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李大鎔, 1925년 ~ )은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외교관이다.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제7기생으로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퇴역한 후, 베트남 대사관의 공사로 근무하던 1975년 사이공이 함락될 때, 국군 장병과 건설인력의 안전한 철수 귀국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서 애쓰다가 서병호 영사, 안희완 영사와 함께 공산군에 붙들려 사이공의 치화형무소에 투옥된 후, 갖은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북한행을 거부하며 5년간 복역하다가 석방되어 귀국하였다.
다음은 이대용 회장의 증언을 옮긴 것이다.
“요즘 자꾸 사이공 함락장면이 꿈에 나타난다.”
우리나라와 월남이 겪었던 고난의 역사, 그리고 처했던 역경은 너무나 닮은꼴이다. 그래서 평소 나는 한국과 월남을 일란성 쌍둥이라고 표현하곤 했다
전쟁에 지친 미국이 월맹과 휴전을 위한 비밀협상에 돌입한 것은 1968년 5월 10일이다. 그 무렵 미국은 1968년에 495억 달러, 1969년에 508억 달러를 퍼부었고, 주월 미군병력도 53만 6,000명에 이를 정도로 전쟁의 절정을 이루던 시기다.
미국과 월맹이 파리에서 비밀평화회담을 진행 중인 사실이 알려지면서, 월남 내부에서는 국론(國論)이 두 갈래로 갈렸다. 여당은 강력한 반공정책을 주장하며 평화회담 참여거부를 주장한 반면, 야당은 앞 다투어 포용정책을 들고 나와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회담 참여를 지지했다.
고민에 빠진 월남정부는 어쩔 수 없이 회담 테이블에 나가야 했고,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 5년여 협상 끝에 베트남전을 종식하는 역사적인 휴전회담이 열렸다.
이 휴전의 담보를 위해 키신저는 월맹에 40억 달러(20억 달러는 미국 직접원조, 20억 달러는 국제은행(IBRD) 차관)의 원조를 제공, 이것으로 피폐한 월맹의 경제 재건을 돕기로 하고, 교전 당사국인 미국, 월남, 월맹, 베트콩(베트남 임시혁명정부) 등이 서명했다.
美 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는 보다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인, 캐나다,·이란, 헝가리,·폴란드 4개국을 서명에 참여시켰다. 이리하여 4개국, 250명으로 구성된 휴전감시 위원단이 하노이와 사이공, 그리고 휴전선을 감시하게 되었다.
미국은 월남과 방위조약을 체결하고, 미군은 철수하지만 월맹이나 베트콩이 휴전협정을 파기(破棄)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고 월남 지상군을 지원키로 굳게 약속했다. 더불어 주월 미군이 철수하면서 그 동안 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각종 최신 무기까지도 모두 월남에 양도하여, 그 무렵 월남 공군력은 전 세계에서 4위를 기록했다.
이처럼 철저한 제도와 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에, 키신저는 주월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휴전체제가 최소한 10년은 갈 것이라고 낙관했고, 수년간 미국의 골칫덩어리였던 베트남전이 휴전을 맞게 되면서 전 세계에는 평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그러나 결국 이 생각은 착각이었다.
당시 뤟맹의 전략전술은 지금도 북한이 견지하고 있는 대남전략과 단 한 치의 차이도 없다. 총 인구의 90.5%는 월남이 지배하고 있었고, 나머지 중 5%는 낮에는 월남, 밤에는 공산측이 지배하는 경합(競合)지역, 그리고 4.5%는 공산 측 지배하에 있었다.
휴전 무렵 월맹은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매년 80만∼100만 톤의 식량부족, 물자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고, 휴전협정 이전부터 숱한 공산당 프락치들을 월남 곳곳에 침투시켜 암약하게 했다.
