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클레이은행(펌)
며칠 뒤 버클레이즈 은행의 해외 담당 부총재가 점심을 같이 하자는 연락이 왔어요. 점심 약속 하루 전 정주영은 호텔에서 초조와 불안 속에서 시간을 보내느니. 만사 제쳐놓고 관광이나 하는 게 나을 것 같았지요. 그는 현대건설 수행원들과 셰익스피어 생가와 옥스퍼드대를 둘러보고 낙조 무렵에는 윈저궁을 보았어요.
이튿날 정주영은 우아한 영국 은행의 중역 식당으로 안내되었지요. 자리에 앉자마자 버클레이즈 은행의 해외담당 부총재가 물었어요.
“정 회장의 전공은 경영학입니까? 공학입니까? ”
소학교만을 졸업한 정주영은 짧은 순간 아찔했지요. 그러나 태연하게 되물었어요.
“아 ~ 제 전공이오? 그 이전에 우리가 당신네 은행에 제출한 사업계획서는 보셨습니까?”
“아! 네 봤습니다.!”
정주영은 순간적으로 전날 관광하다가 옥스퍼드대 같을 때 졸업식 광경을 본 생각이 났어요.
오스포드대학(펌)
“어제 내가 그 사업계획서를 가지고 옥스퍼드대에 갔더니 한번 척 들쳐보고는 바로 그 자리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주더군요.”
하면서 태연하게 농담을 했어요. 정주영은 구질구질하게 자신이 학력은 짧지만 사업경험은 누구보다 많다고 말하지 않았지요. 오히려 그의 큰 배포를 보여주는 유머를 내던졌어요. 그러자 부총재가 껄껄 웃으면서 말했지요.
“옥스퍼드대 경영학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도 그런 사업계획서는 못 만들겁니다. 당신은 그들보다 더 훌륭하군요. 당신의 전공은 유머이시군요? 우리 은행은 당신의 유머와 함께 당신의 사업계획서를 수출보증국으로 보낼 터이니 행운을 빌겠소.”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정주영의 유머 한마디가 그 어려운 차관을 이끌어 낸 것이지요.
부총재가 정주영을 만나자고 한 건 자신들이 빌려줄 돈으로 조선소를 만들려는 CEO의 됨됨이를 보기 위해서였지요. 부총재는 그런 식의 만만한 자신감을 갖고 있는 CEO라면 대출을 해 주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최종적인 확인을 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사실 정주영이 은행 쪽으로부터 오케이 사인을 받은 건 사전에 치밀한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라 하네요. 실제로 현대건설은 치밀한 사업계획서를 만들었고, 그 치밀함을 인정한 은행이 대출을 해주기로 결정한 것이지요.
은행 쪽은 사전에 현대가 건설한 화력 발전소 비료 공장 시멘트 공장을 치밀하게 조사했던 거지요. 그러나 최종적인 확신은 정주영의 배포가 한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두 번째 관문도 통과 되었어요.
그러나 아직도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가장 어렵고 힘든 관문이었지요. 영국은행이 외국에 차관을 주려면 영국 수출신용보증국(ECGD)의 보증을 받아야 했어요.
그런데 수출신용보증국 총재는 배를 살 사람의 계약서를 갖고 와야 승인해 줄 수 있다고 했지요.
“만약 내가 배를 산다고 가정했을 때 작은 배도 아니고, 4~5천만 달러짜리 배를 세계 유수의 조선소들을 다 제치고 선박 건조 경험도 전혀 없고. 또 조선소도 없는 당신에게 배를 주문하지는 않을 거요. 설사 당신네가 배를 만들 수 있다 해도 사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원리금을 갚을 수 있겠소?"
"입장을 바꾸어 당신이 나라면 배를 주문할 사람이 없는데 보증을 해주겠소? 그러니까 배를 살 사람이 있다는 확실한 증명을 내놓지 않는 이상 나는 이 차관을 승인할 수 없소 ”
정말 난감했지만 정확한 지적이었어요.
당시 우리나라는 너무도 가난한 나라였지요. 그런 가난한 나라에서 배를 만든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몰라요. 배를 만든다고 해도 그 배를 믿고 사갈 사람이 없었던 거지요.
정주영은 다시 울산 미포만의 황량한 바닷가의 사진을 꺼내 보았어요. 그러면서 자신처럼 정신 나간 사람을 찾아야 했지요.
'내가 누구냐? 천하의 정주영 아니냐? 여기서 무너질 내가 아니지.'
그날부터 마음을 다잡아먹고 존재하지도 않는 조선소에서 만들 배를 사줄 선주를 찾아 나섰던 거지요.
