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경(秘景)

기타산행기 2012. 12. 17. 14:52

 

8봉에서 본, 4봉, 5봉, 6봉, 7봉

7봉(좌)과 우회로인 칼날능선

 

2010년 6월 12일(토).
남아공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그리스와 첫 경기를 하는 날이다. 국민들의 관심이 온통 이 일전에 달려 있는 듯싶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데도 서울광장, 영동대로 등 거리응원 장에는 붉은 악마들이 속속 몰려들고 있다. 나는 오늘 밤 10시 30분에 비경을 보러가기 위해 천호역에서 산악회 버스를 타야한다.

 

봉정암에서 수렴동 대피소까지 이어지는 장장 5Km의 암릉에는 30여개의 암봉들이 우쭐우쭐 솟아있고, 뜀바위, 개구멍바위, 턱바위, 20m직벽 등 위험구간이 산재해 있어 산꾼들의 구미를 돋운다. 그뿐인가?  이 능선을 타면서 보는 조망이 일품이다. 북동쪽의 웅장한 공룡능선, 남서쪽의 서북능선, 그리고 동쪽 화채능선의 기라성 같은 기암절벽들을 바라볼 수 있고, 가야동계곡과 구곡담계곡을 굽어 볼 수 있는 내설악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공룡능선, 오른쪽에 천화대가 보인다

쪽 조망

구곡담계곡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고위험이 높아 출입이 금지된 비경(秘景)이다. 특히 2009년 이후는 단속이 심해 거의 산행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2005년 10월 2일 새벽 3시, 간간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오색을 출발하여 대청을 거쳐, 소청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봉정암으로 이동한다. 비는 멎었지만 안개가 짙게 끼었다. 봉정암에 도착하니, 어제 내린 비로 바위가 미끄러워 오늘산행을 취소한다며 구곡담 계곡으로 하산하라는 지시가 전달된다.

5년 전 봉정암에서 본 비경

 

그 후 5년 만에 비경을 안내하겠다는 연락을 받는다. 위험구간도 문제지만 잠도 못자고 꼬박 15시간 정도를 걸어야하는 체력이 기본임으로 한동안 망설인다. 최근 무박산행으로 10시간 정도를 걸어보니,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현상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5년 만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를 할 것이 뻔 할 터이니, 일단 저질로 놓고 보자고 신청을 한다.

 

산행 일주일 전, 회비(65,000원)입금 순으로 정원을 선발하니 생각이 있으면 서둘러 입금을 하라는 연락을 받는다. 안전대책을 묻는다. 전문가이드 3인이, 10m 자일 3매와 슬링을 준비하니 안전대책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대답이다. 산행들머리가 어니냐고 묻는다. 외부 전문가이드가 정하기 때문에 산악회에서는 모른다고 한다. 무슨 이야기인지 대강 감이 잡힌다. 바로 입금을 한다.

 

주말 날씨가 궁금하다. 주초의 예보에서는 남부지방에 비가 오겠다더니, 주중을 넘어서자, 토요일에는 전국에 비교적 많은 비가 내리고, 이 비는 일요일 새벽에야 그친다고 한다. 금요일, 산악회에서 우천불구 산행을 하겠다는 메시지가 들어온다. 또 고민이 생긴다. 그 위험한 곳을 비를 맞으며 가야하나? 집사람도 극구 반대를 하지만, 안전문제는 일단 전문가이드의 판단에 맞기고 따라 나서기로 한다.

 

배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 꼭 필요한 랜턴, 물 한 병, 포카리스웨트 한 병, 방수재킷과 갈아입을 옷을 챙기고, 아침은 주먹밥, 점심과 간식으로 행동식과 우유를 준비한다. 토요일 낮잠을 자두려고 시도를 해 보지만, 설레임으로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한다. 저녁식사를 하고, 배낭을 챙겨 놓은 후, 축구중계를 본다. 하지만 박지성 선수의 기막힌 골 장면까지 본 후 집을 나선다. 다행이 비는 멎었다.

