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언제 보아도 역시 크고 넉넉한 산이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주능선 길이가 25.5Km에,
1,000m가 넘는 봉우리만도 20여 개나 된다.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
남녀노소 구분이 없다.
초등학생 아들과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딸을 데리고,
비 오는 세석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40대 아버지는
일산에서 왔다고 한다.
빗속의 천왕봉을 넘느라 시장했던지
노란색 비닐 우비를 입은 아주머니는
장터목으로 내려오는 길가에 앉아 내리는 비도 아랑곳 않고
혼자 술빵을 먹고 있다.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지나치려니
술빵 한 조각을 내밀며 먹으라 권한다.
무리 지어 스쳐 가는 남녀 학생들.
운동화를 신은 발이 반 이상이다.
색색의 비닐 우비를 펄럭이며 바람같이 지나간다.
뒤로 건강한 웃음을 날리며.
벽소령으로 가는 길
붉은 색 티 셔츠가 잘 어울리는 30대 여인 두 사람.
길가에서 쉬며 스낵을 먹고 있다.
늙은이 둘이 힘들여 걷는 게 안쓰러운지
스낵을 먹고, 쉬었다 가라고 권한다.
서울 신림동에서 온 여인들이다.
벽소령 산장.
온통 저녁 준비로 부산하다.
한쪽에서는 삼겹살을 굽고, 소주파티가 한창이다.
키가 껑충하게 큰 외국인 두 사람이
신기한 듯 팔짱을 끼고 구경하느라 자리를 뜨지 못한다.
지리산은 이 모든 사람들을 품고 조용히 누워있다.
당일 백두대간 종주 8번째는 지리산 구간이다. 당초 계획은 5월 25일 밤에 출발, 중산리에서 천왕봉을 거쳐 노고단, 벽소령에서 일박하고, 종석대를 지나 성삼재로 하산하는 코스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회원들은 28일 무박종주를 택 하고, 벽소령에서 일박을 하겠다는 회원은 7명뿐 이라, 일박을 원하는 사람들은 할 수 없이 28일의 종주 팀에 합류, 성산재에서 출발, 중산리로 하산하게 됐다.
무박 산행은 처음이다.
28일 오후 10시 20분 선능역에서 산우회 버스를 탄다. 집에서는 머리만 대면 자는 체질이지만 처음이라서 그런지 좀처럼 잠들지 못한다. 버스는 29일 오전 4시 조금 지나 성삼재에 도착한다. 무박으로 종주 하는 회원들은 바로 산행을 시작하지만, 일박하는 회원들은 주위가 훤해질 때까지 버스에서 대기한다.
5시 20분 경 주위가 훤해지면서 버스에서 내려 산행준비를 한다. 서울을 출발할 때는 비가 그쳤었지만, 성삼재에서는 안개비가 심하게 내린다. 우리은행 행원들인지 우등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이 역시 버스에서 내려 산행준비를 한다. 한 눈에 대간꾼들과 구분이 된다. 배낭들이 엄청 크다. 많은 준비를 한 모양이다. 나는 작년의 지리산 종주경험을 살려 짐을 쌀 때 10Kg을 넘지 않는 다는 원칙을 세우고, 작은 배낭을 선택하여 필요한 것만 챙기니 배낭무게가 9Kg를 넘지 않는다.
5시 30분 노고단으로 향한다. 안개비는 여전하다. 6시 10분 노고단 대피소를 지난다. 안개 속에 취사장 불빛이 환하다. 취사 준비하는 사람, 산행 준비하는 사람, 새벽이지만 노고단 대피소는 활기가 가득하다.
6시 26분 노고단 돌탑 앞에 선다. 짙은 안개 속, 시계는 2m정도가 고작이다. 안개비 내리는 하늘을 보고있는 두꺼비 모양의 바위를 디카에 담고, 임걸령으로 향한다. 산죽 사이의 좁은 길 곳곳이 물웅덩이 이고, 바위는 미끄럽다. 안개비 속에서 안경알에 김이 서려 발 밑이 잘 보이지 않느다. 삐죽삐죽 솟아난 돌을 잘못 밟으면 발목 다치기가 십상이다. 조심조심 걷는다.
