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산 오르기
2004년 5월 11일. 당일 백두대간 종주 7번째 산행일 이다. 덕유산이 출입통제라 부득이 구간을 뛰어 넘어 제12소구간인 『빼제⇒된새기미재⇒덕유 삼봉산⇒소사고개⇒삼도봉⇒대덕산⇒덕산재』를 타게 된다. 도상거리 16Km, 빼재와 삼봉산의 고도 차가 약 330m, 소사고개와 대덕산의 고도 차는 410m나 된다. 당일 산행으로는 쉽지 않은 구간이다.
버스가 동서울 톨게이트를 벗어나 고속도로를 달린다. 어제까지 내린 비의 뒤끝이라 그런지 태양은 운무 속에 가려 제 빛을 잃고 있다. 산줄기가 버스와 함께 달린다. 산이 세겹으로 보인다. 먼 산은 희미하지만 운무 속에서도 능선의 흐름은 뚜렷하다. 가운데 산들이 검프르게 보이고, 눈앞의 산들은 신록이 무성하다. 신록은 이미 야들야들하고 보드라운 맛을 잃었지만 운무 속에 보이는 산의 흐름은 신비롭기까지하다. 벌써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다. 창을 열면 아카시아 꽃 향기가 차안에 가득할 듯 싶다.
음성을 지나자 제법 넓은 들이 펼쳐진다. 어제 내린 비로 논마다 물이 가득가득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요러워진다. 대전을 지나니 운무가 걷히면서 신록이 더욱 싱그럽다. 문득 피천득 선생의 <오월>을 떠올리며 그 일부를 인용해 본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
버스가 무주 인터체인지에서 고속도로를 버리고 국도로 들어서자 산우회 회장은 오늘 산행에서 주의 할 사항과 산행시간 기준을 알려준다. 선두 5시간 40분, 후미 7시간. 이윽고 버스는 11시 10분경, 빼재에 이르러 신풍령 휴게소 주차장에 도착한다.
문 닫은 신풍령휴계소
빼재(920m) - 높은 고개다. 그래서 도둑이 웅거하고, 이들이 잡아먹은 산짐승 뼈가 고개에 널려 있었다해서 뼈재, 이것이 경상도 된 발음으로 빼재가 됐다고 하지 않는가? 이 이름이 촌스럽다고 생각했나? 신풍령(新風嶺)과 수령(秀嶺)이란 유식한 이름이 2개가 더 생겼다. 같은 구간의 된새기미재, 호절골재등을 생각해서라도 빼재로 통일됐으면 좋겠다. 새로운 도로들이 생겨서 국도이지만 차량 통행이 많지 않은지, 신풍령 휴게소와 그 앞의 주유소는 문을 닫았다.
도로를 건너 돌이 많은 가파른 사면을 10여분간 오르니 능선이다. 오르막이 급해진다. 버스에 앉아만 있다 걸어서인지 정강이 뒷 근육이 당기는 기분이다. 사진을 찍느라 제일 뒤로 쳐졌지만 조심하며 천천히 오른다. 수정봉에 올랐어도 잡목으로 시야가 가리고, 먼 산도 지상에서 수증기가 오르는지 흐릿하기만 하다. 내리막길에서 속도를 높여 앞 사람들을 따라간다.
된새기미재는 잡목과 억새로 덮여 있다. 다시 완만한 경사 길을 오르다가 멀리 삼봉산을 본다. 어느새 호절재골도 모르고 지나쳤다. 오름 길에서 뒤돌아 수정봉쪽을 본다. 가까이 보이는 수정봉의 신록이 곱다. 12시38분 경, 삼봉산(1254m) 정상에 오른다. 산행 시작부터 약 1시간 25분이 경과했다. 비교적 빠른 진행이다.
뒤 돌아 본 수정봉 - 신록이 곱다
멀리서 본 삼봉산 - 둘째 봉우리가 정상이다.
삼봉산 정상에는 거창산악회에서 세운 정상석이 있고, 누군가가 쌓아 놓은 돌무더기가 있다. 안내판 하나가 조촐히 서 있을 뿐 그 흔한 이정표도 없다. 특이한 것은 돌무더기 아래, 주의해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위치에 누가 “진달래”라는 시(詩)판을 박아 놨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진달래가 불붙은 대간 길을 가면서 진진(眞眞) 만을 생각하겠다는 산사나이의 맹서다.” 진진이가 누굴까? 연인이 이었을까? 아니면 사고로 잃은 산 동료인가? 애절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호방한 감이 느껴진다.