 

10시 17분, 천호역을 나온다. 음식점 앞에 대형 스크린이 설치 돼 있고, 인도에 내 놓은 테이블 주변에서 맥주를 마시며 응원하는 사람들의 환성이 거리에 울려 퍼진다. 인저리타임 경기가 진행되고 있다. 이윽고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모두들 펄쩍펄쩍 뛰며 승리를 자축한다. 산행 때문에 후반전 경기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하철 안에서 무척 궁금해 하던 차라, 나도 이런 열띤 분위기에 휩싸여, “대~한민국!”을 따라 외친다. 신나는 밤이다. 어려운 산행에 대한 걱정도 말끔히 가셔지는 느낌이다.

 

이윽고 산악회 버스와 봉고차가 함께 들어온다. 45인승 버스에 자리가 모자라 봉고차를 추가로 투입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참여자가 60명이 넘는다는 이야기이다. 대단힌 성황이다. 참여자들은 40~50대가 주축이고, 의외로 여성 참여자들도 많이 눈에 뜨인다. 버스가 출발하고 자리가 정비되자 산악회 등반대장이 앞자리에 앉은 외부 전문가이드 세 사람을 소개하며, 이번 산행은 모두 이들이 진행하고, 산악회에서는 한 사람만 따라간다고 인사를 한다.

 

중간에 휴게소에서 약 20분 간 정차했던 버스는 일요일 1시가 조금 못된 시각에 용대리에 도착한다. 꽁지머리에 수염까지 기른 가이드 대장은 1시 30분에 산행을 시작할 터이니 산행준비를 하라고 지시를 한다. 랜턴을 꺼내 준비하고, 배낭커버를 씌우는 등 산행준비를 마치고 차에서 내린다. 간간이 이슬비가 흩날리지만 방수재킷을 입어야 할 정도는 아니다. 산행준비를 마친 대원들은 삼삼오오 둘러서서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있다.

버스에서 내려 산행준비를 하는 대원들

 

가이드대장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자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예정보다 빠른 1시 15분, 출발을 하자며 앞장을 선다. 백담사로 이어지는 시멘트도로를 따라 오른다. 설악에도 제법 비가 많이내린 모양이다. 도로 곳곳에 물웅덩이가 보인다. 많은 비에 바위가 미끄럽지 않을까 걱정이다. 평탄한 길이라 중간쯤에 끼어서 부지런히 걷는다.

 

빗발이 굵어진다. 옷이 젖어 체온을 빼앗기면 곤란하겠기에 배낭에서 방수재킷을 꺼내 입는다. 그 사이 뒤따라오던 대원들이 다가온다. 서둘러 배낭을 둘러메고 최후미 그룹에 끼어 부지런히 걷는다. 다시 빗방울이 가늘어지더니 비가 멎는 느낌이다. 비옷을 입은 대원들이 더운지 비옷을 벗어 챙기느라 뒤쳐진다. 비가 멎자 짙은 안개가 내려 덮인다. 왼쪽에서 들리는 계곡물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깬다. 앞선 사람들의 랜턴 불빛이 사라진지는 오래고, 뒤 따라오는 대원들의 불빛도 보이지 않는다. 안개 속을 혼자서 터덜터덜 걷는다. 설악의 정기 때문인가? 마음이 편안해 진다. 전신주에 칠해 놓은 야광이 랜턴불빛을 받아 번쩍인다. 2시 32분, 백담사 일주문을 통과한다.

백담사 일주문

 

갈림길에 이른다. 한밤중이라 방향을 짐작하기 어렵다. 잠시 멈춰 서서 후미를 기다린다. 이윽고 후미가 모습을 보이고, 후미대장의 길안내로 직진하여 넓은 도로를 따라 오른다. 이어 2시 43분, 백담산장에서 후미를 기다리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대원들과 합류한다. 이곳에서 한동안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출발하여, 3시 39분, 영시암에 도착한다. 가이드대장은 이곳에서 4시에 출발할 터이니, 간식을 들며 휴식을 취하고, 식수를 충분히 준비하라고 지시한다. 아울러 수렴동대피소를 지날 때는 소리를 죽이고 재빨리 통과하라고 주의를 준다.