임걸령을 7시 35분에 통과한다. 임걸령 샘 주위에는 희뿌연 안개 속에서 등산객들이 붐빈다. 8시 20분 노루목에 도착, 10분 후 배낭을 길가에 벗어 두고, 반야봉으로 향한다. 작년에는 들르지 못했던 곳, 오늘은 벽소령에서 일박하니 시간이 넉넉하다. 반야봉으로 오르는 길은 중간중간 암벽이 있고, 멋진 구상나무들이 여기저기 눈에 뜨인다. 철쭉은 거의 지고, 늦둥이들만 간간이 남아있다.
반야봉 정상이 가까워지자, 이게 왠일인가? 햇님이 얼굴을 내민다. 9시 5분 반야봉 정상에서 지리산 운해를 만끽한다. 서쪽으로 지리산 서북능선이 구름 사이로 뚜렷하고, 2시방향으로 뾰족한 산봉우리 2개가 구름을 헤집고 얼굴을 보인다. 남녀 대학생들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천왕봉이 보인다고 환성을 지른다. 거리나 방향으로 보아 천왕봉는 아닐 듯 싶고, 아마도 토끼봉이 아닌지 모르겠다. 하늘의 축복, 실로 장관이다.
반야봉 정상의 돌탑. 그 너머 구름 위로 서북능선이 보인다.
반야봉 정상에서 본 운해 - 뾰족 내민 봉우리는 토끼봉 같은데.. 후에산행기를 보신 구재삭님이 바로 잡아주셨다. 천왕봉과 중봉이라고... 감사합니다.
9시 20분 아쉽지만 반야봉을 뒤로하고 노루목으로 되돌아온다. 노루목에는 9시 40분에 도착, 산우회에서 준 떡으로 간단히 아침을 마치고, 10시에 출발, 20분 후 삼도봉에 도착한다. 삼도봉 너른 바위 위에는 여러 사람들이 쉬고 있다. 그 중에서 허연 턱수염을 길게 기른 도사 풍의 노인이 눈에 뜨인다. 신발만 등산화지 복장도 간편하고, 배낭도 없다. 혼자 떨어져 앉아 그윽한 시선으로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이 표표하다. 10분을 쉬고, 10시 30분 화개재로 향한다.
산꾼도 아니면서 걸어온 구간의 시간을 세세하게 적어놓는데는 이유가 있다. 노루목에서 반야봉으로 오를 때부터 자연스럽게 동행이 된 두 사람이 있다. 모두 43년 생으로 나보다는 두 살이 젊다. 걸음이 늦으니 뒤로 쳐져 자연스럽게 동행하게 됐다. 세 늙은이의 산행시간을 남겨, 지리산 종주에 뜻은 있으되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는 분들에게, 조금만 준비를 하면, 1무, 1박으로 지리산 종주가 큰 무리 없이 가능하다는 정보를 제공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사장이란 분은 데이터시스템을 운영하는 현역이다. 일에만 매달려 살다보니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어, 겁은 나지만 지리산 종주를 시도한다고 한다. 이렇게 벼르던 지리산 종주이고 보니 자녀들이 축하한다고 디카를 선물했다고 자랑한다. 산은 관악산을 주로 다녔고, 당뇨가 있어 매일 한시간씩 걷는다고 한다. 성격이 쾌활하다. 다른 한 분은 별로 말씀이 없고, 천왕봉은 전에 한번 오른 적이 있다고 한다. 경험이 없어 배낭을 너무 무겁게 준비했다고 산행 중 내내 후회를 한다.
