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에서 당겨 찍은 향로봉>
2005년 3월 11일(금)
오늘은 무박으로 진부령에 간다. 산행 후에는 진부령에서 대간 종주 수료식도 있을 예정이다. 대간 종주를 마치려면 아직도 몇 구간이 남아 있는데도, 마지막 구간을 앞당겨 산행하는 것은 4월 이후는 이 구간의 신선봉 출입이 통제되기 때문이란다.
날씨가 요상하다. 한 겨울 내내 가물더니, 3월 들어 영동지방에 폭설이 내려, 지난 주 산행도 마루금 5Km 정도만을 걷고, 비상탈출 하게 하더니, 오늘도 영동지방에는 아침부터 눈이 내리고, 산행 들머리, 미시령은 차량통행이 통제되고 있다는 보도다. 기온도 뚝 떨어지고, 바람도 강하다. 하지만 산악회는 예정된 산행을 강행한다.
밤 11시5분 경 서초 구민회관 앞에 도착한다. 다른 산악회 버스를 기다리는 산꾼들이 몇 명 보일 뿐 우리대원 들은 보이지가 않는다. 날씨가 사나워서인지, 평상시와는 달리, 도로변에 줄지어 서 있던 산악회 버스들도 눈에 띄지 않는다. 산행계획이 취소된 건가? 불안한 마음으로 조금 더 기다려본다. 이윽고 대원들이 한 둘 모이기 시작한다.
술이나 안주, 그리고 떡과 과일을 준비한 대원들이 많다. 대간 종주 수료식을 위한 준비다. 전체에 기여(寄與)하겠다는 개개인들의 이러한 생각이 우리 3차대의 강점이다. 선두는 선두대로, 후미는 후미대로, 전체 대원들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 하여 기여하겠다는 정신, 바로 이런 정신이, 대간 종주라는 대장정을 사고 없이, 즐겁게 마칠 수 있는 힘이 되고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이 무척 춥게 느껴진다. 바람도 차다. 오늘 산행 구간은 심설과 강풍으로 유명한 곳이다. 한 겨울 쌓인 눈도 부족하여, 이 시간에도 눈이 내린다고 하니, 산행이 가능할 지 걱정이 태산이다.
복정역에서 대원들이 버스에 오른다. 수료식이 예정되어서인지 꾸준히 참여했던 대원들은 거의 모두 참여하고, 일반 대원들도 합세하여, 오늘의 산행 인원은 3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산악회 대표인 대빵 님이 마이크를 잡고, 힘든 산행이 될 것 같으니, 눈을 좀 부치라고 권한다. 구체 산행계획은 남설악 휴게소에 도착한 후 알려주겠다고 한다.
다른 산악회에서는 대표를 흔히 회장님으로 호칭하나, 이곳 산악회에서는 그냥 대장이라고 부른다. 다른 인솔 대장들과 구분이 없다. 하지만 애칭이 "대빵"이다. 어원이 좀 수상하기는 하지 만, 대빵은 "우두머리"라는 의미이니, 썩 잘 어울리는 애칭이라 하겠다.
버스는 크린턴 휴게소에서 잠시 멈춘 후, 설악을 향해 달린다. 차창 밖으로는 눈이 내린 흔적이 없다. 3시가 못돼 남설악 휴게소에 도착한다. 넓은 주차장에는 차가 한대도 보이지 않는다. 대빵 님은 이곳에서 스패츠 착용 등 심설 산행 준비를 모두 마치라고 당부한다. 30분간 정차한 버스는 다시 46번 국도를 타고 북상한다. 도로변은 잔설이 덮여 있고, 길은 얼어 빙판이다. 대빵 님이 마이크를 잡고 오늘 산행에 대하여 설명한다.
