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11일(토)
오늘은 저수재에서 묘적령까지의 마루금을 탄다. 경북 예천군 상리면, 문경시 문경읍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의 경계에 걸친 이 지역은 일반적으로 저수재에서 죽령까지를 한 구간으로 보고,1312.4m의 도솔봉을 이 구간의 주산으로 삼는다.우리는 이제 아기자기한 암릉들이 많은 백두대간의 조령산군을 지나 웅장한 소백산군으로 진입하게 된다. 하지만 마루금 도상거리가 약 19 Km 정도에 달해, 당일 산행으로는 무리라고 보고, 이를 3l, 32 두 개의 소구간으로 나눈다.
제 31소구간의 코스는 『저수재(850)-투구봉(1,080.6)-시루봉(1,110)-배재(950)-싸리재(900)-흙봉(1,056)-뱀재(940)-돌탑(1,033.5)-솔봉(1,102)-묘적령(1,000)』까지의 마루금이다. 우리는 이 마루금을 타고, 사동리로 하산한다. 도상거리는 마루금 11Km, 날머리 4.5Km ,합계 15.5Km에, 산악회가 제시하는 산행기준 시간은 약 6시간 30분이다.
후미당은 마루금 산행시간 5시간, 점심 30분, 날머리 소요시간을 1시간 30분으로 계산하여, 총 산행시간은 7시간으로 잡는다. 하지만 산행 종료 후에 보니, 실제 산행시간은 총 6시간 10분 정도가 소요된다, 점심 시간 30분과 날머리 소요시간 1시간 30분은 예정 시간과 비슷하지만, 마루금 산행시간은 4시간 10분 정도로 단축된다. 마루금의 등산로가 점점 뚜렷해지면서 아마도 소요시간이 많이 단축되는가 보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서초 구민회관 앞. 각 산악회에서 동원한 대형버스들이 긴 행렬을 이루고 줄지어 서 있고, 등산객들이 몰려든다. 주 5일 근무제의 영향인가?, 경기침체로 사오정, 오륙도들이 더 늘어서인가? 40, 50대에서 산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진다. 이런 현상을 보고, 우리나라에 그 나마 산이라도 많아서 다행이라고 보도한 신문기사가 문득 생각난다.
우리 버스는 마지막 경유지 복정역에서 한 무리의 대원들을 태우고 출발한다. 산악회에서는 총 대장이 혼자 나와 연신 담배를 갈아 물며. 진두지휘한다. 산악회 대장이 간단히 인사한다. "버스가 치악 휴게소에서 정차할 예정이니 그 때까지 조용히 쉬시기 바랍니다."
예년에 비해 따듯한 날씨가 지속되어, 스키장마다 울상이라고 하지만, 아침의 밖의 날씨는 쌀쌀한 모양이다. 버스 안과의 기온 차가 커, 창문에 수증기가 엉겨, 밖을 볼 수가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나 보다. 버스가 속도를 늦추는 낌새에 잠이 깬다. 창문의 수증기를 닦아내고 밖을 내다본다. 창 밖으로는 옅은 안개 속에서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고, 남한강이 산굽이를 감돌아 흐른다. 하얀 백사장과 벼 그루터기만 남은 논이 을씨년스럽다.
<버스 창을 통해 본 남한강>
치악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원들과 담소한다. 주로 겨울장비 준비에 관한 이야기들이 오간다.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이 신발인 모양이다. 오늘 새로 장만한 겨울 신발을 신고 나온 대원들이 여러 명 눈에 뜨인다, 그 외에 장갑과 오버트라우저에 대한 관심들이 높다.
버스는 저수재를 향해 구불구불 굽어진 산 사면을 타고 힘겹게 오른다. 이윽고 9시 56분 저수재에 도착한다. 산악회 대장은 버스에서 내려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산행을 하도록 유도 하지만 이에 익숙하지 않은 대원들은 쑥스러운지 서둘러 산행을 시작한다. 대장이 가까스로 대원들을 모아 단체사진을 찍는다.