허허 벌판 모래사장 사진 한 장을 내밀며 당신이 내 배를 사주겠다고 하면 내가 영국에서 돈을 빌려 이 백사장에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들어주겠소. 미친놈 취급당하기 딱 좋은 말이었지요. 그런데 한번 만나고 두번 만나고 세번 만나니까 그런 정신 나간 사람이 있었어요.
그는 다름 아닌 선박 왕 오나시스의 처남이었던 그리스의 리바노스였지요. 리바노스가 정주영의 배포를 믿고 미포만 백사장 사진만 보고 계약을 했어요. 선박에는 세계적인 리바노스지만 정주영의 사람 됨됨이에 밀려 파격적으로 정주영과 계약을 맺었어요.
리바노스와 계약(펌)
하지만 정주영 역시 그에게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 했지요.
“틀림없이 좋은 배를 만들어 주겠다. 배.값을 싸게 해주겠다. 만약 약속을 못 지키면 계약금에 이자를 얹어주겠다. 계약금은 조금만 받겠다. 우리가 배를 만드는 진척상황을 보고 조금씩 배 값을 내라. 우리가 만든 배에 하자가 있으면 인수를 안해도 좋고 원금은 몽땅 되돌려주겠다. ”
정주영은 리바노스가 보낸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스위스에 있는 그의 별장에 가서 유조선 2척을 주문받았지요. 이렇게 해서 마지막 관문을 넘어섰다 하네요.
정말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신화적인 이야기지요. 그 뒤부터 정주영은 부하직원이 어렵다고 하면, "해보기나 했어?" 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냈다 하네요.
정주영은 귀국하여 곧바로 박정희 대통령께 보고를 드렸어요.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대문 앞까지 달려 나와 그를 맞았지요. 그때 지도를 놓고 볼펜으로 그리며 본인의 구상을 설명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빙그레 웃으며 비서들에게 정 회장이 볼펜으로 그리는 대로 공장을 짓게 해주고 정부에서 지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하라고 지시를 했다 하네요. 훗날 박대통령은 울산현장에 자주 들러 막걸리를 같이 나누며 정주영을 격려했다 하지요.
대통령의 신임 - 1964년 단양시멘트공장 준공, "임자는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사욕이 없어."(펌)
하지만 그건 준비 작업에 불과 했어요. 앞으로 배를 만드는 조선소를 짓고 그 조선소에서 다시 배를 만들어야 했지요. 그러나 정주영은 이때 그의 특기인 역발상 창의력을 발휘했어요.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조선소와 배를 동시에 만들기로 한 것이지요.
“ 조선소는 조선소이고 선박건조는 선박건조다 반드시 다 지어진 조선소에서 선박을 만들어야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 것이냐? ”
그러면서 정주영은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를 병행해서 진행시켰어요. 제일먼저 스웨덴에서 배 만드는 설계사를 데려왔지요. 배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 배 만드는 공장도 없으면서, 모래사장의 모래를 포크레인으로 퍼내고 웅덩이를 파놓고. 거기에 올라오는 물을 펌프로 퍼내 가면서 그 웅덩이 속에서 최초의 배를 만들었어요.
공장도 없이, 독크도 없이, 모래를 퍼내 놓고 그 속에서 리바노스가 주문한 배 한척을 만들면서 동시에 방파제를 쌓고, 바다를 준설하고 안벽을 만들고,
도크를 파고, 14만평의 공장을 지었지요.
거의 모든 직원들이 새벽 4시면 일어나 여기저기 고인 웅덩이 물에 대충 얼굴을 씻고 일터로 나가 밤늦게까지 일하고 숙소에 돌아와 구두끈도 못 푼 채 잠을 자며 배를 만들었어요.
정주영도 거의 울산에서 살다시피 했지요. 어쩌다 서울에 오면 새벽 4시에 어김없이 서울에서 울산으로 내려갔어요. 이른 새벽 남대문 근처를 지날 때면 부부가 그날 팔 물건을 리어카에 싣고 남편은 앞에서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밀며 길을 지나는 장사꾼들을 보곤 했지요.
그럴 때마다 정주영은 자신도 모르게 목젖이 뜨거워 졌어요.저렇게 새벽부터 열심히 일을 해야만 생계를 꾸려 갈 수 있고, 자식을 키울 수 있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임에 너무도 가슴이 아팠지요.
“그래!! 모든 이들의 삶은 다 그 자리에서 나름대로 진지하고 엄숙한 것이다. 얼마 안 되는 하루벌이를 위해서도 저토록 필사적으로 열심인데…….”
