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1)

서울의 명소 2016. 3. 13. 10:48

 

 한복 입은 아가씨들 궁전 관람(무료)

 

 혼자 즐길 수 있는 곳들을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한국관광 100을 만나고, 이중에서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을 가보기로 한다, 창덕궁을 첫 대상으로 꼽는다.

 

창덕궁에 관한 모든 정보는, <창덕궁 http://www.cdg.go.kr> 잘 정리 되어있다. 방문 전에 둘러보고 가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내 경우는 아무 사전준비 없이 무작정 방문하고 나서, 사진을 정리하면서, 창덕궁 홈페이지 자료로 공부를 하고, 그 내용을 이곳에 옮겨 놓았다.

 

창덕궁은 1405(태종 5) 조선왕조의 이궁으로 지은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이웃한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 불렀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광해군 때에 다시 짓고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기까지 정궁 역할을 하였다.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면 창덕궁은 산자락을 따라 건물들을 골짜기에 안기도록 배치하여 한국 궁궐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하고 있다. 또한 비원으로 잘 알려진 창덕궁 후원은 다양한 정자, 연못, 수목, 괴석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한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이상 홈페이지 자료)

 

창덕궁 관람은 일반(전각)관람과 후원관람 두 가지가 있는데, 전각관람은 자유관람이고, 후원관람은 문화재 보호와 생태보존을 위해 제한관람을 실시하고 있다.

 

후원관람은 언어권별(한국어/영어/일어/중국어)로 정해진 시간에 따라서 인원제한(100-인터넷 예약 50, 당일 선착순 현장 판매 50)을 두어 안내해설사와 함께 관람을 하게 된다. 소요시간은 약 1시간 30분이다. 후원관람의 인터넷예약은 창덕궁 홈페이지에서 관람예약-후원 관람예약을 참조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2016225()

222일 창덕궁 홈페이지에서 ‘22510인터넷예약을 하고, 23일 오전 해설사로부터 창덕궁 정문 매표소 앞에서 10시에 만나자는 문자 메시지를 받는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를 나와, 950분 경 매표소 앞에 도착하여, 955, 해설사 장 여사를 만난다. 자신은 자원봉사자라며 예약한 사람들이 더 있으니 잠시 기다리는 동안, 우선 매표소에서 전각관람 표를 구입하라고 한다.

 매표소에 게시된 관람요금과 관람시간

 

전각관람료는 성인이 3,000원인데, 65세 이상은 무료다. 경로입장권을 받고, 500원을 주고 한글판 경복궁 팜프렛을 구입한다. 이윽고 아이들 3명을 대동한 젊은 부부가 모습을 보이고, 이어 

준비가  끝나자, 정 여사는 우선 돈화문에 대한 설명부터 한다. 하지만 그 내용은 팜프렛에 실린 내용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태종12)에 건립되었다. 2층 누각 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규모 크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이듬해인 1609년에 재건되었다. 보물 383호다.

 

敦化中庸大德敦化에서 가져온 것으로 '큰 덕은 백성들을 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이층 문루에 종과 북이 있어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돈화문

 

일행은 돈화문으로 지나 창덕궁으로 들어선다. 정 여사는 왼쪽 회나무를 가리킨다. 학자의 기개를 닮아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던 회나무는 학자수라고 도 불린다며, 창덕궁에는 수령 300~ 400년이 넘는 회나무 10여 그루가 있는데, 모두 천연기념물이라고 한다.

   회나무 1

 

 회나무 2

 

이어 정 여사는 우리들에게 창덕궁 세계유산비를 보여주고, 궐내각사(闕內各司)로 안내한다. 궁궐 안에 설치된 왕실과 직접 관련이 있는 관청들을 궐내각사라고 하는데. 정치를 보좌하는 홍문관(弘文館, 玉堂), 건강을 보살피는 내의원(內醫院, 藥房), 정신문화를 담당하는 규장각(奎章閣, 內閣), 왕의 칙령과 교서를 보관하던 예문관(藝文館)등이 중심시설이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일제 강점기에 소멸되었다가 2005년에 복원되었다.

