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5년 명나라 군대 모습(펌)

 

궁지에 몰린 임금이 세자와 권력을 나누다.

 

파천(播遷)이 결정되자 선조는 피란을 재촉한다. 파천이 결정된 다음날(429) 어두운 밤,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속에 임금이 궁궐을 떠났다. 뒤이어 백성들이 대궐로 뛰어들었다. 약탈과 파괴가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백성들은 궁궐에 불까지 질렀다.

아수라장

 

어가는 다음날 저녁 무렵에 임진강에 도착한다. 줄기차게 내린 비로 강물이 불어나 넘실거리는데 쓸 수 있는 배는 5~6척에 불과했다. 이 배로 강을 건넌 선조는 배를 가라앉히라고 명하고, 아울러 가까운 곳의 인가도 철거하라고 지시한다, 임금의 명에 따라 근처의 집과 정자에 불길이 올랐다. 강을 건너지 못한 절반이 넘는 신하들은, 빗속에서도 거세게 타오는 불길을 뒤로하고, 북쪽으로 도망하는 어가를 바라보며 허탈과 분노에 휩싸인다.

 

어가가 동파(파주)에 닿은 것은 깊은 밤 심경(11~1)이었다.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질척거리는 길을 걸었으나, 임금만 겨우 허기를 면했을 뿐, 모두가 끼니를 굶었다. 동파 역에서 밤을 보낸 행차는 아침이 되어도 출발할 수가 없었다, 말을 모는 사람과 교꾼 노릇을 하던 병정, 인근 백성들까지 모두 도망가 버렸기 때문이다. 경기감사가 병사들을 꾸짖어 겨우 행차가 출발을 했지만 군졸들이 모두 도망가서 호위할 사람도 없었으나, 때마침 황해감사 조인득(趙仁得)의 군사가 어가를 호위하려고 달려와, 431, 어가는 겨우 개성부에 도착했다,

 

일본군이 서울에 당도한 것은 52, 고니시부대가 먼저 도착하고, 그 이튿날 가토부대가 도착했다. 서울이 함락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임금은 53, 날이 어두워질 무렵 개성을 떠났다. 신하들이 위의(威儀)를 갖추어 떠나자고 했지만, 겁에 질린 임금은 황급히 떠나자고 재촉했다. 백성들은 이런 임금을 비웃으며 욕했다. 어가는 58일 평양에 도착했다.

 

뒤늦게 평양에 돌아온 이덕형(李德馨)이 광범위하게 번져가는 민심의 이반을 걱정했다. 그가 말한 별다른 조치란 전란의 책임을 지고 임금이 물러나야한다는 말이었다.

이덕형의 민심 이반 걱정

 

일본군이 527일 임진강를 건넜다는 소식이 평양으로 전해진 것은 61일이었다. 평양성을 사수하여야한다는 대신들의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68, 임금의 행차가 평양을 떠나려는데, 아전과 백성들이 원망하고 격분해서 폭동을 일으켜, 창과 칼이 마구 휘둘러지고, 종묘 위패가 땅에 팽개쳐졌다. 백성들의 저항으로 임금의 행차가 며칠이나 떠나지 못하다가, 11일에야 겨우 평양을 떠나 영변으로 향했다. 이튿날 안주에 이르니 백성들은 모두 임금을 피해버리고, 호종하던 관원들도 도망가, 행차를 따르는 사람은 10여명이 되지 않아, 임금은 밥을 굶었다.

 

일본군의 막대한 군사력에 조선군이 연전연패하자, 선조는 상황이 급박하면 요동으로 피신하여, 명나라의 원군을 요청해야한다고 주장했으나, 대다수의 신하들은 선조가 조선 땅을 떠난다는 것은 조선을 버리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명나라에 청병하는 것도 소극적이었다. 그들은 일본군을 막는 주체는 조선군이 되어야하며, 명군은 어디까지나 조선군을 원조하는 수준이어야한다고 믿었다

 

평양을 떠난 대가(大駕)가 영변에 도착했을 때 선조와 신하들은 임금이 요동으로 들어가야 하느냐 아니면 조선 땅에 남아 항전을 해야 하느냐를 두고 또 다시 논쟁을 벌인다.