화개재에는 10시 50분에 도착한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쉼터에서 떠들썩하게 쉬고 있다. 넘어 온 삼도봉, 그 오른쪽의 노루목, 그리고 반야봉을 바라보며 쉬고 있으려니 예의 도사 풍의 늙은이가 어느 틈에 내려 왔는지 등산로 울타리에 기대서서 떠들썩한 젊은이들 쪽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 동행 중 입이 무거운 양반이 토끼봉은 힘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걱정을 하자, 그 소리를 들었는지 도사 풍은 빙그레 웃으며,
"그렇죠, 제일 힘든 곳이죠. 하지만 천천히 오르면 어렵지 않아요."라고 한다.
11시 토끼봉으로 오른다. 천천히 오르니 듣던 것만큼 힘들지는 않다. 가파르기는 해도 거리가 길지 않기 때문인가 보다. 11시 44분 토끼봉에 도착한다. 사진만 몇 장 찍고, 바로 연하천 대피소로 향한다. 오히려 연하천 대피소로 가는 길이 지루하고 힘들다. 1시 20분에 연하천에 도착한다.
토끼봉에 오르며 본 반야봉 - 천왕봉에서는 비가와 찍지 못하여, 꿩대신 닭으로..
먼저 도착한 아주머니 3분, 젊은이 2사람은 식사를 하고 있다. 연하천에서 마시는 맥주 맛이 그만이다. 연하천 대피소에서는 햇반은 팔지만 전기시설이 없어 전자레인지를 돌리지 못한다. 할 수없이 두 늙은이가 버너를 피워 작은 코펠에 물을 끊이고 햇반을 넣었지만 잘 안 되는 모양이다. 나는 엊저녁 집사람이 싸준 주먹밥과 보온 통에 된장국이 있으니 한가롭게 맥주만 마시고 있다. 보다 못한 연하천의 친절한 털보 아저씨가 커다란 코펠에 덜된 햇반 2개를 통째로 넣더니, 산장 안의 성능 좋은 버너로 잘 익혀다 준다. 라면은 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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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2개, 햇반 2개, 주먹밥, 장국, 그리고 배추김치에, 장조림, 총각김치, 멸치조림, 배낭에서는 먹을 것들이 자꾸자꾸 나온다. 먹다보니 그렇게 힘들여 지은 햇반 하나는 고스란히 남는다. 이것은 다음날 세석에서 귀중한 아침거리가 된다. 벽소령은 2시간이내 거리니 서둘 것 없다고 마냥 늑장을 부린다. 아침에 들르지 못한 화장실도 들르고, 세수도 한다. 출발 준비를 하며, 샘에서 물을 받는데, 낮익은 얼굴이 보인다. 동생 친구다. 50대 후반의 건축사로 주말을 이용, 동료들과 지리산 종주를 한다고 한다. 등산을 많이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없었는데 지리산에서 만나다니 반갑다.
늑장 끝에 2시 35분 벽소령으로 향한다. 천천히 걸어도 2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다, 길도 비교적 평탄하고 내리막이 많다. 포식도 했겠다. 서두를 이유가 없다. 산책하는 기분으로 한 시간쯤 걸었을까, 길가에 젊은 여인 둘이서 스낵을 먹으며 쉬고 있다. 알은 체를 하니 스낵 좀 드시고 쉬어 가란다. 붉은 색 티셔츠가 잘 어울리는 젊은 미녀들이다. 어찌 마다하겠나? 사진도 찍어주고, 메일 주소를 물으니 메일 주소가 없단다. 산우회 사진첩에 사진을 올려놓을 터이니 복사해 가라 이르고, 눈치껏 자리를 뜬다.
벽소령 가는 길에 만난 여인들 - 건강미가 넘친다.
형제봉에서 사진을 찍느라 잠시 지체하고, 계속 여유롭게 걷는다. 저 멀리 벽소령 대피소가 그림같이 보인다. 그 뒤 10시 방향으로 천왕봉, 중봉이 누워있고 산 위에는 구름이 한 가닥 걸려 있다. 청명한 오후, 지리산에서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 장관이다. 아예 갈 길을 잊고, 소주를 꺼내, 천왕봉을 안주 삼아 잔을 나눈다. 붉은 티셔츠의 미녀들이 지나친다.
