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루 옆의 침류각

 

동갑내기인 매제가 허리 통증으로 고생을 한다.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스트레칭을 하고, 도산공원에서 매일10Km 걷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가 하면, 주말이면 친구들과 열심히 산에도 다녔는데, 근육을 키우겠다고 무리하게 역기를 든 것이 탈이 난 모양이다. 3개월 전에는 걷지도 못할 정도로 통증이 심했으나, 그동안 꾸준히 치료를 받은 결과, 이제는 많이 좋아졌지만, 등산을 할 정도는 못 되는 터라 많이 답답한 모양이다.

 

전남 장흥 천관산의 억새를 소개한 신문보도를 보고 동생한테서 연락이 온다. 바람도 쏘일 겸, 1박 2일 일정으로 억새구경을 가자는 제안이다. 지리산(智異山), 월출산(月出山), 내장산(內藏山), 내변산(內邊山)과 함께 호남지방의 5대 명산으로 꼽히는 천관산은 억새도 좋지만 빼어난 암릉미와 시원한 조망으로 유명한 산이다. 좋은 곳이기는 하지만 정상 부근의 능선에 무성한 억새를 보러 가기에는 아직 완쾌하지 않은 매제의 건강상태로는 무리이겠다.

 

여러 가지 대안을 궁리하다. 문득 낙동정맥을 하면서 지났던 간월재에 승용차 1대가 정차해 있던 기억을 떠올린다. 간월재까지 승용차로 올라가서, 신불산이나 간월산을 오르며 억새 군락지를 산책 한다면 무리 없는 기분 전환이 가능하겠다.

 

2010년 10월 12일(화)
7시 40분 경 매제가 차를 몰고 집으로 온다. 일행은 동생네 부부와 우리 부부 그리고 누이, 모두 5명이다. 이들 다섯 사람의 나이를 합쳐보니 344살이나 된다. 가히 늙은이 부대의 나들이라 하겠다. 장거리 여행인데, 뒷좌석에 3사람이 앉기가 좁지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모두가 날씬한 체격이라 4사람이라도 앉아서 갈 수 있겠다. 모처럼의 나들이가 무척 즐거운 모양이다. 뒷좌석에서는 웃음소리가 그치질 않는다.

 

여주휴게소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네 사람은 소고기국밥, 나는 해물순두부다. 식후의 커피는 아메리카노 3잔을 사서, 휴게소 물 컵을 빌어, 다섯 잔으로 나눠 마신다. 그래도 양이 넉넉하다. 다음에는 2잔만 사기로 하고, 혹시 부족하다 싶으면 리필을 청하기로 한다. 식사 후에는 동생이 운전대를 잡는다. 나는 보험에 가입된 차가 아니라 운전을 할 수가 없다는 주장이다. 꽤나 고지식한 사람들이다.

 

차는 여주를 지나 중부내륙고속도로로 들어선다. 내비게이션에 밀양IC를 목적지로 입력을 하고 똑똑이(집사람이 내비게이션에 붙여준 별명)가 유도하는 대로 달리다 보니, 길을 잃을 걱정도 없다. 하지만 평소에 운전도 많이 하지 않고, 차에 내비게이션도 없는 나는, 김천분기점에 이르러 그만 헛점을 드러내고 만다. 똑똑이는 우회전을 하여 부산-대전 방향으로 진입하라고 지시를 하는데, 대구에서 55번 고속도로로 바꾸어 타야한다는 생각에만 집착한 나는, 내비게이션을 어찌 믿겠냐며, 동생에게 직진하라고 지시를 한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교통 표지판이 이상하다. 대구는 보이지 않고, 성주, 창원만 보인다. 그제야 잘못 됐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기야 45번 중부내륙고속도로를 계속 달려, 창녕에서 24번 국도로 갈아타고, 밀양으로 들어가서 안 될 것도 없겠지만, 이미 목적지를 밀양IC로 입력하라고 지시를 한 터라,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제는 똑똑이 말을 잘 듣겠다고 엄숙하게 선서를 한 후, 똑똑이가 지시하는 대로 남김천에서 내려, 4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 왜관에서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한다.