'호치민'이 1930년 창당한 베트남 공산당원 9,500명과 민족해방전선의 '웬후토'가 1962년 1월에 창당한 인민혁명당에서 양성하여 침투시킨 4만여 명의 비밀조직원들이 바로 그들이다. 월남 전체 인구의 0.5% 정도에 이르는 이들 공산당 프락치들이 월남 사회의 저층(底層)에서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1969년 6월 6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베트남 임시혁명정부로 개편될 당시 월남정부의 각 부처와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회의내용이 단 하루후면 상세하게 보고될 정도로 티우 정권의 핵심에 공산 프락치가 침투해 있었다고 한다.
1967년 대선(大選)에서 차점으로 낙선한 쭝딘쥬와, 당시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를 위시한 많은 정치인· 관료들이 모두 공산 프락치였음이 알려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었다.
반면 월남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벌어질 때마다 대공(對共)전문가들이 쫓겨나는 바람에, 월남 대공기관과 정보기관은 형해(形骸)만 남아버렸다. 한 나라를 망하도록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보다도 그 나라의 정보기관부터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정보기관과 대공기관이 정권의 부침(浮沈)에 따라 평지풍파를 겪으면서, 결국에는 간첩하나 못 잡는 이빨 빠진 고양이로 전락한 사실을 나는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월남 패망은, 외적(外敵)이 아니라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무너진 것이다. 오랜 전쟁 후에 온 휴전체제에서 결국 국방을 소홀히 하고, 내부적으로 극심한 정쟁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당시 월남 정규군은 58만 명이었는데, 이 중 10만 명이 뇌물을 주고 비공식 장기휴가를 받아 대학에 다니거나 취업하고 있었다. 이처럼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는 군인들을 가리켜 당시 월남에서는「유령 군인」,「꽃 군인」이라 불렀다.
지도층의 병역기피가 문제였다. 티우 대통령의 사위가 군에 입대했는데, 그는 이름만 군적(軍籍)에 둔 채 외국 유학을 떠나버렸다. 다른 고관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도층 아들들은 입대 영장이 나오면 일단 입대한 다음 뇌물을 써서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일선의 군인들은 「저따위 썩은 정권과 나라를 위해 내가 목숨을 바쳐야 하는가?」하며 전의(戰意)를 상실했고. 화해와 평화의 분위기가 퍼져나가면서 공산군에 대한 경계심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월등히 높은 경제력과 막강한 화력을 가졌던 월남군대가, 식량부족으로 고민하던 월맹군에게 허수아비처럼 붕괴한 가장 큰 원인이다.
좌익이 시민·종교단체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이 무렵 월남에서는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불교계의 뚝드리꽝 스님 등이 모여서 「구국(救國)평화 회복 및 반부패 운동 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 산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일종의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부패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문제는 이 순수한 반부패 운동조직에 공산당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거대한 반정부, 반체제 세력으로 변질시켜 버렸다는 점이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100여 개의 애국단체, 통일운동단체들이 수십 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월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목사, 승려, 학생 그리고 좌익인사들이 한데 뒤섞여 반전운동, 인도주의 운동, 순화운동 등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운동단체들을 총동원하여 티우 정권 타도를 외치고 반정부시위를 벌였다.
1975년의 월남은 이들 100여 좌익 단체의 선전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나는 월맹군의 움직임이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고, 티우 대통령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그러나 티우 대통령은 허허 웃으면「지금 우리 정규군 병력이 58만입니다. 또 미국과의 방위조약이 시퍼렇게 살아 있고, 월맹도 북폭으로 거덜이 난 상태인데 저들이 침략할 힘이 남아 있겠습니까?」며 완곡히 거절했다.
티우 대통령은 확고한 반공 지도자였지만 평화에 눈이 멀어 유비무환을 잊었던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월맹은 경제가 허약하고 식량과 물자부족이 심화돼 조만간 붕괴할 것이라고 우습게보았던 것이다.
작금의 우리나라 실상이 패망 직전의 월남상황과 너무나도 흡사하여 요즈음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오늘날 어떤 정당에서 공천을 못 받았다 해서 뛰쳐나가 자신이 몸담았던 당의 지도자를 공격하는 모습은 25년 전 내가 월남에서 체험했던 정쟁과 어찌 그리도 닮은꼴인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익 인사들은 다음 날이면 시체로 발견됐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언론과 지식인들이 국가안보와 반공, 국가 정통성 수호를 외치지만, 말과 글과 구호로 무장한 좌파 인사들이 무차별 공세를 펼침으로써「말없는 다수」들이 침묵하는 상황도 25년 전 월남과 다름이 없다.