이번에는 우리가 쉬어가라고 권한다. 천왕봉을 배경으로 기막힌 사진을 찍어 주겠다니까 발걸음을 멈춘다. 눈앞의 그림에 아가씨들도 감탄한다. 쾌활한 이사장이 아가씨들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물어 메모를 하면서 사진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한다. 서울 신림동에서 산다고 한다. 아가씨들은 세석에서 잔다고 서둘러 떠나는데, 동생 친구녀석이 지나간다. 천왕봉 배경의 기념사진을 남겨 주고 싶어 또 불러들인다.
동생 친구 - 뒤로 천왕봉과 중봉이 보인다.
아쉬운 명당자리를 뒤로하고 벽소령으로 향한다. 천왕봉에서 발원해 대성리로 뻗은 웅장한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로는 의신지구로 뻗은 능선이 보이고 그 양 옆으로 계곡이 깊다. 빨치산 최후의 거점이 이 일대라 한다. 벌써 반세기 전의 비극이지만 6.25를 겪은 우리 나이의 늙은이들에게는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빨치산 최후의 거점 -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어야 한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1949년 6월에 주한미군이 완전히 철수하고, 한국과 대만이 "에치슨 라인"에서 제외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50여년이 지난 지금 주한미군의 감축이 기정 사실화 되고, 한미 동맹관계가 매끄럽지 못한 현상이 걱정스럽다. "자주국방" - 좋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되는 일은 어떤 이유든 결코 용납될 수 없다.
5시 30분 벽소령에 도착한다. 어디서 착오가 생긴 걸까? 우리 일행 중 다섯 명이 예약자 명단에 없다. 예약을 안한 사람들은 7시까지 기다려야 입실 가능성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입실이 안되면 하산하는 도리밖에 없으니 그 전에 알 수는 없냐고 다그쳐도, 공무원의 대답은 한결같다. "7시까지 기다리십시오."
할 수 없어, 취사장으로 내려가다 보니, 처마 밑 응달진 곳에 젊은이들 몇 사람이 에어 매트리스 위에서 단잠을 자고 있다. 입실이 안되면 저렇게 라도 자야하나 생각하니 화가 난다. 취사장에서는 먼저 도착한 아주머니들이 고맙게도 저녁 준비를 다 해놓고 기다리고 있다. 옆에서 삼겹살을 구우며 소주파티를 벌이고 있던 생면부지의 중년의 사나이들이 고생했다고 소주를 권한다. 염치 불구하고 선 채로 술과 고기를 얻어먹는다.
나중 일은 나중이고, 우선 저녁부터 시작한다. 늙은이들 배낭에서 200cc짜리 소주 5병이 나온다. 술과 음식이 들어가니, 예약않된 사실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안되면 이슬은 피할 수 있으니 취사장 안에서 자자고 기염을 토하며, 시끌버끌 성찬을 즐긴다. 키 큰 외국인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흥겨운 취사장의 풍경을 구경하느라 자리를 뜨지 못한다. 불러서 소주라도 권하고 싶지만 실례가 될 듯 싶어 참는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대피소 앞으로 나와 7시를 기다리며 의자에 앉아 편히 쉰다. 맞은 편에 도사 풍이 온화한 얼굴로 우리 쪽을 바라본다. 수원의 연구기관에서 근무한다고 한다. 나이를 물으니 50대 후반이라고, 웃으며 답한다. 이사장이
"그 허연 턱수염은 웬일이요? "라고 물으니,
"부모님이 주신 거죠."라는 대답이다.
도사 풍에 어울리게 말도 간결하고 재미있다. 지리산에는 70여차례 온다고 한다. 그렇게 자주 왔냐고 놀라자,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는 백번 이상 온 사람도 있다고 담담히 이야기한다.
