정 했던 명은 평양이 일본 군 수중에 들어가자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다.

 

하지만 명은 거듭되는 조선의 다급한 구원 요청에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일본을 막아야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었다. 문제는 조선에서 일본군을 막느냐, 아니면 중국에서 일본을 막느냐 하는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완전히 장악하고 나면, 나고야에 대기 중인 10만 예비 병력이 추가로 투입되고, 조선에서 징집한 10~20만 병력을 선봉에 세워, 50~60만 군세를 만든 후, 만주를 장악하고, 바다로 산동, 천진을 위협하면서 명에 승부를 걸어온다면..... 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이었다. 하여 명은 조선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하는 것이 확실한 자기방어 대책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른바 공세적 방어책이라는 것인데, 그 배경에는 험준한 조선반도의 지형이. 큰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한다. 명은 결국 자국의 안전을 위해 조선의 구원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명은 10만 대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한 준비 하는 동안, 조선이 지레 무너질까를 걱정하여 명 황제는 서둘러 칙서를 내린다. 이울러 명은 파병에 필요한 시간을 벌고자 심유경을 보내, 일본과 협상을 벌인다. 의병들의 활약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바닷길은 이순신에게 막혀, 수륙병진 정책이 물거품이 돼 버린 일본도 시간이 필요하기는 마찬가지라, 명과 일본은 1020일부터 50일간의 제1차 휴전협정에 합의한다.

명나라 조선의 충절 요구

 

일본군의 패퇴

 

명나라 이여송 휘하의 4~5만의 대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넌 것은 임진년 1222일이었다. 명군이 주도한 평양성 공방전은 선조 26(1593) 시작되었다. 조선은 김명원 도원수 휘하의 8천 명의 군사와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이끄는 승군 2천 명이 합세했다. 이에 맞선 고니시군은 1만에서 15천 정도였다.

 

이여송은 기병 100여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 아래로 나아가 모든 장수들을 직접 지휘했다. 명군은 대포를 앞세워 공격을 개시하여 성벽을 파괴하고, 기선을 제압한다.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 내성으로 공격해 들어가자, 일본군은 조총으로 집중사격을 가해 명나라군사가 많이 죽었다. 피해가 늘어가자 이여송능 군사를 거두고, 일본군에 사람을 보내 퇴각로를 열러주겠다고 제안하자, 그날 밤, 고니시의 일본군은 성벽을 넘어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도주했다. 부상자들을 모두 평양에 버리고 간 필사의 탈주였다.

평양성 탈환

 

평양성 전투의 승리는 전쟁의 흐름을 단숨에 바꾸어 버렸다. 전세는 역전되어 일본군의 패주가 시작된 것이다. 일본군은 서울 이북에 전개한 모든 병역을 서울로 집결시켜 튼튼한 방위선을 구축하지 못하면 조선에 진출한 일본군이 각개격파 되어, 전멸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싸인다.

 

하지만 이여송의 명군은 도망하는 일본군을 급박하게 추격하지 않았다. 조선조정은 승세를 타고 일본군을 추격하여 섬멸하자고 했으나, 명군은 오직 명나라의 안전만 생각할 따름이었다. 명군은 평양성을 탈환한 지 8일이 지나서야 뒤늦게 일본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한편 일본은 추격하는 명군에 반격하기 위해, 고양 남쪽 여석 현에 4만의 대군을 숨기고 명군을 기다렸다. 하지만 일본군의 사력을 다한 노림수를 눈치 채지 못하고, 급히 추격하던 이여송의 군사 2만과 일본군 4만이 벽재관에서 맞붙어, 명군이 대패하자, 이여송은 129일 개성으로 철군했다. 이후 명군은 전쟁을 정치로 해결하려고 한다.

 

 

 

(2021. 4. 17.)

Posted by Urim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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