  궐내각사 전경

 

   청덕궁 세계유산

 

  궐내각사 전각 배치도

 

 규장각

 

 검서청

 

  궐내각사 내부

 

이어 금천(禁川)을 건너 선원전(璿源殿)으로 들어선다. 선원전은 역대 제왕들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금천 1

 

 금천 2

 

 선원전 전각 배치도

 

 어진

 

 선원전 마당의 향나무

 

 내찰당과 담 넘어 양지당

 

 약방

 

 담장 너머 전각들

 

궐내각사와 선원전원 둘러보고 금천교 쪽으로 나오면서, 정 여사에게.

 

나는 비원을 둘러보려고, 예약을 했던 것인데, 비원은 언제 보게 되나요?”

라고 묻는다.

 

그래요?, 그러면, 11시 후원탐방 팀에 합류하시면 되겠네요. 함께 전각을 둘러보시다가, 시간이 되면 안내해 드리지요.”라고 대답하더니,

 

후원탐방은 가이드를 따라 진행하는데, 1시간 30분 정도 걸리니까, 후원탐방이 끝난 후, 전각탐방을 계속하시면 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친절하게 덧붙여 설명을 해준다. 느티나무 고목이 눈길을 끄는 돌다리 금천교 (錦川橋)에 이른다.

   금천교와 진선문

 

 금천교 느티나무, 정면의 목책길이 선원전에서 나오는 길이다.

 

예로부터 궁궐을 조성할 때에는 궁궐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명당수를 건너게 하였다. 이 물은 궁궐의 안과 밖을 구분해 주는 경계 역할을 함으로 금천(禁川)이라고 불렀다. 창덕궁의 금천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동쪽 궐 밖으로 빠져 나간다.

 

1411(태종11) 금천에 다리를 놓았는데 비단처럼 아름다운 물이 흐르는 개울에 놓인 다리라 하여 금천교(錦川橋)라 불렀고,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 2011년 보물 1712호로 지정되었다.

 

다리 아래에는 남쪽의 해태 상, 북쪽에 거북 상을 배치하여 궁궐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삼았다. 다리 중간에는 잡귀를 쫓는 귀면(鬼面)이 조각되어 벽사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금천교-귀면과 해태상()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進善門)으로 들어선다. 정면으로 숙정문, 왼쪽에 인정문이 보인다. 경국대전에 진선문에 신문고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이 돈화문을 통과하여 진선문에 걸린 신문고를 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억울한 백성들은, 두드리기 힘든 신문고는 포기하고, 왕의 행차에 뛰어들어 어려움을 호소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인정전 배치도

 

 인정문과 숙정문

 

인정문(보물 813)을 지나 인정전(仁政殿-국보 225)으로 들어선다. 1408(태종 5) 창덕궁 창건과 함께 건립된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政殿)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국가의 중요 행사가 행해진 궁궐의 대표적 공간이다. 이러한 행사 때에는 인정전 앞의 품계석에 맞춰 동쪽에는 문관이, 서쪽에는 무관이 중앙을 향해 도열했다.

   인정문

 

 인정전

 

 품계석

 

조선의 궁궐 정전에는 공통적으로 정면에 임금의 용상(龍床)과 나무로 만든 곡병(曲屛)을 두고 뒤에는 일월오악병(日月五岳屛)을 둘렀는데 일월오악도에는 해와 달, 다섯 개의 산봉우리, 폭포, 파도,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 천장에는 봉황 한 쌍이 새겨져 있다. 1908년 전기시설이 가설되면서 인정전에 전등이 설치되고, 커튼, 유리창문 등을 더해, 서양식으로 개조됐다.