"오늘 산행을 앞두고 폭설이 내려, 여러 가지 대안을 생각해 봤습니다. 만약 미시령의 차량 통행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용대동에서 하차하겠습니다. 용대리에서 계곡을 따라 소간령에 이르고, 마장터를 지나 대간령(750m)에 오릅니다. 이 곳에서 마산(1.051.9m)을 거쳐 진부령(529m)으로 하산합니다. 용대리에서 대간령까지는 경치가 좋은 곳이라 저는 백여 차례나 이 곳을 올랐습니다. 눈감고도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정상적인 상황이면 2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3시 35분 경 버스는 용대동 교통안내소 앞에 도착한다. 경찰 백차가 한대 서 있다. 56변 국도 변에 미시령 차량 통제 팻말이 세워져 있고, 미시령 진입로에는 차폐물이 설치돼 있다. 대빵 님이 백차로 접근하여, 근무 중인 경찰관과 협의를 한다. 시간이 걸린다. 서울로 되돌아가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미시령 전면통제팻말>
<근무 중인 경찰관>
이윽고 대빵 님이 버스로 되돌아온다. 차량통행은 불가능하고, 간신히 대원들 통행만 양해를 받았다고 한다. 하차하여 설피를 가지고, 산행을 시작하자고 한다. 3시 40분 경 대원들은 헤드랜턴을 밝히고, 경찰관의 조심하라는 인사말을 뒤로하고 미시령 고개를 향한다. 도로에는 눈이 많지는 않지만, 내린 눈은 기온이 낮아 얼어있다.
아직 설피는 신지 않고, 얼은 눈을 밟으며 걷는다. 얼은 눈 밟히는 소리의 표현이 어렵다. 내 귀에는 "사박사박" 하는 소리같이 들린다. 어느 여자대원은 얼어도 여전히 "뽀드득 뽀드득" 소리로들린다고 한다. 왼 편 마을 쪽에서 컹컹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생각보다 날씨는 춥지 않고, 바람도 없다. 하늘에는 별빛도 없다.
앞쪽에서 정지하라는 신호가 온다. 도로를 따라 너무 올라온 것 같다고 한다. 되돌아 도로를 내려오다, 오른쪽 눈 속으로 들어선다.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이 곳에서 모두 설피를 신으라는 지령이 시달된다. 하지만 오늘은 준비한 설피가 많이 모자란다. 여자대원들에게는 미쳐 차례가 안 간다. 나도 교육받은 대로 꾸물대며 설피를 신다보니 후미로 쳐진다. 설피를 신고 몇 발자국 개울가로 내려선다. 왼발에 신었던 설피가 간 곳이 없다.
<설피를 신는 대원들- 대원 사진>
되돌아 설피를 찾아들고, 개울을 따라 부지런히 앞선 대원들을 쫓는다. 다시 정지하라는 신호가 온다.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마땅한 곳이 없나보다. 커다란 노르웨이제 설피를 신은 대빵 님과 젊은 대원 세 명이 도하지점을 찾으며 아래로 내려간다. 나머지 대원들은 그 자리에서 대기한다.
저 아래에서 신호가 온다. 도하 지점을 찾았다고 한다. 폭설이 내렸다지만, 계절은 이미 3월 중순, 봄눈 녹아 흐르는 개울의 수량이 제법 풍부하다. 눈 덮인 돌들을 징검다리 삼아 대원들이 한 사람씩 조심스럽게 개울을 건넌다. 이 때가 4시 30분 경이다.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대원 두 사람이 돌에 미끄러져 물 속에 빠진다.
<개울 도하 - 대원 사진>
물소리를 들으며 계곡을 따라 올라선다. 앞선 대빵 님과 젊은 대원 세 사람이 러셀을 한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계곡을 오른다. 설피 신는 것이 어설픈 나는 아예 다른 대원에게 넘겨주고, 랜턴불 빛에 비친 앞사람 발자국을 따라 조심스레 걷는다. 계곡이라 눈이 많이 깊지는 않다. 얼음위로 눈이 함빡 쌓인 좁은 계곡을 건널 때는 마치 에베레스트나 알프스의 크레버스(Crevasses)를 건너는 기분을 내본다. 고개를 들면, 어둠 속에서 나뭇가지들이 하얗게 눈을 이고, 머리를 숙여 우리들을 반긴다.
<설피 신은 선두가 러셀하며 진행>
<눈꽃 터널의 어두운 계곡을 오른다.>
소간령을 지나 6시 25분 경 마장터에 이른다. 평소 한시간도 안 걸리는 곳을 우리는 3시간 가까이 헤맨 셈이다. 마장터에는 통나무집이 한 채 서 있고, 담벽에는 장작이 가지런히 싸여있지만 인적은 없다. 사방이 점차 밝아 온다.
