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장군 초상(펌)

 

일본이 전쟁의 목표를 수정하고 제해권 확보에 전력을 다하고 있을 때, 조선 수군은 지휘부교체로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원균이 수군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2년 반 만이었다. 그동안 남해안의수군은 이순신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그들만의 믿음을 가꾸어 온 것이다.

 

이 견고한 유대관계에 원균이 갑자기 끼어든 것이다. 더구나 원균은 조정 대신들과 손잡고 이순신과 조선수군의 위상을 흔든 장본인이었다. 그런 원균이 수군 내에서 고립된 것은 당연했다. 군중에서 수군거리기를, “왜적을 만나면 오직 도망가는 것이 수.”라는 말이 퍼지고 있었다. 이런 장수와 부하들 간의 불신은 조선수군을 안으로부터 무너뜨리고 있었다.

 

조정은 계속 바다를 건너오는 일본군을 바다에서 막으라고 원균을 재촉했다. 하지만 원균은 먼저, 부산으로 나가는 길목인 웅천, 안골포, 가덕도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는 일본수군을, 수륙합동작전으로 제거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수륙합동적전에 대한 육군의 생각은 달라, 조종 신료들 간의 견해도 엇갈려 의견이 분분해지면서, 도체찰사 이원익은 도원수 권율에게 명하여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 원균을 곤장으로 다스리게 한다.

 

1만 수군이 몰살된 칠천량 전투

 

원균과 칠천량 전투 참패

 

선조 3075, 100여쳑의 함선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한 조선수군은 부산 앞바다에 진출하여 항구를 막았다. 하지만 한산도 해전에서의 참패를 설욕하기 위해 4년 동안 준비를 해온 일본은 조선수군이 부산 앞바다에 진출하자 대마도 쪽에서 대기하던 1,000여척의 함대를 움직여, 조선수군을 칠천량에 몰아넣고, 다음날 새벽 조선함대를 총공격한다.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좁은 물길인 칠천량은 일본함선으로 가득 찼다 그들은 조선수군을 겹겹이 포위했다, 단병접전(短兵接戰)에는 세계 최강인 일본수군이 포위된 조선함선에 올라탔다면 그것으로 싸움은 끝난 것이다.

 

원균은 포위망을 뚫고 춘원포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려 도주하려했으나 결국 추적에 나선 이름 없는 일본군 병사의 손에 죽고 만다. 이 패전에서 배설이 판옥선 12척을 끌고 도망했을 뿐,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 장수들과 일만여 명의 수군이 몰살당하고, 조선 수군의 함선들이 사라졌다.

 

 

조선수군 명량애서 되살아나다.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명받아 감옥에서 풀려난 것은 선조 30, 정유년 41일 이었다. 이순신이 칠천량 패전소식 들은 것은 718, 권율 막하에서 백의종군 할 때이고, 그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라는 명을 받은 것은 83일이었다.

 

이순신은 83일부터 29일까지 거의 한달 동안 전라도에서 수군의 재건을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흩어진 군사들을 모으고. 군량을 확보한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판옥선 12척을 인수했다.

 

815일 이순신은 수군의 전력이 너무 약하니, 권율의 육군과 합류해 전쟁에 밈하라.”라는 명령을 받고, 아래와 같이 장계를 올린다.

 

이순신의 노력은 이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둔다. 이순신 장군이 돌라왔다는 소문이 삼남지방으로 급속히 퍼져나가자, 칠천량에서 살아남아 숨어 지내던 병사와 장교들이 모여들고, 전라도의 유력한 백성들이 찾아와 도와주었다.

 

914, 적선 200여척 가운데 55척이 어란포에 들어왔다는 보고가 올라온다. 이순신은 곧바로 진도 벽파진에서 바다를 건너, 전라우수영으로 진을 옮긴다. 우수영 앞은 전라도 맨 서쪽 끝, 명량해협이다. 이곳이 뚫리면 곧바로 서해로 진출할 수 있다. 바로 명량이 일본군의 한강 진출을 막는 최후의 방어선인 것이다..

