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연과 방화수류정 –공격과 방어가 주목적인 성이 이처럼 아름답다는 것이 이채롭다.
수원 화성은 팔달산, 그리고 그 동쪽의 낮은 구릉과 평지에 쌓은 평산성(平山城)으로 타원 형태를 이루고 있다. 군사적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도록 견고하고 아름답게 쌓은 성이다. 도시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행궁과 ‘十’자로 잘 뻗은 신작로는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한 상업도시를 표방하고 있다. 성 전체의 면적은 371,145㎡, 성 둘레는 5,744km이다.
수원화성 개념도(수원문화재단)
수원 화성은 1963년 대한민국 사적 3호로 지정되고, 1907년 7월에는「화성성역의궤」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다.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 」는 화성의 축성계획, 제도, 법식은 물론,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과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 가공법, 공사일지 등을 상세히 기록한 책이다. (이상 관련자료 발췌)
화성성역의괴(수원박물관)
그리고 4년간의 공사 끝에, 1979년 수원화성이 복원되자. 1997년에는 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다. 이쯤 되면 스스로를 비하하고, 선조들의 업적을 폄하하려고만 하는 사삼들일지라도 수원화성이 우리 조상들이 남긴 위대한 문화유산이란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허물어진 봉돈(수원문화재단)
세계문화유산 돌 표지
최근에 수원화성을 두 차례 다녀왔다. 그 탐방기를 산행기의 형식으로 적어 나가다보니, 그때에 보고 느낀 것들을 제대로 전달 할 수가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화성축성에 관한 자료들이 워낙 방대하고, 사진을 찍어서 전달하고 싶은 곳들이 너무 많아, 몇 날을 고민하다, 화성축성에 관한 자료들을 더 검색해보고,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 내에서 화성을 잘 표현한 사진들을 빌어다, 화성 탐방기를 다시 써본다.
수원 화성(華城)은 낙안읍성, 동래읍성, 해미읍성 등과 같이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 행정 기능을 담당하는 읍성(邑城) 중의 하나로, 종묘와 왕궁이 있는 도성(都城)과 구별된다.
하지만 화성이 다른 지방 읍성들과 다른 것은 다른 지방 읍성들의 경우에는 도시가 먼저 발달하고, 그 도시를 방어하기 위하여 성을 쌓았지만, 화성은 처음부터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正祖)가 국력을 기우려, 철저하게 사전에 계획하고 건설한 계획도시라는 점이다.
정조의 초상
정조는 1752년 영조의 둘째 아들인 장헌세자(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762년 정조의 나이 11세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휘말려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한다. 정조는 울면서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만 영조는 물론이고, 집권세력인 노론들은 정조의 애원을 외면한다.
1776년 왕위에 오른 정조는, 사적으로는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고, 공적으로는 왕실의 위엄을 회복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리는 등 사도세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각종 추숭사업을 펼친다.
1789년 정조는 양주에 있는 사도세자의 능, 영우원(永祐園)을 풍수지리상 최길지(最吉地) 의 명당으로 지목된 수원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개명하고, 수원도읍을 지금의 팔달산 아래로 옮기도록 하는 한편. 수원부로 부르던 고을 명칭을 화성(華城)으로 고쳐 부르게 하는 등 화성(華成) 경영을 구체화하고, 1794년 화성 축조계획을 발표한다.
정조로 부터 화성 성곽설계의 명을 받은 정약용은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1793년 화성건설의 기초가 된 성설(城說)을 만든다. 이에 정조대왕은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을 축성총책임자인 총리대신으로, 그리고 당시 수원 유수인 조심태(趙心泰)를 현장 총감독으로 임명하여,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화성을 완공하여,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추숭사업의 대미를 장식한다.
정약용의 초상(펌)
화성축성의 일등공신인 정약용과 채제공은 모두 규장각 출신의 개혁을 추구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젊은 실학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남인이기 때문에.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노론에 밀려 변변한 관직조차 얻기 힘들었다. 정조는 집권세력인 노론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위해, 이들에게 화성 건축이라는 중요한 일을 맡겨,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노린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궁중비서인 '기기도설'을 하사하여, 정약용으로 하여금 거중기, 녹로, 유형거 등을 비롯한 각종 축성도구들 만들게 하여 축성효율을 높이게 하고, 화성을 건설하면서, 수원 백성들을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한다.
거중기(수원박물관) - 정약용이 만든 기중기. 약 400Kg까지 들어 올릴 수 있다고 한다.