백담산장 공터에서 휴식

영시암

 

다시 빗발이 흩날린다. 상세예보에 의하면 설악의 비는 새벽 3시경이면 그친다고 하더니, 이번 예보도 맞지 않는 모양이다. 가이드대장이 이 정도의 비면 산행에 큰 지장은 없다고 대원들을 안심시킨다. 나도 비를 피해 쉼터에 앉아, 초코파이 한 개와 우유 한통으로 에너지를 보충한다.

비를 피해 절 추녀 끝에 모인 대원들,

 

4시에 영시암을 출발하고, 4시 27분, 수렴동대피소 나무다리 난간을 넘어 산길로 들어선다. 엄중한 경고판이 보인다. 가이드대장이 모든 안전시설물이 철거됐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대원들은 소리 없이 재빠르게 가파른 산길을 타고 오른다. 험하지는 않지만 가파른 길이라 미끄럽다. 비는 소강상태다. 몸에 열이 나면서 안경에 김이 서려 시야를 가린다. 호흡과 발걸음을 일치시키며 천천히 오른다.

경고문

 

4시 42분, T자 능선에 올라, 오른쪽의 부드러운 능선 길을 따라 걷는다. 5시 15분, 슬링이 걸려있는 암벽에 대원들이 모여 있다. 순서를 기다렸다 슬링을 잡고 암벽을 오른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은 바위는 비가 왔는데도 전혀 미끄럽지 않다. 5시 15분, 대원들이 쉬고 있는 옥녀봉에 오르자, 가이드대장이 랜턴을 끄라고 지시를 한다.

최초의 암벽

 

옥녀봉에서 한동안 휴식을 취한다. 후미대장에게 이곳이 옥녀봉이 맞느냐고 확인을 해보지만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다. 이 장릉(長)에는 30여개의 암봉들이 용립되어 있지만, 옥녀봉과 1봉부터 9봉까지의 대표적인 암봉들이 길잡이가 된다고 한다. 비가 그쳐 방수재킷을 벗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안개가 자욱하여 건너편 암봉이 윤곽만 보인다. 암릉길이 이어진다. 왼쪽 내리막 암릉에서 또 정체가 생긴다. 유명한 뜀바위를 우회하는 길이다. 덕분에 뜀바위는 구경도 하지 못한다.

뜀바위 우회로에서의 정체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내설악의 속살이 보이기 시작하고, 뜀바위를 우회하여 안부를 지나, 건너편 암봉으로 오르는 대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서서히 비경이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한한다. 뜀바위 우회로의 가파른 암릉에 가이드대장이 슬링을 걸어 놓았다. 위험한 정도는 아니지만 대원들이 한 사람씩 조심조심 내려서느라 시간이 걸린다.

안개가 걷히며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 비경

뜀바위를 우회한 후 오른 암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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뜀바위를 우회한 후 오른 암봉 2

5시 57분, 암봉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며, 약 35분 동안 유장하게 아침식사를 즐긴다. 식사가 끝날 무렵 다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서둘러 방수재킷을 꺼내 입고 암봉을 내려선다.

아침식사를 한 암봉에서 바라본 뜀바위 우회로

공룡능선 1


 

공룡능선 2

뒤돌아 본 옥녀봉

 

7시 추모비가 있는 암봉을 왼쪽으로 우회한다. 능선안부를 지나 오르막길에서 또 다시 정체가 생긴다. 슬링이 걸린 가파른 암릉 두 곳을 통과해야하기 때문이다. 차례를 기다리다보니 안개가 걷히며 왼쪽으로 절벽위에 둥지를 튼 모양의 오세암이 보이고, 뒤로는 옥녀봉과 아침식사를 한 암봉이 모습을 보인다.

