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산업화의 세 영웅(펌)
1962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국가의 목표를 분명히 정하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지금 우리나라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박정희는 국가목표 설정을 위해 심사숙고 한다.
이승만 정권 때는 남북통일이 지상과제였고, 4.19 이후의 장면내각 때는 잇따른 내각개편과 혼란으로 국가목표를 논할 여유도 없었겠지만, 독재와 부정 부패에 항거해 궐기한 4.19를 염두에 둔다면, 국가의 목표로 민주화를 거론할 수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박정희는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이 $100도 못 되어, 카메룬, 수단, 케냐 등과 함께 최빈국에 속한다는 현실을 감안할 때, 남북통일이나, 민주화가 국가의 당면한 정책 목표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여 박정희는 경제성장과 산업화를 국가의 당면 목표로 설정한다. 그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바탕으로 강력한 관주도형의 경제운용을 하는 한편, ‘잘 살아보세.’ 구호를 앞세운 새마을 운동을 통해 국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의식개혁을 통해 고도성장을 이룩하고자 한다.
1962년 이후 한국은 30여 년 동안, 년 평균 9%이상의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짧은 기간 안에 훌륭하게 산업화를 이룬다. 이런 한국의 유례가 없는 발전상은 세계를 놀라게 하고, ‘압축 성장’, ‘한강변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물론 이런 기적은 ‘잘 살아보자는 일념’으로 적극 참여한 온 국민들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방향을 정하고,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의 능력과 헌신이 없었다면 이룩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여 박정희, 이병철, 정주영 의 3인을 대한민국 산업화의 세 영웅으로 꼽아 칭송하는 이유이고, 동시대에 이런 세 영웅이 배출된 것은 대한민국의 국운을 융성하게 하고자 하는 신의 뜻이라 할 수 있겠다.
서론이 길어 졌지만, 시인 일송 조동렬 교수가 흡사 손자 손녀에게 들려주듯 쉽고 재미있게 정주영을 소개한 글이 있어 나누어 여기에 모셔 싣는다.
아산 정주영(펌)
정주영과 거북선 지폐 - 일송 조동렬
1970년대 초 어느 날 밤 정주영은 청와대에 뒤뜰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앉아 있었어요. 무거운 침묵이 오래 동안 흘렀지요. 박 대통령이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켜고, 담배를 하나 피워 물더니 정주영에게도 한대를 권했어요. 정주영은 원래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요.
그러나 그날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지요. 원래 과묵한 박 대통령이지만 이날은 더욱 말이 없이 시간만 흘렀어요. 정주영은 박 대통령이 불을 붙여준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고 있었는데, 드디어 박 대통령이 입을 열었어요.
“한 나라의 대통령과 경제 총수 부총리가 적극 지원하겠다는데
그거 하나 못하겠다고, 여기서 체념하고 포기를 해요?
어떻게 하든 해내야지..
임자는 하면 된다는 불굴의 투사 아니오?”
실은 정주영도 조선소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지요. 그러나 그건 제반 여건상 지금은 아니고 나중 일이었어요. 하지만 대통령은 그에게 시간을 주지 않고 압박 아닌 압박을 하고 있었지요.
이유는 있었어요. 곧 포항제철이 완성되는 때였지요. 포항제철에서 생산되는 철을 대량으로 소비해줄 산업이 필요했던 거지요. 당시 김학렬 경제부총리는 먼저 삼성 이병철에게 조선 사업을 권유했어요. 정주영은 삼성 이병철에게 거절당한 뒤 자신에게 화살이 날아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요. 결국 정주영은 그날 박대통령에게 승낙을 하고 말았어요.
"각하의 뜻에 따라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심 했어요.
‘그래 한번 해보는 거야. 못할 것도 없지. 그까짓 철판으로 만든 큰 탱크를 바다에 띠우고 동력으로 달리는 게 배지. 뭐. 배가 별거야.’ 어렵고 힘든 일에 부딪치면 쉽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정주영의 특기가 발휘 되었지요.
정주영은 조선업자로 조선소 건설을 생각한 게 아니라 건설업자로서 조선소 건설을 생각했어요. 배를 큰 탱크로 생각하고 정유공장 세울 때처럼 도면대로 철판을 잘라서 용접을 하면 되고, 배의 내부 기계는 건물에 장치를 설계대로 앉히듯이 도면대로 제자리에 설치하면 된다고 여긴 것이지요.
그러나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조선소를 지을만한 돈이 없었어요. 대형 조선소를 지으려면 차관을 들여와야 하는데 해외에서 차관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지요. 그래서 일본에도 가고, 미국에서 갔어요. 그렇지만 아무도 정주영을 상대해주지 않았어요. 오히려 미친놈 취급만 당했지요.
