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능선에 핀 진달래 2004년 4월 27일, 당일 대간종주 6번째 날이다. 오늘 산행구간은 제9소구간인 『영취산(1시간 40분)⇒전망대(1시간 35분)⇒민령(1시간)⇒깃대봉(1시간 10분)⇒육십령』으로 무령고개에서 영취산까지의 소요시간 30분 정도를 가산하면 5시간 45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는 비교적 짧은 구간이다. 회장님이 마이크를 잡고 인사를 한다. 오늘 참석인원이 27명, 15명 정도를 모시고 산행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우중에도 이렇게 참여한 여러분들은 진정한 산꾼들이라고 추켜세우며 고맙다고 한다. 대간종주를 전문으로 하는 가고파 산우회 산행에는 회원들이 날씨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은근히 자랑까지 한다. 많는 산악회, 산우회 간의 경쟁에서 대간종주로 차별화한 것은 탁월한 전략이라 할 수 있겠다. 비가 오니 스패츠를 작용하라고 권하면서, 여름에도 스패츠는 꼭 가지고 다니라고 당부한다. 오늘 산행은 후미 기준 5시간 30분이란다. 발목 보호가 주 용도라고 해서 숏 사이즈의 스패츠를 샀다가, 롱 사이즈가 편리할 듯 하여 다시 하나를 더 장만했다. 실제로 사용해 보니 발목 보호기능이란 말은 상술인 듯 싶고, 주기능은 눈이나 비가 신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데 있는 것 같다. 부수적인 효과로 아랫도리가 깨끗해서 좋다. 어쨌든 오늘 산행에서는 스패츠 덕을 톡톡히 봤다. 버스가 고속도로를 달린다. 간밤의 폭우로 잠을 설치신 분들이 많은 모양이다. 대부분이 주무신다. 하지만 봄비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차창 밖의 경치에 나는 눈을 돌릴 수가 없다. 빗속의 신록이 더욱 싱싱하다. 먼 산에는 침엽수들 사이에 간간이 연둣빛 신록이 섞여 있지만 나지막한 가까운 산에는 새롭게 피어난 연초록 새잎들로 생명력이 가득 느껴진다. 도로변 군데군데에는 연산홍이 붉은 자태를 뽐내고, 조그만 하얗꽃들이 다닥다닥 붙은 나무들이 군락을 이룬 곳도 있다 과수원을 지난다. 비스듬히 비탈진 과수원에는 키 작은 과수에서 돋아 나온 새잎들의 보드라운 색깔이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빗물을 머금고 황톳빛 대지가 속살을 드러내고 누워 있다. 아름다운 산하다. 고등학교 때인가? 이양하 교수의 "신록예찬"이 교과서에 실렸었다. 신록 속에서 하늘과 바람과 햇살로 우리들의 머리와 마음은 텅 비워지고, 그 비워진 자리에는 새로운 생명력으로 충만해 진다는 내용의 수필로 기억하고 있다. 집에 돌아가면 교수의 수필집을 다시 보아야겠다. 버스는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정차한다. 밖으로 나오니 비는 여전하고, 바람결에 오싹 추위가 느껴진다. 여벌로 얇은 스웨터는 준비했지만, 산 속의 기상상태가 걱정이 된다. 버스는 다시 출발하고 장수 인터체인지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나 다시 정차한다. 당일 대간종주를 위해 기다리던 회원 한 분이 승차한다. 이 분은 제주도에서 대간종주에 참여한다고 한다. 지방도로로 들어서자 2주전에는 벚꽃을 귀엽게 피우고 도열했던 어린 벚나무들이 지금은 꽃은 다 떨쳐 버리고 보드라운 새순으로 곱게 차려입고 우리들을 환영을 한다. 논개 생가를 지난다. 우중인데도 참배 객들이 눈에 뜨인다. 무령고개로 오르는 차창 밖의 경치가 빗속에 아름답다. 짙은 초록, 연초록이 뒤엉킨 사이사이로 철쭉이 무리 지어 피어 있고, 싸리꽃이 한창이다. 저수지가 고즈넉하고, 비구름이 산허리에 걸려있다. 버스는 무령고개 주차장에 도착한다. 빗속에서 점심 먹는 것을 피하려고, 버스 안에서 점심을 먹었더니, 차를 내리자 우선 담배 생각이 간절하다. 