추모비가 있는 암봉을 왼쪽으로 우회하고

또 다른 정체

슬링이 걸린 짧은 직벽

절벽에 둥지를 튼 오세암

비에 젖은 암릉을 오르고,

 

7시 44분, 개구멍바위가 보이는 암봉에 올라 하염없이 차례를 기다린다. 개구멍바위 안쪽에 자일을 고정시켜 매놓고, 입구에 앉은 가이드가 대원의 허리에 슬링을 감은 후, 그 슬링과 자일을 캐리비너로 연결하고, 대원은 양손으로 고정된 자일을 잡고 게걸음으로 캐리비너를 밀고 앞으로 나가면, 개구멍바위 끝에서 가이드 대장이 통과한 대원의 허리에 맨 슬링을 풀고, 암릉으로 오르도록 도와준다. 이렇게 한 사람이 통과하면 입구의 가이드가 슬링을 회수하여 다음 대원의 허리를 묶는다. 이런 식으로 통과하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좁은 암릉이라 우선 첫 번째 대기 장소에서 기다리다, 사람들이 빠지면, 2m정도 높이의 직벽을 손가락 두 개가 들어갈 수 있는 작은 홀드를 잡고 몸을 솟구쳐, 두 번째 대기 장소에 올라 또 기다린다. 마지막 대기 장소에서는 세 사람이 대기한다. 한 사람이 통과하면, 두 번째 대기 장소에서 기다리던 대원이, 폭 30~40 센티 정도의 아찔한 절벽 끝을 오른쪽 머리위의 홀드를 잡고, 몸을 비틀며 통과하여 세 번째 대기 장소로 들어서서 기다린다. 이런 식이니 개구멍바위 통과가 부지하세월이다.

개구멍바위 통과를 기다리고

두 번째 대기지점에서 돌아본 첫 번째 대기지점

마지막 대기지점과 가이드의 도움을 받으며 개구멍바위로 들어서는 대원

 

대기하는 동안 비가 멎고 기온이 올라 따듯하게 느껴진다. 방수재킷을 벗고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는 비경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한 시간을 넘게 기다린 후 겨우 개구멍바위를 통과하고, 턱바위를 지나, 9시 13분, 1봉이라고 짐작되는 암봉에서 지나온 개구멍바위를 돌아본 후, 간식으로 초코파이와 우유를 들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구름이 허리에 걸린 서북능선

개구멍바위 통과 후 암릉을 오르는 대원, 뒤로 추모동판이 보인다.

1봉

개구멍 바위를 통과하는 대원

지나온 암봉

1봉을 내려서고 2봉을 넘는다. 9시 50분, 앞에 거대한 암봉이 막아서고 왼쪽으로 우회로가 보이는데, 어느 쪽으로 진행해야 할지를 모르는 대원들이 모여 쉬고 있다. 이윽고 가이드대장이 모습을 보이더니 우회로로 들어선다. 우회로는 급하게 떨어지는 가파른 내리막이지만 위험한 정도는 아니다. 안부를 지나 본 능선으로 진입하여 210도 방향으로 구름에 덮인 귀떼기청봉을 바라보고 우회한 3봉을 카메라에 담는다.

210도 방향의 조망

우회한 3봉

 

10시 19분, 4봉에 올라 200도 방향으로 부드러운 점봉산을 바라보고, 가볍게 오르내리는 암릉길을 걷는다. 오른쪽으로 시야가 트이며 대청봉이 보인다. 등산로는 암릉을 버리고 부드러운 산길로 이어진다. 곳곳에 고사목들이 보인다. 이어 안부를 지나 다시 암릉길을 걷는다. 오른쪽으로 저 아래 구곡담 계곡길이 내려다보이고 왼쪽으로 오세암이 가까이 보인다.

200도 방향의 점봉산

대청봉 방향의 조망

뚜렷하게 보이는 오세암

 

11시 1분, 눈앞에 긴 칼날능선이 펼쳐지고 그 왼쪽에 7봉이 우뚝하다. 실로 멋진 풍광이다. 칼날능선으로 접근한다. 양팔을 벌리고 환호하는 대원의 모습, 그리고 칼날능선을 오르는 대원들의 모습이 점점이 보인다. 폭 2m 정도의 칼날능선은 양쪽이 깎아지른 벼랑이라 멀리서 볼 때는 무척 위험해 보이지만, 실제로 올라보면 위험하다는 느낌이 없이 편하게 오를 수 있다.