 

이순신은 휘하 전 장병들에게, 아래와 같은 군령을 내리고, 916일 전 함대의 출동을 명한다,

 

 

전 함대라고 해봤자 모두 13척에 불과했다. 노를 저어 좁은 명량해협을 가로 막자, 자 멀리 적함이 보였다. 133척의 대 함대였다. 조수의 흐름이 조선수군 쪽으로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조선군과 일본군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러나 수로가 좁아 적이 한꺼번에 달려들 수는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던 순간, 이순신이 탄 배가 앞으로 치고 나갔다.

 

이윽고 이순신의 함선이 적을 향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지자총통, 현자총통의 포탄에 적선이 화염에 휩싸이고, 이을 본 병사들의 눈빛은 어느새 지난날 용맹한 조선수군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한동안 이순신의 함선만 적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순신의 뒤를 받치고 있던 열두 척의 전함은 여전히 두려움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채 앞으로 나지도 못하고 물러서지도 못하는 사이에 역류하는 조류는 그들을 뒤로 밀어내어 이순신이 탄 외로운 함선은 차츰 함대와 멀어지고, 이순신의 함선은 치쳐가고 있었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바로 이때 초요기(初療飢-대장의 신호기)가 오르고, 이를 본 중군장 김응함은 전진하라고 소리치고, 거제현령 안위도 목청을 다해 전속력으로 전진하라는 명을 내렸다. 안위의 함선이 제일 먼저 이순신의 배에 다가갔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해서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

 

이순신의 호령에 안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배는 힘을 다하여 적진 속으로 돌격해 갔다. 뒤이어 이순신의 호통을 받은 김응함의 배도 적선을 향해 돌진했다. 일본군은 세 척의 조선 함선을 둘러싸고 사방에서 총을 쏘았다. 그러자 조선함선은 적함을 그대로 들이 받았다 순식간에 적선 세척이 뒤집혔다

 

뒤쳤던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정응두의 배가 전투에 가담하고. 전투는 더욱 치열해 졌다. 바다에 떠다니는 적군의 시체 중에서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를 발견한 이순신은 그의 목을 베어 함선 돛대에 걸었다. 일본군은 충격에 휩싸였다. 겨우 다섯 척의 조선함선에 1백 척이 넘는 일본함대의 선봉이 여지없이 격파당하고 있었다.

 

이때 역류하던 조류가 바뀌었다. 그러자 열세 척의 조선함대가 일제히 빠르게 흐르는 울돌목의 조류를 타고 일본함대를 향해 돌진하자, 순식간에 일본 함선 서른한 척이 울돌목의 빠른 조류에 수장되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한 일본군은 달아나기 시작했다. 일본군도 조선군도 쉽게 믿기지 않는 조선군의 완전한 승리였다.

 

일본수군의 위축을 틈타 이순신은 수군의 재건에 온힘을 기울였다. 이듬해 2월경이 되자 조선 수군의 병력은 8천을 헤아렸고, 전선은 60척에 이르렀다.

이런 군세에 힘입어 이순신은 수군기지를 완도군의 고금도로 옮겼다. 칠천량 패전 후 반년 만에 대략 수군 전력의 절반을 회복한 것이다.

 

이순신 해전(펌)

 

조명연합군의 총공세

 

임진년에 명이 동원했던 군사는 4만이었다, 이번에는 압도적인 군사로 일본군을 완전히 제압하려고 남방군까지 동원하여 8만의 대군을 조손에 파병했다 군량고 병기도 충분했다, 그런데 일본은 이기던 싸움을 갑자기 포기하고 명군과 부딪쳐 보기도 전에 거의 다 점령했던 전라도, 충청도에서부터 빠르게 철수해 남쪽으로 내려가 버렸다.

 

하지만 명은 엄청난 군사력과 비용을 쓰고도 얻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방어하기 좋은 곳에 견고한 성을 쌓고 웅크리고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강 이남의 4주를 노리는 일본은 명을 지치게 만들어 스스로 철수하게 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 챈 명은 전쟁을 조속히 끝내려고 조명연합군을 총동원하여 동로군, 서로군, 중로군, 그리고 수로군을 편성하고, 이들이 동시에 일본군을 공격해서 섬멸시키는 사로병진책(四路竝進策)을 수립한다.

