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대첩 때 사용했던 화차

 

서울로 쫓겨 온 일본군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 전투에서 기선을 제압하고, 내성으로 공격해 들어간다. 이에 일본군은 조총으로 집중사격을 가하여 명나라군사가 많이 죽었다. 이를 본 명나라 이여송은 일본군에게 퇴로를 차단하지 않겠다고 제안하자, 고니시군은 간신히 전멸을 면하고, 동강을 건너 패주한다,

 

조명 연합군과의 평양성을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은 후퇴하는 4만의 군사를 은밀히 숨겨두고, 추격해온 이여송 군대 2만과 벌인, 백제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체면을 세운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3만 대군을 동원하여 권율의 군사 2,300명과 처영(處英)이 이끄는 승병들이 방어하는 행주산성을 공격한다.

 

선조 26(1593) 212일 새벽부터 시작된 전투는 저녁까지 이어졌다. 일본군은 장창과 일본도를 뽑아들고 목책으로 달려들고, 조선군은 일제히 화살과 대포, 그리고 각종 화약무기로 응전했다. 일본군은 조선군의 열 배나 되는 대군을 동원하여 끊임없이 공세를 취했으나, 조선군의 결사적인 방어와 가공할 화약무기의 위력에 밀려 쉽사리 산성을 파하지 못한다.

 

하지만 새벽부터 저녁까지 이어진 공방전에서 조선군의 회약무기와 화살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고, 일본군이 토성 앞 까지 진출한 위기의 순간에 충청수사 정걸(丁傑)이 배 두 척에 화살을 가득 싣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오자, 결국 일본군은 공격을 단념하고 서울로 퇴각한다. 대군을 동원하고, 총사령관이 직접 지휘한 전투였기에 일본군은 반드시 이겼어야 했던 싸움이었다.

권율장군 초상

 

선조 26320일 현재, 서울에 집결한 일본군 병력은 53. 그리고 서울이남 점령지에 분산 배치된 병력이 약 6, 하여 잔존 일본 병력은 모두 12만에 불과했다. 바다 건너온 약 20만 명 중에 8만 여명이 생명을 잃은 것이다.

 

패배한 적군의 희한한 철수

 

195333, 조선 주둔군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는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최고위 장수들을 불러 모은다. 이 자리에 모인 17명의 장수들은 조선에 진출한 일본군의 처지를, 전원의 연서로, 도요토미에게 알리고,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도요토미는 서울 주둔군에게 경상도 남부지역으로의 철수를 허락한다.

 

도요토미의 철수허락은 떨어졌지만, 적지 한가운데를 뚫고 1천리가 넘는 길을 후퇴해야 하는 일본군은 공포에 휩싸이고 만다. 이제 싸움에 패하여 후퇴하는 길에는 날카로운 조선군의 창검이 기다릴 터인데, 이런 속을 군량부족으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후퇴하다보면,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였던 것이다.

의병봉기와 3대 대첩(펌)

 

난국에 처한 일본군 지휘본부는 서울 철수결정을 극비에 붙이고, 명나라와 협상을 시작하여, 선조 2648, 고니시는 전쟁종결을 서두르는 심유경과 신속하게 강화회담을 타결한다.

 

협의의 요지는 일본군이 서울을 명군에 내주는 대신, 명군은 남해안까지 일본군의 안전한 철수를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은 강화는 믿을 수 없으니, 궁지에 몰린 일본군을 공격해야한다고 주장했으나, 이 협상에 조선이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었다.

일본군의 서울 철수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일본군은 철수하는 군대를 김해와 창원에 모은 후, 호남에 그들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진주성을 공격했다. 도요토미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는 판단 하에, 전쟁목표를 바꾸어. 중국정벌은 장기적 과제로 미루고, 우선 조선을 확실하게 점령하기로 하고, ‘진주성을 필히 공략하여 경상, 전라 양도를 장악하라.’라고 엄명했다.

 

일본군은 진주성 공격에 5개 부대를 편성하여, 10반의 군사를 동원하고, 일본 수군 8천도 가세했다. 사실상 조선에 있는 일본군을 총동원한 것이다. 하지만 대군을 동원하여 일본군과 맞서기를 꺼리던 명군은 일본의 속임수에 깊이 말려들어 공성책(空城策)을 주장했다. 성을 비워서 적의 예봉을 피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입장은 달랐다. 진주성은 호남을 지키는 요충이니 잠시라도 적군에게 내어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호남, 경상, 충청에서 의병들이 진주로 달려 왔으나 모두 합친 군사 수는 2,300에 불과했고, 진주성 안에는 조선군사 3,400명과 민간인들을 합쳐 6만 명이 있었다.

 

하지만 명과의 협상에서 조선의 남부 4도를 얻어내려고 했던 일본군운.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서 진주성을 반드시 손에 넣어야했다. 그들은 죽기 살기로 공격을 퍼 부었다, 629, 전투 8일째였다. 장맛비에 흠뻑 젖은 낡은 동쪽 상벽이 무너지고, 일본군이 성안으로 밀려들어, 6만의 군민을 관아 창고에 몰아 고 불을 질러 모두 학살했다.

진주성 혈전

 

진주목사 김시민()와 의병대장 김천일장군() 초상

 

조선반도 남쪽을 요구하다.

