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수정에서 본 매봉산>

올 겨울은 가뭄이 심해 서울에서는 눈다운 눈 한번 구경도 못하고, 겨울을 날 것 같다. 전국적으로도 예년 평균 강설량에는 훨씬 못 미치는 눈이 내렸을 뿐이다. 여름의 게릴라 성 폭우처럼, 울산이나, 부산 같은 지역에는 수십 년만의 폭설이 내리기도 하고, 호남지역에도 상당히 많은 눈이 내렸다고는 하지만 정작 눈의 고장, 강원도에는 예년에 비해 눈이 인색한 편이다.

 

지난 1월에 산행한 고루포기산은 눈과 바람으로 유명한 산인데도, 등산로에는 먼지가 풀풀 날 릴 정도로 가물었고, 지난주에 산행한 함백산도 심설로 유명한 산이지만, 습기가 하나도 없이 푸석푸석하게 얼은 이른바 "죽은 눈"을 밟고, 주위의 설산들을 조망하는 것으로 만족했을 뿐이다.

 

우리 3차대 산행이 1년 가까이 이어짐에 따라. 이제 남은 구간도 대 여섯 구간에 불과하다. 그 동안의 산행으로 어느 정도 체력에 자신이 붙었나보다. 모두들 아무도 밟지 않은 심설에, 길을 내며, 산행을 해 보고 싶어한다. "러셀 드니로"가 대원들의 이런 바람을 가장 예각 적으로 잘 대변해 준다.

 

선두 러셀로 강해진 체력을 테스트하고, 앞장 서 길을 내어, 나머지 대원들에게 기여하고자하는 바램이 무산이 되는 게 아닌가 하여 드니로 님은 무척 초조하다. 하지만 꿈은 이루어지는 법. 지난 2월 16일, 수요일, 강원지역에 폭설이 내려 산간 지역의 교통이 통제되고, 이 눈은 주말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된다는 보도에 드니로 님을 비롯한 모든 대원들은 이번 토요일 설산 산행을 설렘 속에서 기다린다.

 

2005년 2월 19일(토).
양재역 지하철역을 벗어난다. 아직 사방이 어두운데 마주 오는 여인이 우산을 받고 지나간다. 비가 오나? 얼굴을 들고, 어두운 하늘을 올려본다. 차가운 게 한 두 방울 얼굴에 떨어진다. 비가 내려 모처럼 내린 눈이 녹으면 어쩌나 걱정이 앞선다.

 

생각보다 서초 구민회관 앞에 모인 대원수가 많지를 않다, 버스가 도착하고 차에 오른다. 자리가 반 넘어 비어있다. 다행히 마지막 경유지 복정역에서 많은 대원들이 차에 오른다. 오늘은 산악회 인솔 대장도 보이질 않는다. 버스가 고속도로를 달리는데도 차창의 수증기가 얼지 않는다. 수증기를 닦아내며 창 밖을 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 속으로 빠져든다.

 

토요 당일 백두대간 종주 49회차 산행은 백두대간 제39소구간을 간다. 산행코스는 『싸리재(1,268)-금대봉(1,418.1)-쑤이밭령(1,100)-비단령(1,279)-고랭지채소밭-매봉산(1,303.1)-피재(920)-노루메기(961)-새목이(850)-건의령(840)』까지 마루금을 타고 상사미교로 하산한다. 마루금 도상거리 약 14Km, 날머리 약 0.5Km, 산악회가 제시하는 소요시간은 약 6시간이다.

 

버스가 중앙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치악 휴게소에 접근할 때야 잠이 깬다. 김 동근 선두대장이 마이크를 잡고, 치악 휴게소에서 20분간 정차한다고 알려준다. 정차시간이 평소 보다 10분 짧아졌다. 설산 산행을 위한 시간 확보인 모양이다. 스패츠를 들고 내려, 쉬는 동안, 등산화 끈을 단단히 매고 스패츠를 착용한다.