 

사로군은 선조 31818일 서울을 출발하여 남쪽으로 내려간다. 이 작전에 동원된 명군이 모두 92,100, 조선군, 2985, 11만 명이 넘는 대군이었지만, 동로군, 서로군, 중로군이 모두 왜군과의 싸움에 이기지못하고 철수하자, 결국 수로군도 철수한다. 이렇게 조명연합군의 총공세가 실패하자, 조선의 모든 전선이 다시 소강상태로 되돌아갔다

 

도요토미의 죽음

 

임진왜란을 기획하고, 조선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선조 3188일 오사카성에서 숨을 거두었다. 일본은 전쟁의 모든 책임을 죽은 도요토미에게 돌리고 무조건 철수하기로 한다.

 

비밀리에 철군을 준비하던 일본군이 명군에 공식적으로 철군을 통지한 것은 10월 말이었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조선은 명군의 움직임을 살피다 일본군이 명과 철군협상을 시작한 사실을 알게 된다.

 

명나라 육군은 싸우지 않고 왜교성을 넘겨받는 대신 일본군의 철군을 방임하기로 합의한다.

 

일본군의 철수예정일은 11월 중순이고, 이미 전 일본군 진영에서 철군준비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순신이 고니시의 철군계획을 알게 된 것은 118일이라고 한다. 도독 진린이 이순신에게, “순천 왜교성의 적들이 1110일쯤에 철군한다는 기별을 육지에서 통지해 왔다.”고 알렸다. 아울러 그는 이순신에게 철군협상 내용도 알려준다. 하지만 이순신은 저들끼리의 야합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결연히 고니시의 철군 길을 막아섰다.

 

고니시는 당황했다. 그는 부산의 일본군 지휘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진린에게 길을 열어달라며 뇌물공세를 퍼부었다. 고니시의 뇌물에 마음이 흔들린 진린은 이순신의 출병을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 이순신은 왜교성 앞에 있는 장도에 주둔하고, 고니시의 철군 길을 막았다. 고니시는 부산의 일본군 지휘부에 도움을 청하고, 지휘부는 500여척에 이르는 대규모의 구원함대를 편성하여 출항시킨다.

 

일본의 구원함대가 순천으로 올 것을 예상한 이순신은 장도에서 적을 기다리지 않고 순천으로 오는 일본함대를 관음포 앞바다에서 맞아 싸우기로 한다. 장도에서 관음포까지는 20Km가 넘는 거리다. 이순신은 60여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관음포로 은밀히 나아갔다. 진린의 명 수군 함선 300척은 이순신 함대의 좌측 죽도에 포진했다.

 

선조 311119, 캄캄한 이은 새벽에 멀리서 노 젓는 소리가 파도소리에 섞여 들려 왔다, 이윽고 적선이 어둠과 짙은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순신 함대의 포들이 적함을 향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선두의 일본 함선에서 불길이 솟았다. 뒤이어 명나라 함선에서도 포가 작열했다. 짙은 안개와 어둠속에서 기습을 당한 일본군도 전력을 다해 대응했다.

 

차츰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관음포 바다는 피아 1첱 척에 이르는 전함들이 동시에 쏟아내는 포와 불화살, 비명과 연기로 가득 찼다. 이순신의 전함이 앞장서서 그 가운데를 돌파하고 있었다. 조선함대의 대담한 공격에 일본 함대는 흩어지고 부서지고 가라앉았다.

 

드디어 완강하게 저항하던 일본함대가 왔던 길을 되돌아 노량해협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도주하는 일본함대를 놓아주지 않았다. 조선함대가 선봉에 서고, 명 함대가 뒤를 받치며 바짝 추격해 갔다. 뒷덜미를 잡힌 일본군은 결사적으로 저항해왔다. 이순신의 대장선이 제일 선봉에 서서 전 함대에게 더욱 분발하라는 북소리를 울렸다.

노량해전(펌)

 

바로 그 순간, 일본군의 조총이 불을 뿜었다. 달아나던 적군이 쏜 총탄이 이순신의 가슴에 박혔다.

