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딸”로 알려진 한비야 여사는 58년 생이다. 그러니 한 여사도 40대 중반을 넘어, 50에 가까워지고 있다. 1993년 7월부터 1998년 6월까지 만 6년 동안, 지구를 세 바퀴 반을 돌아, 65개국을 걸어서 여행을 했던 한 여사는 지금은 NGO인 월드 비젼에서 난민구제에 헌신하고 있다.

 

한비야 여사는 15세 때 부친을 잃는다, 어려운 환경에서, 장학생으로 홍익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국제홍보학 석사과정을 마친다. 귀국하여 국제홍보회사인 버슨-마스텔라에서 3년 간 근무하며 여비를 모은 후, 미련 없이 모든 것을 털어 버리고, 어렸을 때부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여행을 떠난다. 보통사람들은 할 수 없는 결단이다. 그래서 “바람의 딸”이라는 별명도 얻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한평생을 거침없이 살아가는 흔치않은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부럽다.

 

세계일주를 마친 한여사는 1999년 3월 2일, 우리나라 국토종단 길에 나선다. 전남 해남 땅끝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약 800Km의 여정이다. 4월 20일 오색에서 대청을 오르고, 중청대피소에서 일박 후, 소청으로 가는 길에 공룡능선을 바라보며 한여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래서 공룡능선을 타다보면 백두대간 종주 중이라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된다. 목적지를 목전에 둔 사람들이어서인지 피곤한 얼굴이지만 아주 밝고 맑다. 그들을 보면 정말 부럽다. 나도 언젠가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싶다. 아니 꼭 할 거다.』 한비야여사가 이렇게 쓰고 있으니 언제, 어떤 방식으로 할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할 거라고 생각한다. 50 전후의 여사라 단독, 논 스톱 종주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하지만, 누가 알랴? 힘은 집중하는데서 나오는 것이고, 한여사 정도의 집중력이라면 예상을 넘어, 과감하게 논 스톱, 단독종주에 도전해 볼지도 모를 일이다.


당일 산행 백두대간 종주는, 3월 23일, 4번째 산행을 한다. 구간은 『사치재⇒사리봉⇒복성이재⇒다리재⇒봉화산⇒송리』, 도상거리 14Km에 서비스 거리 2Km, 총 16Km에 이른다. 소요시간은 6시간이 기준이다.


이 구간의 대간 길은 전라북도 장수군의 아영면과 변암면을 동서로 나누며 느슨한 S자모양을 하고 북동쪽으로 달린다. 사치재, 새맥이재, 복성이재, 치재, 꼬부랑재, 다리재등 유난히 재가 많다. 여기저기 산불로 송림이 훼손되고, 그 자리에는 갈대와 옮겨 심은 철쭉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백제와 신라의 싸움터 이었던 아막산성이 허물어진 모습으로 남아 있고, 치재에 서면 흥부마을로 유명한 아영리 성리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유사시 봉화를 올렸던 봉화대는 봉화산에서 동북쪽으로 1Km쯤 떨어진 이름 없는 봉우리에 있다고 한다. 봉화산은 7년 전의 산불로 나무들은 전부 소실되고, 지금은 무성한 갈대가 산봉우리를 온통 덮고 있다. 봉화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지리산 능선이 희미하게 보인다.


들머리인 사치재(500m)와 봉화산 정상(919.8m)간의 고도차가 제법 있고, 중간에 아실재, 새맥이재, 복성이재등 500m 대의 고개(재)에서 700m대의 봉우리 3개를 넘어야 치재에 이른다.게다가 치재에서 봉화산으로 오르는 약 4Km의 길은 키 큰 철쭉 군락군과 갈대 숲이라 등 뒤로 내려 쪼이는 햇빛을 막아주는 그늘도 없다. 만만한 코스는 아니다. 출발 전 산우회에서 식수를 충분히 준비하고, 천천히 걸으라고 주의를 주던 이유를 알겠다.


〈 봉화산 정상에 오르다 뒤돌아 본다 - 걸어 온 길〉


사치재를 출발한 후 약5시간이 지났다. 오늘 지나온 길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으로 88올림픽 도로가 보이고, 가운데 뾰족한 봉우리가 시리봉, 잘룩이를 지나 평평하게 이어진 끝 부분이 781m봉, 그리고 바로 앞 치재까지 S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능선 오른쪽이 변암면, 왼쪽이 아영면이다. 봉화산은 등 뒤에 있다.