 

대부분의 신하들은 임금이 의주로 가지 말고, 함경도나 평안북도 산골짜기로 들어가서 일본군과 항전을 계속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선조는 계속 중국으로 들어가서 명나라의 힘을 빌리자고 고집했다.

선조의 몽진도(펌)

 

이런 상황에서 비변사 당상 이성중 등이 국왕의 요동 행을 전제로, 세자가 조선에 남아 대 일본항전을 이끌자는 절충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재야에서는 왕위를 아예 세자에게 선위(禪位)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공개적으로 선조를 압박했다

세자에게 선위할 것를 청하는 상소

 

선조는 고심 끝에 타협안을 내 놓는다. 바로 본 조정 외에 별도로 임시조정을 두어, 세자에게 임시로 나랏일을 대신하는 지위를 부여한 후 조선에 남고, 선조 자신은 요동으로 피란하는 것으로 신하들과 타협한 것이다.

 

615, 임금의 행차가 박천에 도착한 날, 저녁에 평양이 함락됐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세자는 종묘위패를 모시고 임금과 헤어져 산군(山郡)으로 향하고, 임금은 이경(二更-9~11)에 의주로 급히 떠날 것을 재촉하자, 온 고을이 소동하여, 저녁밥도 굶고, 길을 떠났으나, 비는 내리고 길은 질었다. 이때 조정신하로 행차를 따른 자는 겨우 10여 명에 불과했으나, 선조는 명나라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먼저 요동으로 건너가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다.

 

일본의 좌절- 개전 3개월 만에 찾아온 불안

 

일본군이 서울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고, 도요토미는 63, 명나라 정벌계획이 담긴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하지만 그 후 도요토미의 군사, 구로다 요시다카 등이 조선으로 건너와 전선을 직접 살피고 도요토미에게 현황을 보고하자, 도요토미는 명나라 정벌계획을 변경한다. 임진년에는 조선평정을 완전히 이룩하고, 명나라 정벌문제는 자신이 도해(渡海)한 후 이듬해 봄에 결행한다고 715, 장수들에게 밝힌 것이다.

 

이처럼 명나라 정벌계획을 바꾼 것은, 조선 왕의 피란으로 조선의 인력과 물자를 동원할 수 없게 되었고, 전선 전역에서 일어난 조선 의병들의 활약과 수군의 등장으로 일본군의 일방적인 진격에 제동이 걸렸기 때문이다.

 

의병 봉기와 3대첩(펌)

전쟁은 이제 장기전으로 전환되었다. 고니시가 더 이상 북진하지 않고 평양성만 확보하고 있으면서, 조선 점령정책이 안정될 때, 나고야에 대기하고 있는 일본군 예비병력 10만이 서해안을 돌아서 평양성에 도착한다는 계획이다. 고니시는 평양성에서 선조에게 조롱하는 글을 보냈다

 

고니시의 선조 조롱

 

그랬다. 고니시의 말대로 일본의 예비병력 10만이 서해안을 돌아 평양에 들어오는 순간, 일본의 대명 전쟁준비는 완성되는 것이었다. 이른바 수륙병진(水陸竝進) 전략이었다. 그들의 행보가 신중해졌다. 전격전의 전략은 이미 틀어져버렸다.

 

일본군을 더욱 당황하게 만든 것은 예상보다 빠른 명나라의 참전이었다. 조승훈이 이끄는 요동병 3천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들어온 것은, 전쟁 발발 두 달 만인 선조 256월이었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에 정식으로 참전을 요청하지 않았으나, 명나라는 전쟁 상황과 정보 수집을 목적으로 서둘러 파병한 것이었다,

 

그런데 1592717, 조승훈이 이끄는 명군이 평양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하자 명은 충격에 휩싸였다. 명은 일본군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과, 그들을 제압하려면 요동병력만으로는 어렵고, 남방을 포함한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국경 밖 자체 방어선으로 평양을 설정 했던 명은 평양이 일본 군 수중에 들어가자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다.