 

똑똑이 말을 안 듣고, 고집을 부리다 30분이나 헤맸다고 집사람이 핀잔을 준다. 고소한 모양이다. 4번 국도가 경부고속도로와 나란히 달리는 것을 감안하면, 손해 본 시간은 고작 10분 정도일 터인데도, 계속 30분이라고 우긴다. 핏줄은 속일 수 없는 것인가? 여동생이 내편을 들자, 비로소 집사람도 웃으며 승복한다.

 

밀양IC가 가까워지자, 어제 예약했던 교동의 한정식 집 ‘열두 대문’에 전화를 한다. 일성 손씨의 종갓집에서 운영하는 한정식 집이다. 식사는 25,000원에서 60,000원까지 다양하고, 예약을 해야 식사를 할 수 있는 전통 한정식집이다. 우리는 점심이라 25,000원짜리를 예약했더니, 상 차리는 시간을 감안하여 도착 20분 전 쯤에 연락을 달라고 한다. 똑똑이의 도움으로 12시 40분 경 열두 대문 집에 도착한다.

열두 대문

밀양 교동 손씨 고가 안내문

 

고색창연한 고가의 대문을 들어선다. 아주머니 한분이 뛰어나와 우리들을 夢孟軒 이란 현판이 걸린 사랑채로 안내를 한다. 조금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손님은 우리들뿐이다. 깔끔하게 정돈된 방에 조촐한 상을 차려 놓았다. 화사한 자수평풍이 예사롭지 않고, 밥그릇, 수저, 술잔은 놋 제품이다. 이태리의 피자, 일본의 스시, 인도의 카레와 같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음식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김치, 불고기, 심지어는 떡볶이까지 거론되지만, 아름다운 식기와 컬러풀한 음식, 향기로운 냄새가 담긴 밥상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음식이라고 지적한 한 외국인의 말을 생각나게 하는 상차림이다.

사랑채, 몽맹헌

상차림

 

백세주를 반주로, 식사를 한다. 음식이 정갈하고 간이 잘 맞는다. 음식 수발하는 아주머니가 여러 차례 더운 음식을 날라 온다. 마지막으로 추어탕이 국으로, 그리고 밥알이 동동 뜬 식혜가 나온다. 양도 적은 게 아니다. 오랜만에 포식을 한 기분이다. 아주머니에게 25,000원 짜리 상도 이렇게 훌륭한데, 60,000원짜리 상은 어떤 것이냐고 묻는다. 접대 손님으로 일본 사람들이 오는데 그들은 한상에서 함께 먹는 것을 꺼려하여, 각상을 차려주고, 전복 등 그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추가하여 서브하고 60,000원을 받는다고 한다.

 

식사를 마치고 집 구경을 한다. 건너편 방의 자수병풍이 눈길을 끌고, 이집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 이수성 총리의 사진이 보인다. 아주머니는 보통 하루에 4~5팀의 예약 손님을 받는다고 알려준다. 진짜 대문이 12개냐고 묻자, 그렇다는 대답이다. 99칸 집이라고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102칸에, 대문이 12개인데, 지금은 9개 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당당하고 기품이 있는 집이지만 많이 쇠락한 상태다.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61호 지정된 곳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잘 보존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건넌방의 또 다른 자수병풍

안채로 통하는 문

안채 - 마나님이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사신다고 한다.

가묘(家廟) - 손씨 집안의 사당

 

열두 대문을 나와 그 뒤에 있는 밀양 향교를 잠시 둘러본다. 밀양향교는 경주, 진주향교와 함께 영남지방을 대표하는 큰 향교로 건물배치가 다른 곳과 달리 특이한데, 정문인 풍화루를 비롯한 부속건물들이 온전히 남아있다고 한다. 문이 잠겨 있어 향교 내부는 구경하지 못하고 가까이에 있는 영남루로 향한다.

풍화루

안내문

 

낙동강 지류인 밀양강변 절벽 위에 위치한 영남루는 경관이 수려하고, 특이한 내부구조로 볼거리가 다양하여,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명루로 일컬어진다. 내부에는 당대명필과 대 문장가들의 시문현판들이 즐비하다. 그중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와 영남루(嶺南樓) 현판은 영남루를 중수한 이인재부사의 첫째아들과 둘째아들인 이증석(11세)과 이현석(7세)의 솜씨라고 하니 놀랍다. (펌)

영남루에서 내려다 본 밀양강

영남루 1

영남루 2

영남루 현판

영남제일루 현판

 

영남루 인근에는 단군을 모신 천진궁, 아랑사당, 돌에 자연으로 꽃무늬가 새겨진 석화가 함께 있고, 부근에 박시춘의 옛집, 밀양시립박물관, 무봉사 등이 모여 있어 이 부근이 밀양의 최고 관광지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지금 시각이 3시에 가깝다. 박시춘의 옛집을 잠시 둘러보고, 조금 떨어져 있는 표충비와 사명대사생가의 방문도 생략한 채, 서둘러 만어사로 향한다.