훗날 정주영은 그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유대감과 존경심을 많이 느꼈다고 하네요. 그때마다 " 그래 다 같이 노력해서 하루빨리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주먹에 불끈 힘을 주었다고 했어요.
최초의 배가 완성되던 날 막아 놓았던 바닷물을 딱 텄지요. 물이 웅덩이로 쏴 들어오면서 배가 붕 떴어요. 그리고 잠시 후 붕 뜬 배가 바다 쪽으로 쑥 밀려나갔지요.
세상이 온통 뒤집혔지요. 직원들은 서로 부둥켜 앉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눈물바다가 되었어요. 단 한척의 배도 만들지 못했던 우리가 세계적인 대형 선박을 만든 것이지요. 이것이 세계 제1의 조선국가로 성장하게 된 바탕이라 하네요.
건조 능력 70만 톤, 부지 60만평, 70만 톤급 드라이 도크 2기를 갖춘 국제 규모의 조선소 준공을 본 것은 1974년 6월. 기공식을 한 1972부터 2년3개월 만이었지요.
이날 박정희 대통령은 준공식에 참석하여 조선입국(造船立國)’이라는 휘호를 써 주었어요. 현대조선은 그렇게 세워졌어요.
선박 건조(펌)
그러나 한창 잘나가는 듯하던 조선 사업에 위기가 닥쳐왔지요. 이는 바로 1973년에 불어 닥친 오일쇼크 였어요. 오일쇼크로 인해 유조선을 주문했던 사람들이 배를 가져가지 않겠다는 취소가 잇따랐지요.
현대조선이 만든배 가운데 3척이 울산 앞바다에 그냥 떠 있었어요. 그 중 1척은 오나시스의 처남이었던 그리스의 리바노스가 주문한 유조선 이었지요이제 막 걸음마 단계인 현대조선으로서는 휘청할 수 밖게 없었지요.
그러나 정주영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역발상을 생각 했어요. ‘만들어 놓은 배를 가져가지 않으면 우리가 그 배를 갖고 새로운 사업을 하면 되것 아니냐.’ 정주영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지요.
1976년 3월 인도하지 않은 초대형 유조선 3척을 가지고 아세아상선을 설립 했어요. 우리나라에서 수입해 오는 기름을 우리가 우리 유조선으로 운반하겠다는 생각이었지요.
하지만 그동안 우리나라에 기름을 실어 날던 외국 선박회사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지요. 아세아상선에 수송권을 넘겨주는 대가로 1400만 달러를 요구했어요.
그렇지만 정주영은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억지지 내가 택시를 타다가 자가용을 구입했는데, 택시회사에 돈을 주어야 하나? 그 동안은 우리한테 유조선이 없어서 자기네 배를 택시처럼 돈 주고 빌려 쓴 것인데, 우리가 배를 만들고 우리배로 우리기름을 운반하겠다는데 돈을 달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요구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였지요.
정주영은 뚝심으로 버텄지요. 8개월을 버텼더니 3백만달러로 떨어졌어요. 그래도 옴싹달싹 안하고 버텼지요. 결국에는 10원도 안주고 우리기름을 현대 아세아상선에서 운송할 수 있었어요. 거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뚝심도 큰 힘이 되었다 하네요.
대통령의 신임 - 고속도로 준공(펌)
그렇게 출발했던 아세아상선은 지금 현대상선이 되었지요. 오일쇼크로 몹시도 정주영을 힘들게 했던 현대조선은 요즘 세계적인 현대중공업이 되었구요.
이것저것 구실을 붙여 다 만들어진 유조선을 안 찾아가려고 떼를 썼던 리바노스 그러나 정주영은 그를 고마운 사람으로 생각했다 하네요. 어쨌든 황량한 모래벌판 사진 한 장을 보고 배를 주문해 주었던 지난날의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2007년 5월 25일 현대중공업 도크에서 우리 해군의 이지스함이 진수됐어요. 정주영이 처음 조선소를 짓겠다고 했을 때, 우리해군은 미군이 폐기 처리한 구축함을 가져다 페인트칠을 해서 쓰고 있었지요.
천지개벽이란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인가 봐요. 이날 진수식에서 정몽준 회장은 500원 짜리 거북선 이야기를 하며 아버지 정주영 회장을 그리워했다 하네요.
지금 전 세계 바다에 새로 나오는 배 5척 중 1척이 현대중공업 제품이고, 10척 중 4척이 한국산이라 하지요.
한국 조선소들은 중국에 싼 가격으로 수주를 맏긴 배들은 거들 떠 보지도 않고 있지요. 그래도 주문이 너무 밀려 배를 만들 도크가 없다 하네요.