늙은이들 이야기에 이끌렸는지, 대피소 관리팀장이란 양반이 다가와 자기 소개를 한다. 숙소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묻자, 대답은 직원들과 똑 같다. 7시까지 기다리란다. 도사 풍이 담배를 못 피우게 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자, 산불방지를 위한 조치라고 가볍게 넘긴다. 맥주 정도의 술은 팔아도 좋지 않냐는 의견에는,
"전에는 술을 팔았죠. 하지만 술을 드시고, 사고를 당하신 분이 술을 판 대피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일이 있었다더군요, 물론 소송에서는 이겼지만, 그 이후부터 술 파는 것이 중지됐다고해요."
술은 제가 사 먹고, 사고 당했다해서 술판 사람을 고소한 것도 웃기지만, 소송을 당했다고, 술파는 것을 금지한 관리공단도 웃기기는 마찬가진 듯 싶다.
벽소령 산장 - 오른쪽 뒷짐진 사람이 관리팀장, 의자에 앉은 이가 도사 풍이다
숙소 배정을 받기 위해 분위기를 잡으려는지, 대피소 매점 창구에서 직원과 이야기를 하던 이사장이 그림엽서 한 권을 사 들고 와 우리들에게 엽서 한 장씩을 나누어주며, 집에 엽서를 보내라고 권한다. 10일 후면 배달되니, 재미있지 않느냐는 이야기다. 자기는 부인, 애인, 그리고 디카를 선물한 자녀들에게 보내겠다고 엽서를 쓰고 있다.
7시 5분. 예약 못한 사람들은 빠짐없이 대피소 안으로 모이라는 방송이 들린다. 귀찮지만 등산화 끈을 풀고, 대피소 안으로 들어가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사무실 앞 마루바닥에 열을 맞추어 질서 정연하게 앉아 있다. "픽" 웃음이 나온다. 흡사 잡혀온 포로들이 앉아 있는 영화의 한 장면 같아 보인다. 예약 못한 죄가 있다지만 저렇게 순종하는 태도를 보이다니, 참으로 선량한 백성들이다. 이윽고 관리팀장이 나온다. 관리팀장도 다소 어이 가없는 모양이다. 웃으며 편하게 앉으라고 권한 후, 대피소 입실에 관해 설명한다.
"벽소령 대피소는 144명을 수용할 수 있다. 예약을 해야 입실이 가능하니, 앞으로는 반드시 예약을 하라. 이번은 다행히 비때문에 취소된 예약이 많아, 모두 수용할 수 있을 것 같다. 60세이상 되신 분들에게 먼저 배정한다, 다음은 몸이 불편한 사람, 그 다음은 여자 분의 순이다, 우선 60세 이상 되신 분들은 신분증 지참, 앞으로 나오시기 바란다."
배정을 받고, 숙소로 들어가니, 자리가 텅텅 비어 있다. 규칙에 충실한 것은 칭찬할 일이지만 왠지 기분이 씁쓰름하다. 짐을 대강 풀고, 자리를 정돈한 후, 샘가로 내려가서 수건에 물을 묻혀, 얼굴과 손을 닦고 먹을 물을 떠온다. 벌써 사방이 어둑하다. 대피소 앞마당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바람을 쏘이며, 저무는 지리산을 즐기고 있다. 도사 풍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을 하는 모양이다.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화사한 중년 부인이 딸과 함께 밤하늘을 보며 무언가 조용조용 이야기를 한다. 점점 어둠이 짙어지며, 별빛이 쏟아진다.
저무는 지리산 - 작년 장터목에서, 이런 매력에 지리산을 찾나보다.
위 사진과 같은 시기, 같은 장소 - 시간만 40여분 후다.