만덕문과 천진궁

안내판

밀양 아리랑 노래비

박시춘의 옛집

안내문

 

만어사 가는 길은 이제 완전히 똑똑이에게 맡긴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지도를 보면 만어사는 영남루 건너편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똑똑이는 고속도로에 오르더니 사리원을 지나 북상하여 만어사로 접근한다.  똑독하기는 커녕, 고속도로만 좋아하는 놈인가보다. 돌아갈 때는 똑똑이를 무시하고, 지도따라 가기로한다.

 

만어사에는 가락국시대 때 수로왕이 창건했다는 전설이 있다. 양산에 있는 옥지(玉池)라는 연못에 성질이 사악한 독룡 한 마리와 다섯 나찰녀가 사귀면서 온갖 행패를 부리자, 가락국 수로왕이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여 이들에게 불법의 오계를 받게 하였는데, 이때 동해의 수많은 물고기와 용들이 불법의 감화를 받아 이 산중으로 모여들어 돌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만어사 기슭의 수많은 경석들은 당시 물고기 만 마리가 돌로 변한 것이라고 하고, 미륵전 안에 모셔진 어산불영경석은 용왕의 아들이라고 한다. (펌)

만어사 어산불영경석

만어사 어산불영 안내

만어사에서 바라본 조망, 만어사 운해로 유명하다

보물 제466호인 삼층석탑과 대웅전

미륵전

미륵전 안에 모셔진 경석

운해와 경석 안내판

 

약 30분 동안 만어사를 둘러본 후,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사양하고, 왔던 길과는 반대편 산길을 택해 단장면 쪽으로 내려서서, 얼음골과 호박소로 향한다. 가파른 비포장도로가 구불구불 이어진다. 도로변의 잡목가지가 차창에 부딪친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이라 마주 올라오는 차라도 있으면 큰일이겠다. 이런 길을 한동안 달려 고도가 낮아지자, 이번에는 논 사이로 이어지는 여러 갈래의 시멘트도로를 만나게 된다. 어림짐작으로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두 어 차례 인근주민에게 길을 물어 겨우 24번국도로 들어서니, 어느덧 5시가 가까운 시각이다. 거리는 짧을지 모르지만 시간은 삼랑진으로 돌 때와 비슷하게 걸린 셈이다. 비로소 똑독이가 우회한 이유를 알겠다.

 

요즈음은 5시 반이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이 시각에 얼음골과 호박소 두 곳을 모두 둘러보는 것은 무리다. 얼음골은 내일 아침, 간월재 가는 길에 둘러보기로 하고 호박소로 향한다. 5시가 조금 넘어 호박소 입구에 접근하니,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도로를 막아 놓았다. 할 수 없이, 도로 변에 차를 세우고, 주차장을 통과하여, 매점에서 물어보니, 5시에 주차장 입구를 닫는다는 이야기이다.

 

호박소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오른다. 왼쪽 대나무 숲 쪽에 백운산, 가지산 등산로 입구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백련암을 지나, 이윽고 밀양 팔경중의 하나인 호박소에 이른다. 물들기 시작하는 단풍과 어우러진 풍광이 과연 절경이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 가까이 있는 구룡폭포와 오천평반석의 구경은 포기한 채, 차로 돌아온다.

호박소 입구

호박소

시례호박소 안내판

 

해질 무렵, 마음이 가장 고요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표충사 부근에 숙소를 정하기 위해 전화를 건다. 서울에서 오늘밤의 숙박지 후보로 두 곳을 정하고 내려왔다. 한 곳은 “물안개 피는 마을”이고 다른 한 곳은 “알프스 관광펜션”이다. 물안개 피는 마을은 침대방과 거실로 된 15평짜리 독채가 100,000원, 알프스 관광펜션은 20평짜리 온돌방이 3인 기준 110,000원에, 추가인원 1인당 10,000씩 추가하고 VAT가 별도라고 한다. 침대방과 거실이 구분 된 곳은 방에서 잘 사람과 거실에서 잘 사람을 나누기가 곤란하다. 따라서 큰 온돌방 하나가 좋겠는데, 가격이 문제다.