주위의 사진을 찍고, 10시경 왼쪽으로 난 등산로로 진입한다. 이제 해도 높다랗게 뜨고 하늘은 쾌청하다. 다소 쌀쌀한 느낌의 대기가 상쾌하다. 잡목사이로 이어진 가파른 등산로는 땅이 얼어 딱딱하다. 이윽고 등산로는 낙엽송 사이로 이어지면서 솔잎이 깔린 지면이 부드럽게 느껴진다. 10여분 오르니 경사가 완만해 지고, 진달래 군락지로 이어진다. 키가 한 길이 넘는 나무들이 길가에 도열해 있다. 가지만 봐서는 진달래인지 철쭉인지 구분이 어렵다. 이런 진달래 군락지가 5분간 계속되더니 다시 잡목지대로 연결되며 경사가 급해진다.
10시 28분 촛대봉에 이른다. 정상에는 단양군에서 세운 정상석이 서있다. 〈촛대봉, 높이 1,080m, 배재 2.5Km.〉 맑게 개인 날 촛대봉에서 보는 전망이 일품이다.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뜨이는 것이 천주산(天柱山)이다. 높지는 않지만, 올돌하게 솟아 사방을 굽어보는 모양이 과연 하늘을 떠받치는 형세다. 지난번 지나온 문봉재, 옥녀봉의 웅장한 능선이 바로 코앞에 펼쳐 져 있다. 사진을 찍고,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에 대원들은 모두 앞서 나간다. 산악회 대장 마저 앞서 나가고, 나는 최후미로 쳐진다.
<촛대봉 정상석>
<촛대봉에서 본 천주산>
500m정도 나가니 이정표가 서 있다. 이정표는 촛대봉과 고비밭, 싸리밭 방향을 알려준다. 앞서 걷던 산악회 대장이 뭐라고 소리친다. 가까이 다가가니 투구봉을 지나쳤단다. 우회하지 말고 직진해야하는데, 우회하는 대장을 뒤를 따르는 나에게 직진하라고 소리친 모양이다. 뒤돌아 투구봉에 오른다. 맑은 날씨에 역시 조망이 좋다. 정면으로 시루봉이 보이고, 앞으로 가야할 능선이 굽이구비 흐른다. 남쪽으로 용두리 일대가 굽어보인다. 그 뒤로 산들이 첩첩이 겹쳐 있다.
<투구봉에서 본 시루봉과 가야할 능선>
<투구봉에서 본 용두리 방향>
10시 54분 시루봉에 오른다. 최후미인데도 목표시간 보다 약 10분 정도 빠른 시간이다. 아무 표시도 없는, 전망대 같은 모양이라, 무심히 지나치면 시루봉이라고 알아보기가 어렵겠다. 동쪽으로 시계가 좋아, 지나온 투구봉과 저수재 건너편 능선이 보인다. 시루봉 급경사 길을 내려온다. 앞에 오솔길 님이 보인다. 중위 그룹을 쫓다가 몇 번 길을 헤매다 보니, 후미로 쳐졌단다. 헤매다 제 길을 찾았으니 다행이지, 혼자서 길을 잃으면, 겨울 산에서는 위험하다. 그래서 확실하게 중위 그룹에 붙거나, 아니면 후위 팀을 따라야 한다.
<시루봉에서 본 투구봉과 저수재 너머 능선>
11시 36분 경 1,053봉을 지난다. 오솔길 님이 앞서 치고 나간다. 나는 전망대에서 산악회 대장의 설명을 들으며 조망을 즐긴다. 서쪽으로 올산과 황정산 위치를 알려준다. 북쪽으로는 도솔봉과 옥녀봉이 우뚝 솟아 있다. 송전선 사이로 가야할 능선이 가까이 보인다. 발 아래로는 남조리 단양 유황온천장이 보인다. 시루봉과 1,084봉이 나무에 가려 카메라로 제 모습을 잡을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배재 이정표>
<뒤돌아 본 1,084봉>
<1,053봉에서 본 북서 방향의 조망>
<1,053봉에서 본 북동 방향의 조망>
11시 53분 싸리재에 도착한다. 전망이 좋은 곳마다 멈추어 사진도 찍고, 조망을 즐기며 최후미로 왔는데도 목표시간에 비해 30분 정도 빠른 진행이다. 싸리재에서 은영 당수와 차련 님이 쉬고 있다. 이제 산악회 대장을 포함, 4명이 후미 그룹을 이루고, 대장의 설명을 들으며 즐산을 한다. 여전히 하늘은 눈이 부시도록 푸르고, 하얀 비행운이 한가롭게 번지고 있다. 차련 님이 하늘을 보며 감탄한다.