화장실 뒤로 가 담배 한대를 피우고 나오니, 회원들 대부분은 벌써 출발하고, 우중 산행준비가 늦은 몇 사람만 쳐져있다. 11시 36분 등산로 입구에 선다. 오늘 산행은 구간이 짧으니 서둘 필요가 없겠다고 주위를 찬찬히 둘러본다. 금남호남정맥이 분기되는 곳이라 그런지 여기저기 안내판, 이정표가서 있다. 서부지방 환경청에서 세운 백두대간 해설판, 등산로 안내도, 전북 산사랑회에서 세운 이정표, 장수군에서 세운 안내판 등 다양하다. 이 중 서부지방 환경청에서 세운 등산로 안내도가 아담하고, 예쁘다. 예산이 어느 정도 소요되는 지는 몰라도 길 잃기 쉬운 곳에 이런 안내도가 곳곳에 세워지면 백두대간 종주의 일반화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산림청에서 세운 등산로 안내도 - 간결하고 아담하다 대간 길 능선 안부로 오른다. 2주 전 똑같은 길을 걸었지만, 느낌은 사뭇 다르다. 지난번에는 삭막하다고 느꼈었는데, 이번에는 완연히 다른 느낌이다. 2주 사이에 초록빛이 훨씬 많아진 때문이다. 30분쯤 오르니 능선안부에 도착한다. 길가에 전북 산사랑회에서 세운 이정표가 서있다. 고개 이름이 선바위 고개다. 별로 크지도 않은 평범한 바위가 하나 우뚝 서 있는데 그 바위이름이 선바위인 모양이다. 어찌 보면 대단치 않은 바위지만, 이처럼 이름을 주고, 애착을 갖는 마음에 내 고장 사랑이 잘 나타나 있다. 영취산 0.4Km. 영취산(1075.6m) - 흔하지 않는 이름이다. "선바위 고개"와 같은 식의 이름 짓기와는 거리가 먼 이름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름 하나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신령 "영자"에 독수리 "취"자를 쓴다고 한다. 인도의 같은 산 이름을 옮겨온 모양이라고 한다. "신묘하고, 신령스럽다"는 뜻이 있고 "산줄기, 물줄기의 요출지"라는 의미가 있어 명명한듯 하다고 한다. 돌탑이 있고, 서부지방 산림청에서 새운 이정표가 있다. 뒤로 보이는 상수리나무에 잎이 돋아나 봄냄새를 풍긴다. 이 외에도 전북 산사랑회에서 세운 정상 표지, 장수군에서 세운 안내판도 보인다. 지나친 중복이란 느낌이다. 교통정리가 필요하겠다. 장수군에서 세운 안내판에는 육십령 11Km, 7시간이라고 표기돼 있다. 산행에서 선두 경쟁을 벌이는 사람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가 궁금하다. 오늘의 구간 제일봉에 올랐으나 유감스럽게도 빗속에서 사방의 시계는 제로다.
영취산의 돌탑과 이정표 영취산에서 내려가는 가파른 곳은 돌로 계단을 만들어, 능선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산사태가 났던 곳도 새롭게 흙을 돋우어 보수를 한 흔적이 보인다. 백운산이나, 월경산 주위의 방치된 비탈길에 비해 훨씬 정성을 들였다. 대간 길은 환경청에서 예산을 확보하여 이정표 등을 포함 모든 것을 일괄 관리했으면 좋겠다. 영취산을 지나 첫 전망대에 이른다. 바위들이 솟아 있고, 반대편 사면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가 바위 위를 기듯 펼쳐있는 모습이 신기하다. 전망대 바위 사이로 난 대간 길에도 봄기운이 완연하다. 덕운봉을 우회하여 또 하나의 전망대에 서 보아도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비구름뿐이다.
영취산을 지나 첫 번째 전망대 위의 소나무
전망대 위를 지나는 대간 길 977봉으로 산죽밭을 헤치고 나아간다. 산죽이 너무 무성해 전진하기도 어렵다는 말에 판초가 거치적거릴 것을 우려해 이를 포기하고, 방수재킷과 방수가 되는 바지를 착용한다, 재킷은 방수효과가 뛰어났으나, 바지는 산죽에 맺혔던 물방울로 허벅지 쪽이 축축하게 젖어 온다. 그래도 산죽밭이 생각보다는 험하지 않다. 아마도 손질을 한 모양이다. 1시 25분경 977봉에 도착한다. 영취산에서부터 약 1시간 20분이 걸렸다. 빠른 진행이다. 마침 빗줄기가 뜸한 사이에 977봉 전망대에서 후미 팀이 점심 도시락을 푼다. 나는 점심을 버스에서 했음으로 소주 한 잔을 나눠 마시고 먼저 출발한다.