 

앞프스 관광펜션에 먼저 전화를 걸어, 단도직입적으로 흥정을 한다. ‘5사람이 지금 밀양에 내려와 있다. 10만원에 20평짜리 온돌방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대답은 OK다. 이제 숙소도 정했으니 오늘 일정은 대강 끝난 셈이다. 서울에서 미리 조사를 해온 ‘행랑채’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숙소를 찾아 들면 된다. 길가에서 얼음골 사과를 파는 곳이 여러 곳 보인다. 그 중 한 곳에서 차를 세우고 사과 맛을 본다. 시원한 것이 맛이 좋다. 만 원짜리 한 무더기를 사니, 커다란 사과가 9개나 된다. 이윽고 다시 24번국도로 들어서서, 밀양을 향해 달린다. 6시 경에, 표충사로 들어가는 1077번 도로 입구, 오른쪽에 있는 행랑채에 도착한다.

행랑채

 

행랑채는 찻집과 식당을 함께 운영한다고 들었는데 와서 보니 펜션까지 있다. 식당을 운영하는 솜씨를 보면 펜션도 남다른 특색이 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행랑채의 메뉴는 심플하다. 흑미 비빔밥과 수제비, 그리고 고추전과 감자전이 전부다. 옛 시골집을 연상케 하는 투박한 인테리어가 인상적이다. 수제비 5인분, 고추전과 맥주 2병을 주문한다. 고추전이 나온다. 납작한 도기 접시에 담긴 고추전이 연꽃처럼 예쁘다. 얇게 부친 고추전이 입안에서 바삭거리고, 맵싸한 것이 입맛을 돋운다. 고추전 맛에 반해, 감자전은 어떤 맛일까? 감자전을 추가한다.

 

식사로 흑미밥과 수제비가 나온다. 흑미밥은 생각보다 보드랍고, 수제비는 시원하다. 식사 중에 추가로 주문한 감자전이 서브된다. 빈대떡처럼 도톰하게 부쳤다. 한입 베어 무니 입안에 감자향이 가득하다. 흑미밥과 수제비를 모두 비우니 만복이 된다. 감자전은 세 덩어리 중 한 개만 나누어 맛을 보고 나머지는 싸 달라고 부탁을 한다. 흑미 비빕밥 7,000원, 수제비 6,000원, 고추전, 감자전은 각각 10,000원이다. 특색 있는 음식으로 포식을 하고 우리가 지불한 식대는 맥주 값을 포함하여 모두 56,000원이다. 계산을 하면서 카운터에 있는 명함을 집어보니, 뒷면에 아래와 같은 글이 적혀있다.

 

나의 명상

 

나는 내가 좋다.
나는 날마다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
나는 오늘이 일생을 통해서 가장 좋은날이다.

 

누구의 말이라는 것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행랑채 주인의 말인 모양이다. 식사를 마치고 똑똑이의 안내로 7시가 조금 넘어 숙소에 도착한다. 단장천 가에 새로 지은 펜션이다. 늦게 연락을 해서인지, 관리실의 아주머니가 안내한 숙소에 들어가 보니, 청소상태가 불량하고, 옷걸이 등 있어야할 비품들이 보이질 않는다. 아주머니에게 이야기를 하자, 아주머니는 옆채의 비품을 가져다주며, 학생들이 머물다 가면 남아 나는 것이 없다고 불평을 한다.

독특한 천장구조

알프스 관광펜션의 핀란드식 건물

우리가 묵은 핀란드 E 동

 

우리일행이 여자 셋에, 남자가 둘, 이렇게 다섯인데, 화장실이 한 개라 여러모로 불편하여, 아주머니의 배려로 남자들은 비어있는 옆채의 화장실을 이용하기로 한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따듯한 온돌에 누워 한일축구중계방송을 본다. 등은 따듯한데, 원통형으로 생긴 높은 천장의 통풍구로 온기가 빠지는지, 실내공기는 덥지가 않고 쾌적하다. 연속방송극을 보느라고 11시가 넘어서야 겨우 소등을 한다.


 

(2010.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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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Urim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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