삼봉산 정상
전망이 좋은 위치지만 수증기 때문인지 시야가 흐려서 아쉽다. 북동쪽으로 삼도봉 방향을, 오른쪽으로는 거창군 봉산리 마을 쪽을 내려다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후미팀 사진을 찍고, 무릎 보호대를 올려 착용한 후, 암봉으로 이어지는 대간 길로 내려선다. 조그만 암봉이지만 우회로가 왼쪽으로 나있다. 암봉에 올라서니 오른쪽은 천길 낭떠러지다. 사방이 확 트였지만 시야가 좋지 않다. 암봉을 내려서니 소사고개로 내려가는 길이 바로 왼쪽에서 거의 90도 각도로 떨어진다. 어제 내린 비로 물기가 많다. 조심조심 급경사 길을 통과하고, 비박굴도 지나친다.
내리막 길은 여전히 경사가 심하고 미끄럽다. 후미팀을 쫓아 급히 내려오다 튀어나온 바위 모서리에 오른쪽 정강이를 가볍게 부딪친다. 가볍게 부딪쳤고, 무릎 보호대 위라 충격을 흡수했을 터인데도 소사고개에서 보니 무릎 바로 아래가 혹처럼 부어 오르고 피가 나와 있다. 조심해야겠다.
삼봉산 - 암릉으로 이어진 능선
소사고개가 가까워지며 밭이 보인다. 텅빈 밭에는 밭을 다시 일구려는지 중장비가 밭가에 세워져 있다. 소사고개에 이르기 전에 전망이 트인 곳에서 삼도봉을 카메라에 담고, 뒤돌아 삼봉산을 바라본다. 깎아지른 절벽이다. 저 능선을 걸어서 내려 왔구나... 스스로 감탄한다. 소사고개 아래 가게에 도착한 것은 1시 45분 경이다. 산행 시작 후 약 2시간 30분이 경과된 시간이다. 선두 구룹이 점심을 마치고 삼도봉으로 출발 준비를 하면서 쉬고 있다. 가게가 있다기에 시원한 맥주 한 컵을 기대했었는데, 가게문은 굳게 닿혀있고, 인기척도 없다.
소사고개 쪽에서 본 삼봉산 - 배추밭 가로 하산하는 회원들이 보인다.
소사고개 쪽에서 멀리 본 삼도봉
대간 길과 고랭지 채소밭을 보니, “대간”과 “산맥”에 관해 이야기가 하고 싶어진다. . 동일한 산줄기에 2가지 명칭이 사용되는 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간”에 관한 자료들은 “오케 마운틴” 홈페이지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리학계에서는 “대간”을 어떻게 보고 있고, “산맥”을 족보(교과서)에 올린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지리학자들이 쓴 관련 자료를 접할 수가 없어 답답했다. 우리나라 지리학회 2곳의 홈페이지도 방문해 봤지만, 도움을 얻지 못하고, 생각 끝에 서울대학교 지리학과 홈페이지를 찾았다. 주로 학사 관련 사항을 다루는 게시판에 위에서 느낀 궁금한 사항을 이야기하고 지리학자들의 자료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엉뚱한 곳에 물어서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일주일쯤 지난 후 친절한 분이 대답을 주었다. 자기도 유사한 의문을 가졌었는데, 『지식정보사회의 지리학 탐구』라는 책에서 관련된 부분을 보고 많은 도움이 된 바가 있어 그 책을 추천한다는 내용이다. 고마운 분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이 책과 그리고 『백두대간의 자연과 인간』을 구입해서 관련 부분을 보고, 이해의 폭을 넓힐 수가 있었다. 결론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대간”과 “산맥”을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산줄기 체계가 지리학계의 연구로 잡혀가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백두대간”은 우리의 훌륭한 유산임으로 보전되고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산악인들을 중심으로한 “백두대간” 되 찾기 움직임이 큰 반향을 일으켜, 학계에서도 자성하고 있고, 환경청과 산림청은 대간의 보존, 관리를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간 보전, 관리를 위한 범위를 대간 능선을 기준하여 좌우로 700m씩의 폭으로 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소사고개의 고랭지 채소밭을 보면, 그렇게 획일적으로 정하기보다는 위치에 따라 신축성을 두는 게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소사고개를 출발, 배추밭을 끼고 삼도봉으로 향한다
2시경 삼도봉으로 출발한다. 채소밭을 지나지 말라고, 밭주인이 붙여 놓은 둔탁한 등산로 표지판이 밭두덕에 세워져 있다. 이것이 오늘 본 유일한 이정표다 . 채소밭을 지나 삼도봉 능선으로 오르는 가파른 길로 향한다. 6차례 대간 구간을 산행하다 보니 이제 점차 요령이 생긴다. 가파른 오름 길은 보폭을 좁히고 두 걸음 걷고 한 걸음 쉰다는 리듬으로 천천히 쉬지 않고 진행한다. 속도는 정상 속도의 1/2 정도로 늦어지지만 꾸준히 전진할 수가 있다.