 

버스가 다시 출발하고, 김 대장이 오늘 산행에 대한 설명을 한다. 산악회에서는 오늘 여러 곳을 산행하기 때문에, 인솔 대장들이 모자라, 우리 3차대는 산악회 인솔대장 없이, 자율 산행을 한다. 어제 산악회로부터 오늘 산행지역에는 무릎 정도 깊이의 눈이 내렸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설산 산행에 대비하여, 치악 휴게소에서 운영위원들이 모여 오늘 산행에 관하여 논의한 바 있으니, 이에 협조해 주기 바란다.

 

1. 1차 때의 경험에 의하면, 무릎 높이 이상으로 눈이 쌓였을 때, 평소 4시간 정도 걸리던 거리에서 11시간 정도가 소요된 적도 있다. 따라서 오늘 코스, 싸리재에서 건의령까지 산행은 불가능하다.

 

2. 싸리재에서 피재까지 산행하자는 의견과, 그 것도 무리이니, 피재에서 건의령까지만 등반하자는 양론이 있었지만, 어느 쪽을 택할지는 싸리재에 도착하여 상황을 본 후 최종 결정한다.

 

3. 오늘 산행에 참여한 29인을 3개조로 나눈다. 선두그룹은 체력이 좋은 3차 대원 10여명으로 구성하여, 이들은 설피를 신고, 교대로 러셀을 하면서 길을 튼다. 중위그룹 역시 설피를 신고, 선두그룹을 따른다. 여성대원과 일반 대원들이 후미그룹을 형성한다. 각 그룹에 인솔자를 지명하고, 이들은 산행 중 수시로 무전 연락을 취하여 안전산행을 도모한다.

 

이어서 김 대장은 심설 산행의 어려움을 설명한다. 심설 산행에서 어려운 것은 러셀이 아니라 길 찾기란다. 사방이 눈으로 덮여, 발자국은 전혀 보이지 않고, 나뭇가지에 매어 놓은 산행 리본도 눈이 쌓여 보이질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나침반도 크게 도움이 못 된다. 길이 애매한 곳에서는 선두 3사람이 10시, 12시, 2시의 3 방향으로 각각 진행하면서, 나뭇가지 눈을 털어, 산행리본을 찾아야한다. 그러니 시간이 많이 걸린다. 오늘 비상 식량을 준비하지 않은 대원들은 준비한 대원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받으라고 지시한다.

 

몇 사람의 중간 탈출은 불가능하고, 전체가 같이 움직여야한다고 강조한다. 중위그룹이나 후미그룹은 절대로 앞사람의 발자국을 벗어나, 좌우로 이탈해서는 안 된다. 용변을 봐야 할 경우도 그 자리에서 봐야한다. 좌우로 이탈했다가 잘못, 맹지에라도 들어서면 절벽으로 추락할 가능성이 있다. 버스 안이 일 순 조용해진다. 대원들이 겁을 먹은 거다.

 

버스는 눈발을 헤치며 38번 국도로 접어든다. 주변이 온통 하얗다. 설국(雪國)에 들어선 느낌이다. 날씨는 따듯하여 눈이 도로 위에 떨어지자 바로 녹아, 더 이상 쌓이지는 않는다. 도로 곳곳에서 접촉사고를 일이 킨 차들이 멈춰서 있다. 버스가 석향을 지날 무렵 눈은 그친다. 고한에 접근하면서부터 길가에 쌓인 눈이 점점 많아진다.


<눈내리는 38번 국도>


<설국>

 

싸리재로 통하는 도로는 눈 때문에 차량 통행이 봉쇄되어 버스가 오를 수 없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버스는 38번 국도를 계속 달려, 터널을 지나 10시 48분 함백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입구에 정차한다. 김 대장과 몇몇 요원들이 버스에서 내려, 싸리재로 오를 가능성을 찾아보지만, 결국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피재로 향하기로 한다.