 

하지만 명은 거듭되는 조선의 다급한 구원 요청에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일본을 막아야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었다. 문제는 조선에서 일본군을 막느냐, 아니면 중국에서 일본을 막느냐 하는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완전히 장악하고 나면, 나고야에 대기 중인 10만 예비 병력이 추가로 투입되고, 조선에서 징집한 10~20만 병력을 선봉에 세워, 50~60만 군세를 만든 후, 만주를 장악하고, 바다로 산동, 천진을 위협하면서 명에 승부를 걸어온다면..... 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이었다. 하여 명은 조선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하는 것이 확실한 자기방어 대책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른바 공세적 방어책이라는 것인데, 그 배경에는 험준한 조선반도의 지형이. 큰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한다. 명은 결국 자국의 안전을 위해 조선의 구원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명은 10만 대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한 준비 하는 동안, 조선이 지레 무너질까를 걱정하여 명 황제는 서둘러 칙서를 내린다. 이울러 명은 파병에 필요한 시간을 벌고자 심유경을 보내, 일본과 협상을 벌인다. 의병들의 활약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바닷길은 이순신에게 막혀, 수륙병진 정책이 물거품이 돼 버린 일본도 시간이 필요하기는 마찬가지라, 명과 일본은 1020일부터 50일간의 제1차 휴전협정에 합의한다.

명나라 조선의 충절 요구

 

일본군의 패퇴

 

명나라 이여송 휘하의 4~5만의 대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넌 것은 임진년 1222일이었다. 명군이 주도한 평양성 공방전은 선조 26(1593) 시작되었다. 조선은 김명원 도원수 휘하의 8천 명의 군사와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이끄는 승군 2천 명이 합세했다. 이에 맞선 고니시군은 1만에서 15천 정도였다.

 

이여송은 기병 100여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 아래로 나아가 모든 장수들을 직접 지휘했다. 명군은 대포를 앞세워 공격을 개시하여 성벽을 파괴하고, 기선을 제압한다.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 내성으로 공격해 들어가자, 일본군은 조총으로 집중사격을 가해 명나라군사가 많이 죽었다. 피해가 늘어가자 이여송능 군사를 거두고, 일본군에 사람을 보내 퇴각로를 열러주겠다고 제안하자, 그날 밤, 고니시의 일본군은 성벽을 넘어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도주했다. 부상자들을 모두 평양에 버리고 간 필사의 탈주였다.

평양성 탈환

 

평양성 전투의 승리는 전쟁의 흐름을 단숨에 바꾸어 버렸다. 전세는 역전되어 일본군의 패주가 시작된 것이다. 일본군은 서울 이북에 전개한 모든 병역을 서울로 집결시켜 튼튼한 방위선을 구축하지 못하면 조선에 진출한 일본군이 각개격파 되어, 전멸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싸인다.

 

하지만 이여송의 명군은 도망하는 일본군을 급박하게 추격하지 않았다. 조선조정은 승세를 타고 일본군을 추격하여 섬멸하자고 했으나, 명군은 오직 명나라의 안전만 생각할 따름이었다. 명군은 평양성을 탈환한 지 8일이 지나서야 뒤늦게 일본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한편 일본은 추격하는 명군에 반격하기 위해, 고양 남쪽 여석 현에 4만의 대군을 숨기고 명군을 기다렸다. 하지만 일본군의 사력을 다한 노림수를 눈치 채지 못하고, 급히 추격하던 이여송의 군사 2만과 일본군 4만이 벽재관에서 맞붙어, 명군이 대패하자, 이여송은 129일 개성으로 철군했다. 이후 명군은 전쟁을 정치로 해결하려고 한다.

 

 

 

(2021. 4. 17.)

Posted by Urim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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