한시간 이상을 올라도 삼도봉 능선 길은 아직이다. 길 왼쪽으로 철쭉과 갈대 속에 하얀 꽃을 화사하게 피운 나무 한 그루 홀로 서 있고, 그 나무 위로 삼도봉 정상이 가까이 보인다. 이 나무를 카메라에 담고 조금 더 오르니 능선 길이다. 거추장스런 잡목은 없지만 여전히 경사가 급한 오르막이 계속된다. 3시 30분 경이면 도착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정상은 아직도 멀다. 선두구룹은 벌써 지났지만 뒤에 쳐져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오르는 다른 회원들도 무척 힘들어한다.
억새가 누워 있는 평평한 지점을 거쳐 다시 오름세를 탄다 정상 가까이에서 오른쪽으로 암봉이 보인다. 이어서 삼도봉 정상(1247.4m)에 오른다. 좁은 공간에는 삼도봉 표지석이 나지막하게 달랑 서 있을 뿐 역시 이정표도 없다. 정상에 도착한 시간은 3시 45분, 기준시간 보다 25분이나 더 걸렸다. 사진을 찍고 음료수를 마시며 쉰다.
삼도봉 정상 - 정상표지석만 초라하게 서 있다
삼도봉에서 본 대덕산
삼도봉 정상에서 대덕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조금 내려서니, 대덕산의 완만한 능선이 눈앞에 펼쳐진다. 어느 분이 산행기에서, 이 능선 모양을 어머니 젖무덤 같다고 표현한 것을 본적이 있다. 아주 그럴듯한 표현이다. 내리막을 지나 완만한 오르막이 계속된다. 나지막한 철쭉과 갈대사이로 길이 나 있다. 경사는 그리 급하지 않으나 삼도봉 오르느라 힘을 많이 써버린 후라 오르기가 쉽지 않다. 한 굽이 올라 정상인가 싶으면 가려있던 봉우리로 길이 이어진다. 봉우리 두 개를 지나서야 어머니의 첫 번째 젖무덤에 이르러 마주 보이는 정상으로 향한다. 4시 40분경 대덕산 정상(1290m)에 도달한다.
대덕산-첫 오름
대덕산-둘째 오름
대덕산-세째 오름
정상은 널찍한 헬리포트다. 먼 시계는 역시 흐릿하다. 서쪽 방향으로 덕유산 능선이 아련히 보인다. 한쪽 옆에 안내문이, 하산 길 쪽으로 정상석이 세워져 있다. 역시 이정표도 없다. 취영산 정상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간단하다. 이윽고 회장님이 후미 팀과 도착한다. 주위 산에 대한 설명을 듣고, 4시 55분경 8명의 후미구룹은 덕산재로 향해 출발한다.
대덕산 정상-주변 산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가파른 길이다. 20분쯤 내려서니 얼음골 약수터에 도달한다. 물이 차고 맛이 좋다. 회장님은 대간 길에서 제일 물맛이 좋은 약수터라고 소개한다.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물을 마시고 한숨 쉰 후 다시 하산한다. 경사가 급하다보니 산사태가 난 곳이 여기 저기 눈에 뜨인다. 물소리가 들린다. 골짜기는 보이지 않고, 하산 길은 물소리를 버리고 왼쪽으로 굽어진다.
경사가 완만해 지더니 안부를 지나 대간 길은 다시 나지막한 언덕으로 이어진다. 이 언덕을 넘으니 바로 덕산재 포장도로로 연결되는 임도로 내려선다. 버스는 주유소 주차장에 서 있고, 먼저 내려온 회원들은 하산주를 즐기며 쉬고 있다. 덕산재에는 대덕산 관광안내판 하나가 달랑 임도 쪽으로 세워져 있다. 이 지역은 왜 이정표에 그렇게 인색한지 모르겠다. 후미구룹이 하산한 시간은 6시경이다. 선두 팀은 5시 40분경에 도착했다 한다.
버스는 6시 15분 서울로 향한다. 버스가 라제통문을 통과하자, 왼쪽으로 새로 생긴 휴게소가 보인다. 회원들이 관심을 보이자 버스는 라제통문 휴게소에서 10분간 정차한다. 라제통문 주위는 깔끔하게 정비돼 있었다. 통문 위로 깃발들이 꽂혀있고, 차량 왕래도 빈번하다. 통문 앞을 흐른 너른 개천에는 어제 비로 수량이 늘어서인지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린다. 버스는 다시 서울로 출발한다.
오창휴계소에서 15분간 정차한 버스는 계속 달려 9시 40분경 동서울 톨게이트를 지난다. 10시 45분 집에 도착한다. 만보계를 열어 보니 32,689보가 기록돼 있다. 오월의 신록을 한껏 즐긴 산행이였다.
(2004.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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