<싸리재에서 본 1,053봉>
12시 25분 훍봉에 오른다. 조망이 일품이다. 도솔봉이 가깝게 다가선다. 산악회 대장이 서남쪽으로 지리산 줄기를 가르친다. 그래서 보니 대청봉과 중봉이 보이는 것 같다. 서쪽으로 이제 천주산이 멀리 보인다. 따듯한 햇살, 상큼한 대기, 청명한 날씨에 일망무제(一望無際), 사방으로 탁 트인 조망을 즐기며 차련 님이 최상의 산행이라고 즐거워한다. 차련 님은 천상 선두기질은 아니다.
<흙봉에서 본 지리산 방향>
<흙봉에서 본 천주산>
흙봉을 내려서서 12시 38분 경, 오른 쪽으로 돌탑을 보고. 12시 44분 경 송전탑을 지난다. 송전탑을 지나면서 서쪽으로 지나온 능선과 봉우리를 둘러본다. 새벽 5시경 아침을 먹었더니 배가 고프다. 1시에 길가에 배낭을 풀고 점심차비를 한다. 산악회 대장이 다가오더니 자기는 한 30분 더 걷겠다고 한다. 후미당의 3인이 오붓하게 점심을 즐긴다.
<송전탑 부근에서 본 걸어온 길>
1시 30분 점심을 마치고 출발한다. 10분쯤 걸으니 넓은 헬리포트가 나타난다. 입구에 이정표가 서 있다. 아마도 뱀재인 것 같은데, 현 위치를 단순히 헬기장으로 표기하고 있다. 산악회 대장이 혼자 기다리고 있다. 선두 팀을 제외한 중위 그룹이 이곳에서 모여 식사를 하고 한 10분전에 출발했다고 한다.
<멀리 본 황정산>
차련 님과 은영 당수는 먼저 출발하고, 나는 산악회 대장의 설명을 들으며, 주위를 살핀다. 사진을 찍는다. 카메라에서 밧데리를 갈아 달라는 사인이 온다. 대장도 먼저 출발하고, 나는 배낭을 풀어 충전된 밧데리를 꺼내, 교환한다.
다시 최종후미가 되어 천천히 경사면을 오른다. 식후라 쳐졌어도 서두르지 않는다. 필요하면 속도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최종후미로 쳐져도 조금도 불안하지 않다. 천천히 주위를 살피며 호젓한 대간 길을 마음껏 즐긴다.
산악회 대장을 따라붙고, 무전기로 교신하는 사이에 추월하여, 앞선 은영 당수를 쫓는다. 솔봉은 언제 지났는지도 모르고 지나치고, 2시 16분 모시골 정상 이정표를 지난다. 이제 마루금도 얼마 남지 않았다. 속력을 내 본다. 저 앞에 은영 당수가 보인다. 천천히 뒤를 따른다
<1,027봉을 지나며 본 도솔봉>
2시 46분 묘적령에 도착한다. 길바닥에 사동리 방향을 가르치는 산악회 종이표지가 돌로 눌려져 있다. 직진하는 길은 조령으로 향하는 길이다. 왼쪽 급경사 내리막을 조심스럽게 내려선다. 잔돌들이 뒤섞인 너덜지대다. 발목을 조심하며 속도를 줄여 천천히 내려선다. 경사가 급하고, 곳곳에 암릉이 있어 자일을 걸어 둔 곳도 있다. 험한 길이다.