산죽밭 속의 대간종주 부부 호젓한 산길을 혼자 걷는 기분이 그만이다. 싸리꽃이 군데군데 하얗게 피어있다. 얼마 걷지 않아 북바위 방향을 가르치는 화살표지가 땅에 꽂혀 있다.색다른 이정표다. 북바위도 평범하다. 선바위처럼 육산에서 바위가 소중했던 모양이다. 아마도 그럴 듯한 전설이라도 담겨져 있는 바위인지도 모르겠다. 내리막길을 지나니 억새밭이 나오고 억새 사이사이로 철쭉군락이 붉게 펼쳐있다. 아직 봉우리가 터지지 않은 철쭉도 많다. 상수리나무 사이로 난 길이 운무에 가려 아련하게 보인다. 길가에는 파릇파릇 새싹들이 고개를 뽀죽 내 밀고 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지만 바람으로 습기는 많지 않고, 공기가 상쾌하다. 오늘은 선경 속을 걷는구나.... 빗속에서 사진을 찍으며 유유히 걷다보니 식사를 마친 후미 팀이 따라온다.
화사하게 핀 싸리꽃
떨어져 누은 낙엽 사이로 새 순이 돋았다.
잎이 돋아난 상수리 나무숲으로 이어진 대간 길이 운무 속에 잠겼다 민령은 어딘지도 모르고 지나쳤다. 아마 돌무더기가 있던 곳인가 보다. 철탑을 지나면서는 완만한 오름 길이다. 힘이들 정도는 아니다. 깃대봉에 도착한다. 시간은 2시 50분 경이다. 깃대봉 정상표지와 깃대봉 조망안내판이 서 있다. 조망안내판에는 할미봉과 덕유산 줄기가 잡혀있다. 국립공원에서 볼 수 있는 규모의 조망 안내판이다. 하지만 지금 조망은 비구름 뿐이다.
깃대봉에 섰다. 육십령으로 내려가는 길도 뚜렷하여 알바의 위험은 없다. 갈대와, 관목사이로 뿌우연 운무 속을 비옷을 걸친 회원들이 줄지어 내려가는 모양이 마치 전투를 끝내고 귀대하는 병사들 모습 같다. 내리막길을 편하게 걷는다. 오른쪽으로 깃대봉 샘이 있다. 파이프로 샘물이 졸졸 흐른다. 물맛이 좋다.
육십령으로 향하는 회원들 육십령에 도착하니 3시 36분이다. 무령고개를 떠나서 꼭 4시간 만에 도착했다. 시계가 제로라 한눈 팔지 않고 줄 곳 걸었기 때문인가 보다. 육십령에 도착하니 얄궂게도 비가 그치고, 낮게 드리웠던 비구름들이 산을 타고 서서히걷히고 있다. 버스에 오르려니 기사양반이 질겁을 하며 막는다. 신발을 닦고 오란다. 신발을 내려다보니 새삼 무신경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화장실로 가 신발의 흙을 말끔히 닦고, 차에 올라 배낭을 자리에 둔 후, 서둘러 육십령 휴게소로 향한다. 식당에서는 하산주 파티가 한창이다. 막걸리 한잔을 마시고, 조정자 할머니를 찾았다. 조 할머니는 1941년 생이지만 건강하고,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인다. 음식 솜씨와 넉넉한 인심으로 대간 꾼들 사이에는 유명인사가 된 할머니다. 인사를 하고 장사가 어떻냐고 물었더니 오는 일요일에도 80명분 예약을 받았다고 환하게 웃는다. 어느 분 산행기를 보니까, 민박하려고 숙박비를 물은 모양이다. 할머니 말씀이 "숙박비는 무슨, 주는 대로 받지." 하더란다. 우리 조상들은 과객을 소홀히 대접하지 않는 전통이 있다. 아마도 산행기를 쓰신 분은 할머니 대답을 이런 전통의 흐름으로 이해하고 흐믓했던 모양이다.
1941년 생인 조정자 할머니는 대간꾼들 사이에서 인기가 "짱"이다. 버스는 4시 10분경 서울로 출발한다. 날씨가 개이면서 차창으로 보이는 풍광이 그만이다. 비가 개이자 신록이 더욱 돋보인다. 우리의 산들은 크지도 작지도 않고 아담하다. 개울도 그렇고 강도 알맞은 크기다. 늦은 봄, 초여름에 신록을 등지고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마을을 이룬 모습이 지나 간다. 이 시기의 우리의 산하는 그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한 멋이 세계에 제일이라 해도 지나치니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이 아름다움 속에서 살 수 있다는 것에 새삼 감사하는 마음이 된다.
달리는 버스 차창을 통해 본 아름다운 우리 산하. 버스는 7시 15분경 동서울 톨게이트를 통과한다. (2004. 4. 28)
에제 밤에는 그처럼 사납던 비바람이 지금은 부슬비로 변했다. 한참 가물다내리는 단비지만 남부지방과 영동지역에는 호우주의보가, 강원도 산골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렸다. 낮 기온이 30도를 웃돌아 한여름이 다 됐다고 하던 것이 며칠 전의 이야기다. 겨울과 봄과 여름이 공존하는묘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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