유형거(수원박물관) - 화성 축성에는 일반 수레 100대가 324일 결려 운반하는 짐을 유형거 70대로 154일 만에 운반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우선 사도세자 왕릉이 들어설 자리에 살던 사람들에게 넉넉한 보상금과 이사비용을 주고, 아울러 수원부에 감금된 죄수 전원과 수원부 사람으로서 유배 중에 있는 이들을 풀어 주는가 하면, 수원 백성들의 세금을 탕감해주는 등의 시혜를 베푼다.
이외에도 정조는 임금이 주최하는 연회에 수원백성들을 초대하는가 하면, 각종 공사에 대한 시상, 가난한 백성들을 위한 쌀 배급, 수원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ㆍ무과 별도과거 시행 등의 특혜를 준다.
국가공사에는 강제로 징발된 부역꾼들을 동원했었던 관행을 타파하고, 화성 신도시 건설 때에는 예전과 달리 임금을 지급하면서 일꾼을 모집한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조정 대신들은 재정적 부담으로 인해 백성들을 부역시키거나 승려들을 동원 하자고 건의했지만 정조대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임금을 지불하라고 강력히 하교한다.
그 결과 수원은 물론 전국 각지의 백성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어 신도시 건설과 화성 축성을 차질 없이 진행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오히려 공사가 끝난 뒤 조정에서는 8도의 백성들을 돌려보내는 데 크게 고심할 정도였다고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돼 있다.
수원 화성은 정조대왕의 개혁의지와 지원, 젊은 실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 그리고 수원사람들의 적극저기인 참여로, 당초 10년 계획이었던 화성 축성을 단지 2년 9개월 만에 완성한다. 우리 선조들의 뛰어난 역량의 자랑스러운 산물이다.(이상 관련자료 발췌)
2016년 10월 15일(토)
수원 화성에 많은 관심이 있어서, 오래 전부터 꼭 한번 둘러보아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가까운 곳에 있다 보니, 자꾸 뒤로 미루어져, 좀처럼 뜻을 이루기가 쉽지 않아, 은근히 부담감마저 느껴질 정도다.
오늘은 토요일, 특별한 예정이 없는 날이다. 화성성벽을 일주하고, 행궁 등을 둘러볼 생각으로 집을 나선다. 강남구청역에서 8시 12분 발, 분당선을 타고, 9시 28분에 수원역에 도착하여, 9번 출구로 나온다. 이어 횡단보도를 건넌 후, 북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걷다, 매산시장 앞 정류장에서 35번 버스를 기다린다.
화성성벽 일주도(수원문화재단)-사진 크릭하면 커짐.
수원역
이윽고 도착한 버스를 타고, 팔달문 정류장에서 내려, 인근 상점사람에게, 화성 성벽 길을 걸으려 하는데, 어느 길로 가면 되느냐고 묻자, 길 건너편을 가리키며, 버거킹 집 왼쪽 옆 골목 앞에 서면, 성벽길이 보인다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길 건너 버거킹집이 보이고,
팔달문은 화성의 남쪽 관문으로 화성 4대 관문 중의 하나다. 정조대왕과 당대 국왕들이 현릉원으로 가기 위해 이곳을 통과했다고 한다. 원형이 잘 보존되어 보물 제402호로 지정된 팔달문은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사통팔달’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석축으로 된 무지개문 위에 2층 문루를 세우고, 벽돌로 반원형의 옹성을 쌓아 문을 보호하는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부근의 밀집된 상가와 재래시장 때문에 완전한 팔달문의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팔달문
팔달문 2(펌)
옹성(펌)
알려준 대로 길을 건너, 버거킹 왼쪽 골목입구에 서니, 과연 눈앞에 성벽길이 펼쳐진다. 화성관람매표소에 이르러. 입장료 성인 1,000원이지만, 무료 경로표를 받아들고 검표를 마친 후, 주변을 둘러본다.
성벽길 입구
화성 관람권 가격
화성 미 복원구간
포장이 잘 된 너른 길을 따라 천천히 오르다, 남치(南雉) 안내문을 만난다. 남치는 팔달문과 남포루 사이에, 성벽 밖으로 툭 튀어 나오게 만든 시설로 성벽 가까이로 접근하는 적군을 퇴치하여 성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치(雉)'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자기 몸을 잘 숨기고 주변을 살펴보기 때문에 그 뜻을 따라서 '치성'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화성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10개의 치를 배치했다.
성 안에서 본 남치
밖에서 본 남치(펌)
이어 도로를 건너 남포루(南砲樓)에 이른다. 포루는 적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포(火砲)를 쏠 수 있는 시설로, 치성의 발달된 형태라고 한다. 화성에는 남포루, 서포루, 북포루, 북서포루, 북동포루의 5개의 포루가 있는데, 남포루는 팔달문 주위의 성벽과 화양루를 방위하기 위해 설치했다
도로를 건너고 층계를 올라 남포루로 향한다.