5월 30일, 일요일이다. 4시 55분에 산행을 시작한다. 날씨는 쾌청하고 안개도 없다. 선비샘까지 가는 길은 거의 평탄한 산책길이다. 새벽 공기가 상쾌하고, 새 소리가 즐겁다. 오른쪽 저 아래에 하얀 꽃이 탐스럽다. 찔레꽃인가 하고 가까이 보니 찔레꽃보다는 꽃이 작다. 무슨 꽃인지 모르겠다. 새소리는 끊임이 없고, 바람결이 시원하다. 오랜만에 즐기는 유쾌한 새벽 산책이다.
선비샘에 도착하니 6시다. 많은 사람들이 붐빈다. 대피소보다는 분위기가 자유로와 세수하는 사람들이 많다. 양치질을 하는 여자들이 작은 소동을 벌인다. 산에서 칫솔질을 하면 어떡하냐는 질책에 치약 없이 맨 칫솔을 쓰는데 웬 간섭이냐고 언성이 높다. 간단히 세수를 마치고, 오이 반개씩을 나누어 먹는다, 세석에서 아침을 먹기로 하고, 아주머니와 젊은이들이 먼저 출발한다. 늙은이들도 6시 15분, 앞선 일행을 서둘러 따라 나선다.
완만한 경사를 오른다. 왼쪽 나뭇가지 사이로 붉은 햇살이 빗살처럼 스며든다. 천왕봉에 오른 사람들은 일출을 보았을까? 은근히 샘이 난다. 한 30분쯤 걸었을까?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맑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안개가 짙어진다. 칠선봉까지의 오르막길을 서둘러 걷는다. 습기와 땀으로 또 안경알이 뿌옇게 되고.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7시 18분 경 칠선봉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 내쳐 걷는다. 칠선봉을 지나니 길은 평탄해 졌지만 드디어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비가 오니 마음이 급해진다. 다시 오르막이 시작되고, 군데군데 비에 젖은 암벽위로 등산로가 이어진다. 안전산행을 위해 매어 놓은 밧줄이 비에 젖어 무겁게 드리워져 있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세석 대피소에 가까워질수록 굵어지더니, 8시 15분 산장에 도착할 때는 제법 쏟아진다.
세석대피소는 만원이다. 발 디딜 틈도 없다. 서둘러 앞섰던 일행을 찾았지만 종적이 없다. 할 수 없이 한 귀퉁이를 비집고 들어앉아, 아침을 준비한다. 우선 내가 준비한 누룽지 가루를, 끓는 물에 풀어, 한 컵씩 나눠 마시며 몸을 풀고, 라면을 끊인다. 어제 남긴 햇반을 꺼내니 아침 준비 완료다. 아침이긴 하지만 비에 젖어 소주 한잔 생각이 간절하다. 하지만 엊저녁에 바닥을 내버렸으니 어쩌랴? 새벽 운동 후라 식욕은 왕성하다. 나머지 먹거리를 모두 챙겨 먹는다. 9시 10분 여전히 내리는 빗속을 뚫고 장터목으로 향한다.
촛대봉까지의 오르막을 지나 한차례 내리막이 계속되더니 등산로는 다시 완만한 오르막으로 이어진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안개로 시야는 제로다. 부지런히 땅만 보며 걷는다. 여전히 안경알에 서리는 김이 골칫거리다. 11시 15분 경 장터목에 도착한다. 여기도 역시 만원사례다.
앞선 일행을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천왕봉에 올랐는지, 하산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세 늙은이가 기로에 선다. 천왕봉을 갈건 지, 장터목에서 중산리로 하산을 할건지, 결정을 해야 한다. 비가 내리는데도 천왕봉 쪽으로 오르는 사람, 내려오는 사람들이 계속 이어진다. 동생 친구는 백무동으로 하산하겠단다. 우리는 천왕봉에 오르기로 방향을 정하고 11시 30분 장터목을 출발한다.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은 분홍, 노랑, 흰색의 비닐 우비로 컬러풀하다.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이 정도 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많은 사람들이 붐빈다. 울퉁불퉁 돌길을 오르내려 통천문에 도착한다. 통천문에서 정체가 생긴다. 지리산은 과연 대단하다. 빗속에서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다니...