<마장터 통나무 집>
날이 금방 밝아진다. 하얀 눈 위에 빽빽하게 들어찬 침엽수림 사이로 하늘이 파랗다. 잡목들이 무겁게 눈을 이고, 기묘한 모습들을 하고 서 있다. 소나무들은 눈이 무거워, 나뭇가지들을 축축 늘어뜨리고 힘겹게 버티고 있다. 해가 솟으면서, 대간 마루금이 흰 눈 사면 위로 붉게 물들고, 하늘에는 새벽 노을이 붉게 타오른다. 가히 선경이다.
<여명 속의 침엽수림>
<여명 속의 설경 1>
<여명 속의 설경 2>
<여명 속의 설 경 3>
<여명 속의 설경 4>
<불타는 능선>
춥지는 않고, 바람도 없으나, 산 사면을 타고 오르니 눈이 점점 깊어진다. 잘 못해 다져지지 않은 눈을 밟으면 허벅지까지 빠져버린다. 맥이 풀린다. 어떤 때는 눈에 빠진 발이 아무리해도 빠지지를 않는다. 대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2-3분간 사투 끝에 겨우 발을 빼고 나면, 진땀이 다 솟는다. 생전 처음 맛보는 경험이다.
설피를 신지 않은 여자대원들의 고생이 심하다. 피로한 모습이 역력하다. 더 못 걷겠다고 하소연하는 여자대원도 나타난다. 8시 20분 경, 산사면 공터에 눈을 다지고, 모두 함께 모여 앉아 아침식사를 한다. 식사 중에 대빵 님이 지시를 한다. 무엇이던 반드시 먹어야한다. 앞으로 진행하다 힘든 대원들은 반드시 신고를 해라. 창피한 것이 아니다. 식사 후에는 남자대원들은 여자 대원들에게 설피를 양보해라. 설피가 모자라니 남자대원들은 한 짝 씩 나누어 신어라.
설피 한 짝을 배당 받고, 경험 많은 대원의 도움을 받아 단단히 신는다. 한결 힘이 덜 든다. 하지만 얼마 걷지 않아 발 앞부분이 빠져 설피가 덜렁댄다. 그래도 없는 것 보다 훨씬 낫다. 덜렁대는 설피를 보고, 눈에 거슬리는 지 다른 대원들이 몇 번을 고쳐 매 줘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아마도 발 큰 사람이 신도록 제작한 설피인 모양이다.
대간령에 도착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마루금은 보이지 않고, 계속 7-8부 능선을 가로지른다. 방향도 이상하다. 서쪽으로 진행해야 하는데, 우리는 지금 동쪽을 향하고 있다. 조금 지나자 선두에서 정지 신호가 온다. 이이서 오던 길을 되돌리라는 지시가 뒤따른다. 후미가 선두 되고, 선두가 후미가 되어 약 200m 후퇴한다. 왼쪽 사면에 눈 사이로 붉은 산행리본들이 보인다.
선두가 러셀을 하며 급사면을 타고 오른다. 그 뒤를 대원들이 따른다. 나뭇가지 사이로 쪽빛 파란 하늘이 펼쳐지고, 뒤로 신선봉이 보인다. 저 멀리 동해 바다가 하늘과 맞 닿아있다. 바다가 오히려 검게 보인다. 나중에 지도를 보고 확인한 것이지만 리본이 걸려 있는 이 길은 마루 금이 아닌, 신선봉을 우회하는 사면 길이였던 것이다.
<설경 1>
<설경 2>
<설경 3>
<설경 4>
하산 후 대빵 님이 대원들에게 20여분 간 알 바를 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한다. 눈이 덜 쌓인 곳을 찾다보니 실수를 했다는 것이다. 10시간 이상, 노르웨이제 설피를 신고, 러셀을 하며, 눈 덮인 산길을 찾느라 혼신의 힘을 기울였음에도 여전히 미안하다고 한다. 역시 "대빵"답다.
말이 설피지 노르웨이제 설피는 길이가 1m가 넘어 보이는 것이, 흡사 짧은 스키와 같고, 폭도 30Cm가 넘어, 웬만한 사람들은 이 설피를 신고, 제대로 걷기도 힘들어 보인다. 의욕을 갖고, 처음 이 설피를 신고, 러셀을 시도했던 한 젊은 대원은 오르막에서 설피 자락에 걸려 넘어지고, 내리막에서 고꾸라지고 나더니, 러셀이 장난이 아니더라고 실토를 한다.