<눈에 파 묻힌 등산로 입구에서 등반 가능성 확인>

 

11시 9분 버스는 피재에 도착한다. 사방이 온통 하얗다. 나뭇가지들이 무겁게 눈을 이고 축축 늘어져 있다. 대원들이 하차하여 산행준비를 한다. 산악회에서는 2가지 종류의 설피를 20여 벌 정도 준비하고 있다. 노르웨이 제 설피는 그럴 듯 하지만 꽤 크다. 이것을 신고 눈 위를 걸으려면 상당한 체력이 필요하겠다. 김 대장님과 드니로 님이 노르웨이 제 설피를 착용한다. 다른 하나는 등나무로 만든 재래식 우리의 설피다. 작고 가벼워 큰 부담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서둘러 착용하는 대원들도 있고, 상황을 보아 착용하려고 목에 걸고 진행하는 요원들도 있다.


<피재 - 벤치에 쌓인 눈으로 적설량이 가늠된다.>


<우리나라 설피>


<노르웨이제 설피>

11시 15분 경 피재에서 오른 쪽 삼수정(三水亭)이 서 있는 사면을 따라 산행을 시작한다. 피재는 삼수령(三水嶺)이라고도 불리 운다. 3강의 발원지이다. 이를 기념하는 정자인 모양이다. 하늘에서 이곳에 떨어진 빗방울 가족이 한강, 낙동강, 오십천강으로 각각 헤어졌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삼수정>

 

무릎까지 잠기는 눈을 헤치고 삼수정 위에 선다. 시커먼 하늘 아래 매봉산과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대간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삼수정에서 내려서서 북동쪽으로 떨어지는 등산로를 걷는다. 러셀을 한 눈이지만 설피를 신지 않은 발은 곳곳에서 무릎까지 푹푹 빠진다. 주위의 소나무들은 나뭇가지들이 눈을 이고 무겁게 늘어져 있고, 앙상한 나뭇가지가 눈에 덮인 참나무들은 상고대를 닮았다. 선두가 방향을 잃고 헤멘다. 두 사람이 반대 방향으로 흩어져 산행리본을 찾는다. 이윽고 길을 찾아 일행이 편대를 이루어 진행한다.


<눈꽃 속으로>

 

11시 35분 임도로 내려선다. 노루메기인 모양이다. 임도 주변의 나무들이 눈을 이고 아득히 도열해 있다. 이 나무들이 참나무나 소나무가 아닌 자작나무들이라면, 시베리아 벌판을 가로지르는 도로라고 착각할 정도로 온통 주위가 하얗다. 사진 찍기가 좋은 곳인데 내 뒤로 대원들은 몇 사람 보이지 않는다. 뭐가 그리 바쁜지 모두 달리는 게 몸에 배었나 보다.


<눈 덮인 임도>

등산로는 임도를 버리고 다시 숲을 향한다. 러셀로 다져진 등산로가 가벼운 업 다운을 반복한다. 나무 꼭대기에만 잎이 달린 미끈한 소나무가 눈을 이고 있다. 아름답다. 경사가 급한 비탈길에서는 그대로 주저앉아 엉덩이 썰매를 타고 내린다. 버스에서 잔뜩 겁먹던 때와는 달리 모두 동심으로 돌아가 마냥 즐거운 모양이다. 쌀포대나, 비료포대가 있으면 더 빨리 달릴텐데 아쉽다.


<설경 1>


<설경 2 - 우정>


<설경 3 - 은영>


<엉덩이 썰매>

눈 터널을 지난다. 뒤에 오는 여자대원이 가만히 탄식한다. "별천지가 따로 없네요." 길이 오르막으로 이어진다. 아마도 951m 봉을 오르나 보다. 왼쪽으로 싸리나무인지 눈 덮인 앙상한 가지가 사이로 하얀 눈을 이고 있는 먼 산이 빼 꼼이 보인다.