“너희 같은 후진국에서 무슨 몇 십만 톤의 조선소를 지을 수 있냐?”는 식이었어요. 정주영은 약이 올랐지요. 그때부터 하면. 된다는 모험심이 발동 했어요. ‘안된다고? 그래 한번 해 보는 거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데 …….’
당장 필요한건 돈이었어요. 해외에서 차관을 얻으려면 3번에 걸친 관문을 뛰어 넘어야 했지요. 일본과 미국에서 외면당한 정주영은 영국 은행의 문을 두드리기로 했어요.
그러나 영국은행 버클레이즈와 협상을 벌였으나 신통한 반응을 얻을 수 없었어요. 돈을 빌리기 위해선 영국식 사업계획서와 추천서가 필요했지요. 그래서 정주영은 1971년 영국 선박 컨설턴트 기업인 A&P 애플도어에 사업계획서와 추천서를 의뢰했어요. 타당성 있는 사업계획서와 추천서가 있어야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얼마 후 사업계획서는 만들어 졌지만 추천서는 해줄 수 없다는 거였지요.
정주영은 영국의 유명한 조선회사 A&P애플도어 회장의 추천서를 받기위해 런던으로 날아갔어요. 그에게는 조선소를 지을 울산 미포만의 황량한 모래사장을 찍은 흑백사진이 전부였지요.
미포만 항공사진(펌)
울산 미포만의 어제와 오늘(펌)
런던에 도착하여 일주일 만에 A&P 애플도어의 찰스 롱바톰 회장을 어렵사리 만났어요. 그러나 롱바톰 회장은 비관적인 말만 되풀이 하고 있었지요.
“아직 배를 사려는 사람도 나타나지 않고 있고 또 현대건설의 상환능력과 잠재력도 믿음직스럽지 않아 힘들 것 같다.” 는 말이었지요.
“그럼, 한국 정부가 보증을 서도 안 됩니까? " 그러자 그는
"한국정부도 그 많은 돈을 갚을 능력이 없는 걸로 알고 있다."고 말했어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 이었지요 이때 궁하면 통한다는 정주영식 기지가 발동했어요. 정주영은 문득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는 500원짜리 지폐가 생각났어요. 지폐 그림은 바로 거북선이었지요.
정주영은 주머니에서 거북선 그림의 지폐를 꺼내 테이블위에 펴놓으며,
“이걸 잘 보시오. 이 우리나라 지폐에 그려진 것은 거북선이라는 배인데 철로 만든 함선이지요. 당신네 영국의 조선역사는 1800년대부터라고 알고 있소.”
“한국은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이 거북선을 만들어냈고, 이 거북선으로 일본과의 전쟁에서 일본을 물리쳤지요. 한국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바로 이 돈 안에 담겨있다는 말이지요."
롱바톰 회장은 의자를 당겨 앉으며 지폐를 들고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어요. 앞면에는 한국의 국보 1호인 숭례문이 있고 뒷면에는 바다에 떠있는 배가 그려져 있었지요. 그 모습이 거북이와 많이 닮았어요.
500원 짜리 지폐(펌)
"정말 당신네 선조들이 실제로 이 배를 만들어 전쟁에서 사용했다는 말입니까? "
"그렇고말고요!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이 만든 배입니다. 한국은 그런 대단한 역사와 두뇌를 가진 나라이지요. 불행히도 산업화가 늦어졌고 그로 인해 좋은 아이디어가 묻혀 있었지만 잠재력만은 충분한 나라입니다.“
“우리 현대도 자금만 확보된다면 훌륭한 조선소와 최고의 배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회장님!! 버클레이 은행에 추천서를 보내주십시오.”
정주영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당당한 태도로 롱바톰 회장을 설득했어요. 롱바톰 회장은 잠시 생각한 뒤 지폐를 내려놓으며 손을 내밀었지요.
"당신은 당신네 조상들에게 감사해야 할 겁니다." 롱바톰 회장의 얼굴에 어느새 환한 미소가 번졌어요.
“거북선도 대단하지만 당신도 정말 대단한 사람이오. 당신이 정말 좋은 배를 만들기를 응원하겠소.'
그러면서 롱바톰 회장은 얼굴에 환한 미소와 함께 축하 악수를 청하고 있었지요. 수많은 프레젠테이션과 완벽하게 만든 보고서에도 'NO'를 외쳤던 롱바톰 회장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500원짜리 지폐 한 장 이었지만 이는 정주영의 번뜩이는 기지의 산물이었지요.
그날 롱바톰 회장은 현대건설이 고리원자력 발전소를 시공하고 있고 발전계통이나 정유공장 건설에 풍부한 경험도 있어 대형조선소를 지어 큰 배를 만들 능력이 충분하다는 추천서를 버클레이즈 은행에 보내주었어요. 정주영의 기지로 첫 번째 관문이 통과되는 순간 이었지요.
(2015. 0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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