칼날능선 앞에서 환호하는 대원


 

칼날능선을 오르고

 

11시 26분, 자일을 잡고 칼날능선 꼭대기에 올라, 구곡담 계곡을 가까이 내려다보고, 왼쪽에 보이는 깎아지른 7봉 직벽 아래로 내려서서 11시 40분, 너른 안부에 자리를 잡고, 점심식사를 한다. 대원들의 식사가 얼추 끝나자, 가이드대장이 12시 20분에 출발을 하겠다며, 향후 택할 길을 설명한다. 앞으로 8봉을 넘은 후, 9봉을 생략하고, 자신만이 아는 탈출로를 통해 20여분 진행하여 구곡담 계곡으로 내려서서, 하산을 하겠다는 이야기이다. 그렇지 않고, 9봉에 오른 후, 20m 직벽에 자일을 설치하고, 모든 대원들이 차례로 내려선 다음, 봉정암까지 가려면 2시간 이상이 걸려, 하산에 지장이 많다는 설명이다.

가까이 본 구곡담 계곡

7봉 직벽

중식

 

12시 20분에 출발하여 하산까지 5시간이 걸린다 해도 시간은 충분하니, 하산에 지장이 많다는 설명에는 설득력이 없다. 하지만 봉정암 부근에 있을 지도 모르는 감시원을 피하겠다는 뜻이 감지되니,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12시 20분, 오른쪽에 보이는 가파른 암릉을 기어올라 본 능선으로 진입하니, 안개 속에 8봉이 우뚝하다. 가파른 암릉을 조심조심 내려서서 안부를 지나 8봉으로 오른다.

본 능선 진입루트 - 움푹 파인 암릉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곳

급경사 암릉 하강, 건너편은 8봉 오름

 

12시 51분, 길지만 비교적 완만한 슬랩을 지나 8봉 정상에 오른다. 보라! 우회했던 5봉, 6봉, 7봉의 웅장한 모습이 전모를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그뿐인가? 아름다운 공룡능선이 눈앞에 가까운데, 오른쪽에 보이는 것은 천화대가 분명하다. 가히 비경 중의 비경이다. 자야할 시간에 비를 맞으며 위험구간을 통과하면서 겪었던 모든 고통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다.

8봉 정상으로 이어지는 슬랩

8봉 정상으로 오르는 대원들

 

8봉을 내려서서 갈림길에 이른다. 왼쪽이 9봉을 오른쪽으로 우회하는 가파른 암릉이다. 아쉽지만 직진하여 탈출을 시도한다. 뚜렷한 등산로가 부드럽게 이어진다. 잠시 후, 또 다른 갈림길을 만나, 표지기를 보고 오른쪽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한동안 잘 진행하던 행렬이 갑자기 멈추더니, 되돌아서라는 전달이 온다. 선두는 사라져 모습이 보이지 않고, 길도 끊겼다고 한다.

 9봉 우회로

 

 

갈림길로 되돌아와 상황을 종합한다. 제일 큰 문제는 선두와의 연락두절이다. 어찌된 일인지, 점심식사 후, 가이드대장이 무전기를 모두 회수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곳이 전화 불통지역이라 선두와 연락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가이드대장이 우리들을 찾으러 되돌아 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결국 양쪽 길로 사람을 보내 길을 확인하기로 한다. 계곡 쪽은 후미대장이, 능선 쪽은 건장한 중년대원이 자원해 나선다. 10여분 쯤 지나 계곡 쪽에서 내려오라는 연락이 온다. 대원들은 계곡으로 내려서고, 몇 사람이 남아 능선 쪽의 수색대원을 기다린다. 다시 10여분이 지나 수색대원이 모습을 보이더니 고개를 젓는다. 온통 절벽뿐이라고 한다.

 

앞선 대원들을 따라 잔여대원들이 가파른 사면을 달려 내린다. 건장한 수색대원이 앞서 달린다, “낙석! 낙석!”이라는 소리에 이어, 돌 구르는 소리, 그리고 “어이쿠!”하는 비명소리가 들린다. 머리통만한 돌이 남자대원의 정강이를 후려치고, 옆에 있는 여자대원에게 튀어 상처를 입힌 것이다. 남자대원의 뒷정강이에 뻘겋게 피멍이 들었지만 다행이 뼈는 다치지는 않은 것 같고, 여자대원의 찰과상도 심하지 않다. 잠시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고 절뚝거리며 하산을 계속한다.