이번 산행에서 이런 설피를 신고, 줄곧 러셀을 한 선두의 세 젊은이들 ! 귀경 시 지쳐서 버스 뒷좌석에 골아 떨어진 세 젊은이들 ! 모두를 위해 기여하고자, 혼신의 힘을 쏟은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컨트리뷰션(Contribution) - 건전한 미국 소시민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하나라고 한다. 모두를 위한 개인의 기여가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동서를 통해 다름이 없나보다.
아름다운 설경 속에서 틈만 나면 모여, 졸업기념 사진을 찍는다. 경사가 급해지며, 12시 경 마산 정상에 오른다. 제법 널찍한 공지에는 돌탑과 정상석이 서있다.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아름다운 조망에 감탄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바로 눈앞에 병풍바위가 날카롭고, 그 뒤로 신선봉, 상봉이 이어지고, 멀리 대청봉이 보인다. 북서쪽으로 흰 눈을 이고 있는 향로봉이 누워 있다. 칠절봉에서 향로봉으로 달리는 능선이 하얀 눈을 쓰고 우쭐우쭐 이어진다. 동쪽으로는 동해바다가 아득하고, 남서쪽으로 발아래, 흘리 마을과 알프스 리조트가 하얀 눈에 덮여있다.
<마산 정상석과 알프스 리조트 - 대원 사진>
<동해>
<상봉, 신선봉>
<병풍바위 뒤로보이는 대청봉>
바람이 거세다. 대원들은 서둘러 기념 사진을 찍고, 하산한다. 뒤로 쳐져서 후미대장과 함께 산 하나하나를 확인하고. 앞선 대원들을 따라 하산한다. 눈 쌓인 능선 길을 지나 등산로는 왼쪽으로 급히 떨어져 내린다. 대원들은 엉덩이 썰매를 타며 즐긴다.
침엽수들이 늘어선 아름다운 숲을 벗어난다. 향로봉이 올려 보이는 눈 덮인 비탈길을 내려, 2시 경 마을에 도착한다. 역시 개들이 컹컹 반긴다. 임도를 따라 진부령으로 향한다. 왼쪽으로 알프스 리조트와 스키장 슬로프가 보인다. 밭둑 길가에 쌓인 눈이 대원들 어깨 높이에 이른다. 한겨울 내린 눈이라지만 엄청나다.
<설원 너머로 보이는 향로봉>
아스팔트길로 이어지는 곳에서 여왕봉 님이 하산하는 대원들을 마중한다. 모든 대원들과 반갑게 포옹한다. 산행은 못해도 대원들과 함께 졸업식에 참여하러, 먼길을 혼자서, 3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내려왔다고 한다. 만년 후미지만,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항상 "아자! 아자!", 후미대장들을 일벌처럼 거느려, 여왕봉이다. 후미대장들이 너무 너무 고마워 졸업식에 빠질 수가 없었나 보다. 이런 것들이 바로 3차대의 자랑이다.
도로를 따라 내려오면서 뒤돌아 눈 덮인 마산을 올려다본다. 길가의 백두대간 종주 기념비 앞에서 대원들이 대빵 님의 지시에 따라 차례로 졸업기념 사진을 찍는다. 이윽고 2시 50분 경 진부령에 도착한다. 약 11시간 10분 동안의 산행이 막을 내린다.
<뒤돌아 본 마산 - 대원 사진>
대빵 님의 탁월한 리드와, 3인의 러셀조의 헌신으로, 불가능해 보이던 산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폭설로 미시령이 통제되어, 비록 절반에 그친 산행이었지만, 전 구간 산행을 마친 것보다 더 뜻깊고, 보람된 산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거대한 진부령 표지석 앞에 대원들이 모두 모여 졸업 사진을 찍는다. 이어서 건너편 식당에서 대간 종주 수료식과 파티가 진행된다.
< 진부령 표지석 - 대원 사진>
즐거운 시간은 빠르게 흐르나 보다, 4시가 넘어, 버스는 서울로 출발한다.
(2005, 3. 16)
'백두대간 산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두대간 종주(42) - 양태봉 (0) | 2012.11.30 |
---|---|
백두대간 종주(41) - 덕항산 (0) | 2012.11.30 |
백두대간 종주(39) - 매봉산 2 (0) | 2012.11.30 |
백두대간 종주(38)- 매봉산 1 (0) | 2012.11.30 |
백두대간 종주(37) - 함백산 (0) | 2012.1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