길이 200m에 15층 높이의 배를 땅위에서 조립해 바다로 끌고 가 띄우는 데,이런 신공법은 한국 조선소에서만 하고 있으며 선박 엔진 또한 세계최고라 하지요. 엔진을 만드는 공장의 상무는 이 기술자들은 “나라의 보물”이라고 했어요. 이들이 세계 선박 엔진시장의 45%를 싹쓸이하고 있다 하네요.
지금 세계의 선주(船主)들이 한국으로 몰려들고 있어요. 모래바람이 휘날리던 미포만은 이제 배 조립품을 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비좁아졌지요. 그곳에선 3일마다 1억 달러짜리 거대한 배가 한척씩 쏟아지고 있어요.
현대중공업 사람들은 “배를 찍어 낸다”고 하지요 세계 조선역사에 이런 일은 없었다고 하네요. 한척의 배를 만든 이익금으로 오늘날의 현대중공업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래서 정주영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사람이라 했나 봐요.
그리고 또 1984년 " 정주영 유조선공법"이라는 내용으로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지요. 당시 충남 서산간척사업 A지구 매립공사는 6.4㎞를 연결함으로써 완공되는 사업이었지요.
이 사업으로 생기는 육지는 여의도 면적의 43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땅이었어요. 바다를 막아 옥토를 만드는 국가사업에 마지막 물막이 공사에 문제가 생겼어요.
이곳은 조석간만의 차가 크고 드나드는 물의 양이 3억 4천만 톤, 밀물시의 유속은 초당 8미터에 달해 20톤에 달하는 돌망태를 넣어도 그대로 물에 휩쓸려갔지요.
흔히 최종 물막이 공법은 케이블과 바지선 등 해상장비로 물막이 구간의 바닥을 점차 높여가는 점고식(漸高式)또 덤프트럭 등 육상장비를 이용해 점차 구간을 좁혀가며, 축조하는 점축식(漸縮式) 그리고 이들 두 방법을 같이 쓰는 병행식 등이 있어요.
하지만 서산 간척지 공사는 빠른 유속으로 인하여 통상적인 공사방법으로는 엄청난 비용과 작업기간이 오래 동안 소요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지요. 이때 정주영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대형 유조선으로 조수를 막아 놓고 물막이 공사를 하면 시간과 비용이 크게 절감될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어요.
물막이 1(펌)
물막이 2(펌)
이 획기적인 공법의 사용으로 계획공기 45개월 가운데 36개월을 단축 9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방조제를 쌓는 성과를 올렸으며, 280억 원의 경비도 절약함으로써 전세계을 놀라게 했지요.
정말 정주영 다운 배포요 정주영 다운 공법 이었지요.
이 기술은 학계에서도 주목을 받아 "유조선공법"으로 명명되어, 지금 세계 여러 나라에서 배우고 있다고 하네요. 이제 우리나라 경제계의 큰 별은 가고 없어요. 2001년 3월 21일 당신이 설립한 서울아산병원에서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요.
50세 때의 정주영(펌)
정주영 회장이 타계했을 때 미국 CNN 방송이 한 시간 이상을 특집으로 방송했는데, 이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네요.
호는 아산(峨山)이며 1915년 11월 25일에 농부인 아버지 정봉식(鄭捧植)과 어머니 한성실(韓成實)의 6남 2녀중 장남으로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났지요. 8세에 통천송전소학교(通川松田小學敎)에 입학하여 13세에 졸업하였으며,
그와 함께 졸업한 동창생은 27명. 그의 정식 최종학력은 소학교 졸업이 유일하지요.
매일 아침 함께 식사하는 정주영 일가(펌)
2000년 5월에 현대명예회장직에서 물려났고, 1987년 제1회 한국경영대상, 198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8년 IOC훈장과 노르웨이 왕실훈장을 수상하였으며, 사후에는 2001년 5월 제5회 만해상 평화상이 추서되었지요.
이후 5년 뒤인 2006년 11월에 미국 타임(TIME)지 선정 아시아의 영웅에 선정되었으며, 2008년 DMZ 평화상 대상이 특별 추서되었지요.
불가능을 가능으로 하면 된다는 신화를 창조하신 거인 정주영 !!
대한민국 근대사에 큰 획을 그은 경제대인 이지요.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될 때까지 그의 업적은 실로 대단 했어요. 우리는 그를 잊지 말아야 하고, 그는 위인 중에 위인, 거인 중에 거인으로 칭송받아 마땅하리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긴 글 읽으시느라 고생 많이 했어요.
-* 언제나 변함없는 산적: 조동렬(일송) *-
(2015. 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