   인정전 용상

 

인정전 관람을 마치고, 선정문을 지나 임금이 평소에 국사를 논의하던 편전(便殿)인 선정전(宣政殿-보물 814)으로 들어선다. 임금은 일월오악도를 배경으로 중앙에 앉고 그 좌우로 문관과 무관이 자리 잡은 한쪽에서는 사관(史官)이 앉아 국사에 대한 논의를 세세히 기록하였다. 이 건물은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선정문, 선정전

 

 선정문

 

 선정전 안내

 

 선정전 용상

 

이어 장 여사는 옆에 있는 희정당(熙政堂)을 놔두고 뒤쪽의 대조전(大造殿)으로 우리들을 안내한다. 아마도 후원탐방 시간을 의식한 모양이다. 대조전은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왕비의 침전인 서온돌과 임금의 침전인 동온돌로 나눠진다.

  선평문과 대조전

 

 화장대

 

 온돌 아궁이

 

 대조전 뒤뚤

 

대조전은 용마루가 없는데, 이는 용으로 비유되는 임금이 잠자는 곳에 또 다른 용을 나타내는 용마루가 있으면 두 용이 충돌한다 하여 설치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1917년 이 건물이 불에 타자, 1920년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을 옮겨다 지었다.

   대조전

 

경훈각

 

흥복헌

 

경훈각(景薰閣)과 흥복헌(興福軒)은 대조전의 부속 건물로 대조전과 내부에서 서로 통하도록 복도와 행각으로 연결되어 있어, 궁궐의 복합적인 구성을 잘 보여준다. 보물 816호로 지정되었다. 이중 홍복헌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대조전 배치도

 

대조전 뒤뜰을 지나, 희정당(熙政堂)으로 이동한다. 보물 815호인 희정당은 임금의 침실이 딸린 편전이었는데, 원래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아, 침전이었던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여 어전회의실로 사용 되었다. 1917년 대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의 건물은 1920년 경복궁의 강녕전(康寧殿)을 옮겨 지은 것이다.

  희정당

 

희정당까지 안내를 한 정 여사는 후원관람 매표소로 나를 데려다 주고 헤어진다. 남은 성정각과 낙선재는 후원을 관람한 후, 둘러본 것이다.

  성정각 배치도

 

성정각 (誠正閣)은 세자의 교육장이고, 이 일대가 동궁이다. 동궁에는 많은 건물들이 있었는데, 옥각누각인 삼삼와(三三窩), 그 옆의 칠분서(七分序), 그리고 승화루(承華樓)는 복도로 연결되어 서고와 도서실로 사용되었다

   성정각

 

 승화루

 

1910년대부터 성정각을 내의원으로 이용하였다. 내의원은 궁중의료기관으로 왕과 왕족의 병을 치료하고 약을 조제하던 곳으로 내국(內局)이라고도 불렀다.

  낙선재 배치도(사진 크릭하면 커짐)

 

낙선재(樂善齋), 석복헌(錫福軒), 수강재(壽康齋)가 하나의 일곽(一廓)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통칭하여 낙선재라 부른다. 후사가 없던 헌종은 1847(헌종 13)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이하여, 중희당(重熙堂) 동쪽에,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등을 차례로 지었다.

  낙선재 일원 1

 

 낙선재 일원 2

 

 낙선재 일원 3

 

 상량정과 낙선재 누마루

 

 낙선재

 

 대청과 내실

 

 석복헌

 

 수강재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새로 건물을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문물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단청을 하지 않은 낙선재의 소박한 모습이 헌종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하겠다. 아름다운 화계(꽃계단)와 꽃담, 다채로운 창살들이 돋보인다. 낙선재의 현판은 청나라의 대가 섭지선의 글씨이고, 대청마루 앞 주련에는 추사 김정희의 스승 옹방경의 글씨가 있다.

  장락문

 

만월문과 꽃담

 

낙선재 창살문양

 

낙선재 현판

 

 후원 1

 

 후원 2

 

마지막 황후인 윤 황후(순정효황후)가 석복헌에서 1966년까지 생활했고, 낙선재는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 등이 1963년부터 1989년까지 거처하여,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곳이다. 2012년 낙선재 일원이 보물 1764호로 지정되었다.

 

 

(2016.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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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Urim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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