 

가파른 사면을 내려서니 물이 마른 계곡이다. 계곡을 따라 내리면 되겠지만 직벽 폭포라도 만나면 큰일이다. 예상한대로 폭포를 세 차례나 만나지만 다행이 물도 없고, 가파르지 않아, 옆으로 우회하여 내려설 수가 있다. 하지만 길 없는 길을 만들어 나가려니 고생이 말이 아니다. “욕 나오네, 욕 나와”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여자대원 한 사람이 발이 미끄러져 나무 등걸에 허리를 강하게 부딪치고, 팔뚝에서 피가 흐른다. 한참 지난 후, 이번에는 산악회대표로 나온 대장이 썩은 나무에 미끄러져, “어이쿠!” 소리와 함께 허리가 결린다며 한동안 일어서지를 못한다.

 

3시 55분 경, 구곡담 계곡에 내려선다. 9봉 갈림길에서 3시간이 지난 후다. 구곡담 맑은 물에 땀을 씻어내고, 족욕(足浴)을 하며, 약 15분 정도 휴식을 취한 후 하산을 시작한다. 아름다운 구곡담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너른 등산로는 길 없는 계곡에 비하면 가히 천당이다. 맑은 물소리, 그리고 이따금씩 들리는 딱따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 바람마저 싱그럽게 불어 더운 줄 모르겠다. 산책하듯 구곡담의 선경을 즐기며 유장하게 걷는다.

휴식 후 하산 시작

구곡담 맑은 물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대원 한 사람이 뛰듯이 다가오더니, 백담사에서 출발하는 막차를 타려면 서둘러야 한다며 지나친다. 막차시간이 언제냐고 묻는다. 모른다는 대답이다. 걸음걸이를 조금 빨리 하지만 뛸 생각은 없다. 여전히 멋진 계곡을 즐기며 걷는다. 한동안 지난 후 다시 발자국소리가 들린다. 산악회에서 대표로 나온 대장이다. 허리가 아픈데도 힘들여 달려온 모양이다. 막차 시간이 언제냐고 물으니, 6시라고 한다. 뒤에 몇 사람이 남았냐고 묻는다. 4사람이라고 한다. 4시 50분, 수렴동 대피소를 지난다. 백담사까지 5Km가 넘는 거리이니, 뛰기 전에는 6시 도착은 불가능하다. 버스를 놓치면 택시를 불러 뒤에 오는 네 사람과 함께 타고 내려갈 생각으로 걸음의 속도를 늦춘다.

수렴동 대피소를 지나고

 

다시 뒤에서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에는 가이드요원이다. 후미와 같이 내려오다 앞서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버스 출발시간을 가능한 늦춰보겠다고 한다. 5시 6분, 백담사 3.9Km를 알리는 이정표를 만나고, 3분 후, 영시암을 지난다. 5시 56분, 백담계곡을 카메라에 담는데, 부상당한 남녀대원과 또 한명의 여자대원이 뛰듯이 달려온다. 이제는 별 수가 없다. 함께 달린다. 6시 12분,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고맙게도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승객 대부분이 우리대원들이고, 일반승객은 2~3명 불과하여, 먼저 온 대원들이 이분들에게 상황을 설명하여 양해를 구하고, 기사양반에게 부탁을 한 모양이다. 여하튼 무척 고맙다. 버스가 용대리로 출발을 한다. 3분이 모자라는 총 17시간의 산행을 마감하는 순간이다.

마지막으로 백담계곡을 카메라에 담고

 

용대리에 도착하여 시원한 맥주부터 찾아 마시고, 황태탕으로 저녁식사를 한다. 7시 산악회버스는 서울로 향한다. 20분이면 탈출이 가능하다고 했던 가이드대장은 많은 사람들이 3시간 동안 계곡에서 고생을 하고, 네 사람의 부상자가 발생했는데도 사과 한 마디 없다. 어짜피 산악회에서 일정액의 보수를 받고 한차례 안내를 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라 책임감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이겠다. 산에서의 안전은 자기 자신만이 지킬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새삼 피부로 느껴진다.

 

 

(2010. 6. 16.)

 

 
Posted by Urim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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