 

진주성을 차지한 일본군도 이 싸움에서 2만이나 전사했다. 많은 군사력을 소진한 일본군은 더 이상 호남으로 진출할 힘이 없었다. 일본군은 진주성 공격으로 협상력을 높인데 만족하고 진주성에서 철수하여 쫓기듯 서둘러 부산으로 물러났다. 진주성을 발판으로 호남으로 진출하려던 일본군의 야심은 또다시 좌절되고 만 것이다. 일본군은 조선 남쪽 해양에 왜성을 쌓고 장기전에 대비한다.

순천왜성(펌)

 

선조 26(1593) 722일 일본은 조선에 6만 병역만 남기고, 주력군의 철수를 시작한다. 이에 명군도 철수를 시작하여 16천 명의 병력만 부총병 유정(劉綎)의 휘하에 남겼다. 그리고 1년 후인 선조 278월이 되자 명군의 대부분이 조선에서 철수했고, 일본도 38천의 병력만 조선에 남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렇게 전쟁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일본의 속셈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차음부터 잘못된 협상은 조선에 기나긴 고통을 안겨준다, 차음 협상을 구걸한 쪽은 일본군이었으이, 일단 포위망에서 벗어나자, 일본군은 협상을 서두르지 않았다.

 

선조 29(1596), 4년 동안 끌어온 강화협상이 결렬됐다.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였다. 교활한 일본의 잔꾀에 속아, 명나라 서툰 협상가들이 공을 서두르다 당한 협상이었다. 일본은 심유경이 조선의 남쪽 4개도를 조선에 넘겨주고 명의 황녀를 도요토미의 후궁으로 보내준다는 합의를 이행하지 않아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큰소리를 쳤고. 심유경을 비롯하여 명에서 협상을 주도한 사라들은 협상실패에 책임을 지고 모두 죽은 반면, 일본에서 협상을 주도한 사람들은 모두 살아서, 조선을 재침략하는 장수가 되어 돌아왔다.

거짓협상

 

정유년, 일본군이 되돌아오다.

 

일본은 다시 전쟁을 준비했다. 아무런 성과도 없이 전쟁을 끝내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컸다. 많은 병사의 희생과 막대한 재정을 투입했음에도 성과 없이 전쟁을 끝냈을 때 터져 나올 반발을 미연에 방지하고, 도요토미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강이남 4개도의 일본편입이 필요했고, 이를 위한 전쟁재개는 불가피했던 것이다. 결국 도요토미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일본과 조선, 그리고 명나라의 수많은 백성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추악한 전쟁을 재개한 것이다.

 

일본이 제2차 조선침략에 동원한 병력은 새로 투입한 12만 명과, 남해안에 견고한 왜성을 쌓고 조선에 남아있던 일본군 2만 명을 합하여 모두 14만이었다. 임진년에 동원했던 20만 명에 비해 축소된 규모다. 이는 전쟁을 재개한 일본의 속셈이 조선의 남쪽 점령에 있었기 때문이고, 이제 전쟁은 남쪽 해안에서, 제해권 장악을 위한 수전이 중심이 되게 된다.

 

선조 30(1597) 정유년 1, 고니시의 제114,700명이 다시 부산포에 상륙하고 뒤이어 가토의 부대도 서생포에 상륙했다. 일본군이 다시 바다를 넘어 조선으로 들어오고 있었지만, 남해의 제해권을 잡고 있던 이순신이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앉자, 수군을 부산 쪽으로 옮기고, 육군으로 재직하던 원균을 수군으로 재기용하여 거제도로 보내자는 좌의정 김응의 주장과 좌찬성 윤근수의 한산도 전진기지를 폐쇄라고 거재도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거론되면서 조정과 수군의 갈등이 심화된다.

 

이순신을 죽여라

 

여기에 요시라의 음모가 작용하여 선조는 왕의 명령에 따르지 않은 이순신을 죽이라고 한다. 요시라는 고니시의 수하병사로 경상우병사 김응서와 친하게 지낸 자이다. 이런 요시라가 김응서를 몰래 찾아와 고니시가 강화를 이루지 못한 것은 가토 때문이라면서, 가토가 며칠 후 바다를 건너올 예정라고 알려준다.

 

김응서는 이 내용을 비밀 장계로 조정에 알렸고, 조정은 이순신에게 가토의 도해를 차단하라고 지시를 내렸지만, 이순신은 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순신도 항명이 얼마나 중한 죄인지를 잘 알았으나, 전장에서 수많은 군사의 목숨과 국가의 안위를 책임진 장수로소 불확실한 정보를 믿고 군사의 진퇴를 결정하는 것은 쉽게 결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처럼 이순신이 수군의 전진 배치를 적극 수용하지 않고, 가토의 도해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죄를 물어 선조는 이순신을 죽이라고 지시하고, 선조 3026일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선조 303월 서울로 잡혀온 이순신은 한차례 고문을 받았으나, 투옥된 지 28일 만에 풀려났다 여기에는 지중추부사 정탁이 상소문을 올려 이순신이 공을 세워 죄를 씻게 해 달라고 호소한 것이 선조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선조는 이순신을 풀어주는 대신 권율의 막하에서 백의종군 하라고 명한다.

 

한편 일본의 고니시군대가 다시 부산포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접한 명나라는 내키지는 않지만 자국의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시 대규모의 원군을 조직하여 조선으로 파견한다. 선조 3011, 명이 파견한 병력은 8만 명에 이르렀다

 

 

(2021. 5. 4.)

Posted by Urimah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