 

전투가 급하다,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은 조선수군의 승리로 끝났고, 격전 중에 살아남은 구원함대 대장은 남은 배를 이끌고 도주했고, 왜교성의 고니시는 해전이 한창일 때 숨겨두었던 500여척의 전선을 끌고 장도와 유도를 지나 전투지역을 우회하여 곧장 남하하여, 부산으로 탈주하는데 성공했다.

 

이순신은 노량진 최후의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향년 54세였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다 호남 일대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슬피 울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런데 선조는 다만 알았다.”라고만 했다.

 

모든 책임을 유성룡에게 씌우다.

 

이순신의 노량해전을 끝으로 임진년에 시작된 전쟁은 7년 만에 무두 종결되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뒤이어 닥칠 전쟁의 후폭풍을 예상하고 모두들 몸을 사렸다. 무엇보다 전쟁을 불러들이고 막아내지 못한 책임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이순신이 노량에서 전사한 날, 유성룡이 파직되었다. 이제 전쟁의 모든 책임은 유성룡에게 전가되었다. 당쟁도 그의 책임이었고, 조선이 자강지책(自强之策)을 세우지 않은 것도, 화의를 주장하여 목전의 안일만을 추구한 것도 모두 그의 죄였다

유성룡 초상(펌)

 

선조는 전쟁이 끝나면 물러나겠다고 전쟁 중에 아홉 번이나 약속을 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끝나자 태도를 바꾸었다. 신하들도 임금이 물러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임금이 물러나면 그들도 함께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성룡을 몰아낸 후, 조정에서는 아무도 더 이상 전쟁에 대한 책임을 거론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지 3년이 다 되어 가는 때, 비로소 조선조정은 전쟁을 승리로 규정하고 승리한 전쟁에 뒤따르는 공신책봉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때 선조는 자신의 속내를 밝혀 공신책록(功臣冊錄)의 기본전제를 제시한다.

그림 4-5

 

선조의 공신책록 기본에 따라 공신책록 대상자가 전쟁에서 직접 공을 세운 사람보다 전쟁 중에 임금의 측근에서 임금을 모신 사람 위주로 압축되고, 전쟁 중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목숨을 걸고 적과 싸운 장수나 의병이 아니라, 명나라 군대를 불러 온 사람, 바로 선조 자신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다 비웃을 일이었지만 공신책록은 이런 방향으로 흘러 임란공신이 확정되었다.

 

그 중 사람들은 원균이 이순신, 권율과 나란히 정왜 공신 1등에 책록 되는 것에 의문을 표했으나, 선조는 굳이 원균을 1등 공신에 책록하라고 고집했다. 아마도 원균을 1등 공신에 밀어올림으로써 이순신의 공을 깎아내리려는 심보가 작용했던 모양이다. 그뿐인가? 선조자신은 정륜입극 성덕홍령 기성대의 격천희운(正倫立極性德洪烈聲大義格天熙運) 16자 존호를 받는다. “주자학적 가치를 높이 세우고 지극한 마음으로 중국을 섬겨 천하대의를 실천해 나라를 태평하게 만든 임금.”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에필로그

 

임진왜란은 일찍이 서구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이 부강해지면서, 도요토미가 전국을 통일한 후, 조선을 앞세워 쇠약해진 명나라 공격하여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잡아보겠다는 망상에서 시작된 전쟁이었다.

 

이처럼 한 국가의 운명은 자국 내의 문제로 결정되기보다는 주변국들의 정세 변화에 따라 결정되기 마련이다. 임진왜란 후 300년이 지나자, 일본은 명치유신으로 세계열강들과 겨눌 수 있을 만큼 국력이 강해져, 청일전쟁, 노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을 합병했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일본은 임진왜란 때처럼, 주변정세,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만주사변 후, 전선이 확대되면서, 급기야 진주만 폭격으로 까지 치닫다가 결국 무릎을 꿇는 바람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지만, 김일성을 앞세운 소련의 침공으로 6/25 사변이라는 비극을 맞는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 같은 리더가 없고, 임진왜란 때의 선조 같은 사람이 나라를 이끌었다면 대한민국은 아마도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저자는 아래와 같이 이 책을 끝마치며 우리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2021, 5. 8.)

Posted by Urim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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