내리는 비도 아랑곳없이통천문 지나 천왕봉으로
12시 55분 천왕봉에 도착한다. 비는 여전하지만 바람은 심하지 않다. 신림동 여인들을 또 만난다. 빗속에서도 사진을 찍느라 부산하다. 내리막 길 하산을 위해 신발 끈을 다시 조이고, 무릎 보호대를 착용하느라 지체했더니 두 분이 먼저 하산하겠다고 내려간다. 1시 5분 나도 하산을 시작, 앞선 두 사람을 쫓는다.
급경사 길을 구르듯 달려 내려가지만 앞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마음은 급해도 돌길에서는 속도가 나질 않기 때문인가? 안경알에 서리는 김도 자꾸 거추장스럽다. 부주의해 발목이라도 삐끗하면 이 또한 큰일이다. 거의 30분 정도를 달려 내려왔는데도, 보이질 않는다. 출발시간 차이는 채 5분이 않되는데, 이럴 리 없다. 혹시 알바를 한 건 아닌가? 하지만 뻔한 길, 알바를 할 곳이 아니다.
30분을 더 달려 내려간다. 역시 보이지 않는다. 문득 대원사쪽으로 빠진 건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큰일이다. 걱정이 태산이다. 가던 길을 멈추고, 생각을 정리한다. 설혹 대원사 쪽으로 빠졌더라도 머지않아 알바한 줄 알고 되돌아 찾아오겠지. 많아야 한 시간 정도 후면 제 길로 들어 설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별일이야 있겠냐고 생각하니 다소 마음이 놓인다. 이렇게 10여분간을 지체하는데, 동행 한 분이 급히 내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어찌된 일이냐고 묻자, 안개 속에서 길을 잘 못 잡아 장터목 쪽으로 내려가다, 아무래도 이상해 올라오는 사람에게 길을 물었다고 한다. 되돌아 정상에 올라 나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자, 이 사장은 천천히 조심해 내려오라고 하고 뒤쫓아 왔다고 한다. 어처구니가 없어, 멍청히 마주보고 웃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윽고 좀 쉬었다 내려오라고 하고, 다시 내가 먼저 출발한다.
로타리 산장에서 물병의 물을 바꾸고, 내쳐 내려간다. 2시 37분 경 망바위를 지난다. 비는 가늘어 졌지만, 안개는 더욱 짙어져, 대낮인데도 어둑어둑하다. 칼바위를 지나니 계곡의 물소리가 요란하다. 이제는 다 내려왔다는 안도감에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다. 산수갑산을 가더라도 좀 쉬어야겠다고, 배낭에서 미숫가루 탄 물을 꺼내 마신다.
3시 20분 경 매표소를 통과 주차장에 이르니 택시가 있다. 버스정류장까지 택시를 탄다. 작년에는 교통편이 없어 지친 몸을 끌고 한 시간 정도 아스팔트길을 걸었었는데, 지금은 택시 2대가 번 갈라 오르내린다고 한다. 요금은 5,000원. 3시 30분 경 버스정류장에 도착한다. 기다리던 아주머니들은 중간에 있었던 미니 알바 해프닝을 모르니까 생각보다 빨리 왔다고 반긴다. 우선 캔 맥주 5개를 사서, 한 캔씩 마신다. 살 것 같다.
이윽고 동행 한 분도 내려오고, 본격적인 하산주 파티를 위해 동동주와 파전을 주문한다. 상점 주인이 이 사장을 픽업하러 봉고를 몰고 주차장으로 올라간다. 4시가 조금 넘어 이 사장도 도착한다. 힘은 들었어지만 술잔을 앞에 놓고 다시 모이니 한 식구가 된 기분이다. 이 사장이 신고를 하겠다고 계산서를 챙긴다.
비록 몸은 피곤해도, 모두 지리산을 닮아 가는지, 조금은 넉넉해진 마음으로 서울로 향한다.
(2004. 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