<나무에 걸린 묘적령 이정표>
산악회 대장이 따라오는 기척이 없다. 기다릴 수도 없어 세 사람이 조심조심 경사면을 내려선다. 이윽고 급경사 사면이 끝나고, 등산로는 골짜기로 내려서며, 경사는 완화되지만 냇가를 따라 이어지는 길은 돌길이 계속된다. 이제 물소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는다. 개울가 그늘진 곳에는 어름이 덮여있고. 그 사이로 냇물이 졸졸 흐른다. 차련 님이 마치 봄날의 개울을 보는 것 같다고 즐거워한다.
3시 44분 임도로 내려선다. 차련 님은 임도를 따라 내려가고, 은영 당수와 나는 냇가로 내려가 세수를 한다. 물이 차다. 내려온 길을 뒤돌아본다. 묘적령이 지는 해를 받고 밝게 빛난다. 심심산골, 임도를 따라 내려오는 길은 한적하고 평화롭다. 하루 산행을 마감하는 대간병 환자들의 마음도 이 길을 닮아 평화롭고 차분하다.
<사동리 하산길>
<뒤돌아 본 묘적봉 방향>
임도가 크게 왼쪽으로 휘어지는 곳에 이정표가 서 있다. 이정표는 도솔봉 방향과, 죽령방향을 가르친다. 〈이곳부터는 소백산맥입니다〉 하는 안내판도 서 있다. 우리는 이미 소백산맥 경내에 들어와 있는 거다, 정면으로 도솔봉이 햇빛을 받고 서 있다. 아름답다. 이윽고 사동리 유원지로 내려선다. 버스는 유원지 한참 아래에 멈춰 있다. 4시 10분 버스에 도착한다. 산악회 대장이 언제 내려왔는지 벌써 내려와 있다. 의아해하는 표정을 보더니 지름길을 알고 있다고 한다.
<지는 해를 받고 선도솔봉 능선>
마루금 11Km가 양에 차지 않아, 도솔봉을 오른 대원 한 분을 기다리는 동안, 맥주로 갈증을 푼다. 4시 35분 대원이 도착한다. 항상 선두를 달리던 분이 도솔봉에서 돌아오는 길에 알바를 하고, 그 덕에 최후미로 도착한다. 소탈한 이 대원은 버스에 오르자마자, 장난끼를 섞어, 버스 바닥에 넓죽 엎드려 큰절을 하며 기다리는 대원들에게 미안함을 표시한다. 만년 선두가 후미의 심정을 이해하는 순간이다. 버스는 서울을 향한다.
5시30분 버스는 박달령 휴게소에서 30분 간 정차한다. 산악회 대장은 묵밥이 별미이니 먹어보라고 권한다. 대중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에서는 "도토리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라는 노랫 말이 나온다. 과연 박달재는 도토리묵이 유명한가 보다. 정식이름은 "묵채밥"이라고 한다 .
"박달재의 금봉이"가 나이가 들었나? 휴게소의 곱상한 아주머니가 상을 차려준다. 도토리묵을 청포묵처럼 썰어, 가늘게 썬 잘 익는 김치를 곁들이고, 김을 부셔 넣었다. 아마 밥을 말아먹으라고 그랬는지 더운물을 부어 한 대접이 가득하다.
떠먹어 보니 맛이 좋다. 밥을 말으니 큰 대접으로 넘쳐날 정도로 양이 많다. 시원하고, 고소한 것이 과연 별미다. 하지만 양이 많아 먹어도 줄지를 않는다. 맛은 좋지만 먹는 양이 작은 나는 질리는 느낌이다. 물을 붇지 말고, 도토리묵만 김치와 김에 버무려 먹었으면 더 좋을 뻔했다. 어쨌든 박달령 휴게소의 묵채밥은 별미다.
버스는 7시 30분 조금 지나 서울에 도착한다. 양재역에서 착화식을 하려는지 한 무리의 대원들이 어우러져 함께 하차한다.
(2004.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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