굳게 닫힌 남포루 문
밖에서 본 남포루(펌)
남포루를 지나 돌계단을 따라 오른다. 오른쪽에 도열한 적송들이 싱그럽다. 돌계단을 다 올라, 서남암문(暗門)과 서남포사(西南舖舍)에 이른다.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출입구다.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시설이다. 유사시에는 문을 닫고 주위에 쌓아둔 돌과 흙으로 암문을 메운다고 한다. 화성에는 서남암문, 서암문, 북암문, 동암문의 4개의 암문이 있다.
서남암문과 포사(舖舍)(펌)
용도(甬道-담을 양쪽으로 쌓아서 만든 길)에서 바라본 서남암문과 포사
암문 위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그 안에 집을 지은 것이 포사(舖舍)인데, 포사는, 초소의 일종으로, 성 밖의 위험을 성안으로 알리는 역할을 하는 시설이다. 깃발을 휘두르거나 대포를 쏘아 위급한 상황을 알렸다고 한다. 이처럼 암문 위에 설치한 포사는 서남암문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다.
서남포사(펌)
서남암문에서 팔달산 남쪽 능선에 설치한 용도(甬道) 남쪽 끝 높은 지점에 서남각루(華陽樓)가 있다, 주변을 감시하고, 때로는 지휘소의 역할도 하는 요충지이다. 낮은 지형에 쌓은 성곽의 단점을 커버하기 위해 높은 지점에 각루를 세워 감시기능을 보강한 탁월한 발상이라 하겠다. 화성에는 4개의 각루가 있다.
용도
서남각루(화양루)
서남암문을 뒤로하고 성벽을 따라 서장대로 향하다, 오른쪽에 보이는 3.1운동 기념탑과 대한민국 독립기녑비가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려 잠시 둘러본 후, 다시 성벽 길로 돌아와 서삼치를 카메라에 담고, 서장대 관광안내소가 있는 성 밖으로 나와 성 밖에서 아름다운 성곽을 바라본다.
3.1운동 기념탑
안내문 동판
대한민국 독립기념비
안내문 동판
서삼치 - 서삼치는 서포루(西舖樓)와 서남암문 사이에 있다.
밖에서 본 서삼치(펌)
서쪽 화성 출입구(성밖 서장대 관광안내소)
성 밖에서 본 아름다운 성곽
다시 성안으로 들어와, 서포루(西舖樓-Western Sentry Post)를 살펴본다. 포루는 성곽을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성위에 지은 목조건물로 군사들이 망을 보면서 대기하는 곳으로, 서암문이 적에게 발각되어 공격받는 것에 대비하여만든 것이다. 화성에는 5개의 포루가 있다. 이어 건너편에 있는 세계문화유산 화성 돌 표지를 카메라에 담는다. 이어 효원의 종을 3번 타종하며 소원을 빌고, 서암문을 거쳐, 서장대에 이르러 한동안 머물며 주위를 둘러본다.
서포루(西舖樓) - 서북각루와 서장대 사이에 있다
밖에서 본 서포루(펌)
효원의 종각
효원의 종 안내문
효원의 종 타종안내
안에서 본 서암문
밖에서 본 서암문(펌)
서장대(西將臺)는 팔달산의 정상에 선 망대로 사방 100리가 내려다보인다고 한다. 정조는 직접 이곳에 올라 군사훈련을 지켜보았고 한다.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편액은 정조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장대
안내문
서장대 서쪽, 성벽 가까운 곳에 있는 독특한 모양의 서노대가 눈길을 끈다. 서노대는 성 한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팔각형으로 약 3m 높이의 여장을 쌓아 만든 시설이다. 이곳에 오르면 성 밖의 서쪽이 한눈에 들어와 적으로부터 군사 지휘소를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서노대
안내문
서장대에서 본 북쪽 조망
세계주요도시까지의 거리
서장대에서 주위를 둘러본 후, 10시 44분 계단 길을 걸어내려, 10시 58분, 행궁의 정문인 신풍문 앞에 이른다. 11시부터 시작하는 24반 무예시범을 보기 위해서이다. 30분정도 진행된 무예시범을 본 후, 행궁을 둘러보고, 정조로로 나와 점심식사를 한다. 식사 후, 행궁동 벽화골목, 수원화성박물관 등을 둘러보고, 3시 5분 경, 다시 서장대로 올라와서 성벽걷기를 이어간다.
(2016.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