월남군은 곳곳에서 패퇴하며 밀리기 시작했다. 월맹군에게 허를 찔린 월남군은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한 채 후퇴만 거듭하다가 결국 50%의 병력이 붕괴, 해산됐다.
3월 26일 다낭이 함락됐고,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달리듯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유령 군인」과「꽃 군인」들은 가족과 함께 배와 비행기로 월남을 탈출하고 있었다.
월맹군이 남침을 시작하고 한 달이 지난 이때까지도 미국은 대월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않고 있었다. 4월 29일 월맹 공산군 14개 사단이 사이공을 포위했다. 사이공에는 패잔병들만 남아 있었다. 레웬비 장군은 조국의 패망을 비통해 하면서 권총으로 자결, 나라와 운명을 함께 했다.
4월 30일 정오, 월맹 공산군 제2군단은 사이공 시내로 진격하여 탱크부대가 월남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위치한 독립궁을 점령했다. 월남 대통령 정반민은 포로가 됐고, 이로써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월맹을 압도한다고 자랑하던 월남은 월맹군에 의해 너무도 허무하게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미국은 사이공 함락 직전, 월남군 장성과 그 가족을 헬기에 실어 남지나 해상의 항공모함으로 철수시킨 후 미국으로 망명시켰다. 하지만 월남군 제2군단장 만푸 소장, 특별부대사령관 반토 소장, 제4군단장 웬꼬아 남 중장, 제5사단장 레원비 준장, 제7사단장 웬반하이 준장, 등 5명은 무너지는 군대를 보면서 조국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심하고 망명 거부, 모두 권총 자결했다.
「거지군대에 패망한 월남사이공 함락 후 월남의 군인·경찰은 무장 해제되고 수용소에 보내졌다. 그리고 월남의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들도 모두 체포돼「인간개조 학습소」에 수감됐다.
하층(下層)의 월남 국민들은 소형 선박을 이용해 목숨 건 탈출에 나섰다. 보트 피플의 숫자는 약 106만 명. 이 중 바다에 빠져죽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 숫자가 11만 명이었고, 살아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 95만 명으로 집계됐다.
나는 이 참혹한 패망의 역사를 그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강대국과 맺은 방위공약이나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정은 절대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나는 티우 대통령이 미국에게 구원을 호소하는 모습을 내 두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무질서와 공산 프락치들로 인한 국론분열에 빠진 월남에 고개를 가로 저었던 미국은 처음부터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체제가 안정되었다거나 경제력이 우수하다는 말은 조국에 충성하는 국민의식과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전부 잠꼬대에 불과하다. 외교관이었던 내가 체포되기 전 사이공 시내에서 직접 목격한 놀라운 사실은, 월맹 군인들은 소금만 가지고 하루 두 끼 식사를 겨우 할 정도였고, 속옷은 구경조차 힘들었다는 점이다. 월맹군은 전차 부대를 제외하고는 군화를 신은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타이어를 잘라 끈으로 묶은 채 질질 끌고 다니며 월남군과 전투를 했던 것이다. 이런 군대가 최신무기로 완전무장을 한 월남 군대를 붕괴시켰다. 부패한 군대, 분열된 사회는 최신 무기를 고철로 만든다.
파리 휴전협정 체결 과정에서 외국의 몇 몇 언론들은 「키신저가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해 휴전협정을 너무 서두르고 있다」며 걱정스럽게 지적했었다. 그러나 이런 충고를 무시하고, 키신저가 수상한 노벨평화상은 결국 자유월남의 시체 위에서 얻은 비극의 노벨상이 되고 말았다.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 중공과 소련까지 동원해가며 맺었던 「방위조약」은 단순한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월남의 패망과 아비규환(阿鼻叫喚)에 빠진 월남 국민의 절규에 대해 침묵으로써 대답했다.
(2017. 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