<별천지가 따로 없네요.>

 

다시 내리막을 거쳐 안부를 지난다. 잡목지대들이 눈을 하얗게 쓰고 있다. 등산로는 944.9m봉을 향해 가파르게 이어지고, 이번에는 오른 쪽으로 웅장한 산세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나뭇가지에 리본들이 어지럽다. 아마도 944.9m봉을 지나나보다. 길은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잡목 숲길>

 

1시 20분 경 안부에 내려서서, 김 대장을 포함한 일행들이 모두 모여 점심을 먹는다. 설피를 신지 않고, 재래식 우리나라 설피를 목에 건 채, 눈길을 달린 3명의 최선두는 무전기도 갖고 있지 않아, 교신도 불가능하여, 이들의 현재 위치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김 대장은 이들이 남긴 발자국을 따라왔기 때문에 이들이 정상적인 코스로 산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점심을 마친 대원들이 선두대장을 따라 하나 둘 출발한다.

 

1시 50분 점심을 마친 나는 천천히 일행을 따라 가파른 비탈길을 오른다. 960.3m 봉은 언제 지난지도 모르게 지난다. 2시 34분 공터 이정표를 지나고, 이어서 하얗게 눈을 이고 있는 무덤을 지난다. 왼쪽에서 바람이 거세게 불어 와, 눈보라를 일으킨다. 길은 능선으로 올라서고, 눈보라는 더욱 매서워진다. 볼을 때리는 바람이 따갑다. 시야가 확 트인다. 앞으로 가덕산이 보이고, 35번 국도를 포함하여 저 아래 분지가 온통 하얗다. 분지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거세고, 눈보라가 사나워, 서서 사진을 찍기가 어려울 정도다.


<공터를 지나는 대원들>


<날씨는 활짝개어 하늘이 파랗다>


<공터 이정표>

 


<바람골의 무덤 1 기>


<눈 속의 가덕산과 35번 국도>

2시 52분 건의령에 도착한다. 건의령은 몰아치는 눈보라로 시베리아 벌판이다. 임도를 건너 촛대봉 쪽으로 오르던 앞선 대원들이 되돌아 내려온다. 김 대장이 거센 눈보라를 뚫고 버스를 찾아 왼쪽 마을 쪽으로 향한다. 나머지 대원들은 눈보라에 휘둘리며 건의령에서 대기한다. 김 대장에게서 무선 연락이 오지만 , 무슨 이야기인지 감 잡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이윽고 김 대장이 다시 건의령에 모습을 나타내고, 우리들은 김 대장을 따라 눈보라를 거슬러, 상사미동 쪽으로 임도를 따라 내려온다. 35번 도로를 타고 내려오는 버스가 저 아래 보인다. 대원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건의령의 눈보라 - 우정>

 

3시 15분 경 버스에 도착한다. 통상 2시간에서 2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약5Km의 이 구간에서 4시간 정도를 소요한 셈이다. 비교적 짧은 산행이지만, 김 선두대장을 비롯한 운영위원들의 현명한 판단에 의해, 무리하지 않고, 눈의 고장, 태백에서 심설을 한껏 즐긴 행복한 산행 이였다고 생각한다. 설피를 신지 않은 최선두는 1시 30분 경에 하산했다고 한다.

 

버스는 3시 30분 경, 고기 잘한다는 집을 찾아 태백시로 향한다. 물어 물어, 태백시 한전 부근의 정육점에서 운영하는 실비 집을 찾았으나 만원 사례, 고기 냄새만 맡고, 고픈 배를 안고 버스로 되돌아온다.

 

귀로에 이번에도 박달령에 들러, 묵채밥을 주문하나, 먼저 도착한 선객들이 많아, 밥은 다 떨어지고 묵만 남았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묵으로 배를 채우고, 서울로 향한다. 버스는 8시 조금 지나 서울에 도착한다.

 


(2005. 2. 20.)

Posted by Urim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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