날씨가 따듯해지자, 버스 안에서 눈치보며 점심을 먹어야 할 이유가 하나 줄었다. 버스 안의 식사가 일석이조가 아닐 바에야 산에서 점심을 먹기로 방침을 바꾸고, 복성이재에서 후미 팀 점심에 뒤늦게 끼어 들었다. 하지만 너무 식사를 서두르고, 식사 후 바로 출발한 것이 탈이 됐다. 치재로 향하는 첫 번째 오르막길에 몸에 이상이 느껴진다. 가슴이 답답하고, 진땀이 난다. 배에 힘이 하나도 없고, 두 발은 천근이다. 급히 먹은 점심이 위에 큰 부담이 된 모양이다. 젊었을 때야 별일 아니었겠지만, 나이가 든 몸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이 무리인 모양이다. 운동 에너지와 소화를 시키기 위한 에너지가 동시에 필요한데, 호흡을 통한 산소 공급량은 한정이 되다보니, 두 가지가 모두 신통찮다. 두 발은 납덩이처럼 무겁고, 소화도 되지 않아, 진땀만 솟는다.


<후미 팀마저 이미 정상에 섰다. - 몸에 탈이나 후미 팀에 10여분이나 쳐졌다>


후미 팀에서도 쳐져 두 걸음 걷고, 한 걸음 쉰다. 오늘 산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마저 든다. 산에 와서 이렇게 애를 먹어 본 적도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힘들어하는걸 눈치챈 회장님이 천천히 오라면서 앞서 나간다. 세련된 매너이고, 고마운 배려다. 천신만고 끝에 봉화산 정상에 오르니 이 때쯤에는 소화도 어느 정도 된 듯 몸상태가 많이 좋아진다.


〈 봉화산 정상에서 본 대간 길 - 갈대밭에 철쭉 군락과 어린 소나무가 보인다 >


봉화산 정상에서 한숨 돌리고 하산 직전에 찍은 사진이다. 7년 전의 산불로 봉화산 봉우리는 온통 갈대밭이다. 군데군데 철쭉이 무더기를 이루고, 어린 소나무들이 성글게 박혀 있다. 관광지를 만들기 위한 방화였다는 설도 있지만, 확인된 바는 없고, 어찌됐건 이제 봉화산은 철쭉제로 꽤나 알려진 명소가 됐다.


송리마을로 내려가는 길 찾기가 꽤 까다롭다. 하산 길의 임도가 보이고, 마을도 멀리 보이지만, 임도와 등산로의 구분이 애매하여, 갈대와 철쭉 사이에서 헤맬 가능성이 크다. 낮에야 별일 아니지만 어두울 때는 꽤 황당할 수도 있겠다. 요즈음은 백두대간 종주를 마친 선배님들의 종주기를 쉽게 찾아 볼 수 있어, 산행 전에 산행코스가 대강 머릿속에 입력이 되지만, 서둘러 하산하다보니 이 지점에서 정규 등산로를 벗어나, 길 없는 사면에서, 갈대를 헤집고 한참을 헤메다, 가까운 임도로 내려섰다.


〈봉화산 정상에서 본 지리산 능선〉

별 사진이 안되리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멀리 희미하게 누워 있는 지리산 연봉을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를 못하고 또 샤터를 누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4번째 소구간 산행이다. 꽤나 멀리 온 느낌이다.

 

 

〈사리봉을 지나면서 멀리 바라 본 봉화산이다. 〉


멀리보이는 봉화산은 온통 누렇다. 등산로는 치재에서 왼쪽으로 앞의 누런 봉우리를 지나 오른쪽 정상으로 이어 진다. 앞으로 봉화산은 봄에는 철쭉으로, 가을이면 억새로 유명해질 듯 싶다. 복성이재에서 정상까지는 2시간이면 충분하고, 복성이재는 포장도로가 나 있다.

 

 

〈치재에서 내려다 본 아영면 성리마을〉


흥부전은 픽션으로 알았는데, 성리마을이 흥부마을이라는데 놀랐다. 판소리에 나오는 화초장 바윗거리, 흰죽배미, 노리다리등의 지명이 실제로 있다고 하니 신기롭기까지하다. 4-5월 봉화산의 철쭉제를 즈음하여 많은 관광객이 모여든다고 한다.

 

 

<허물어진 아막성터와 돌탑>


1,400여년 전 백제와 신라의 격전지. 서기 602년 백제 무왕은 신라가 점유하고 있던 아막산성을 공격한다. 이 전투에서 백제는 총 군세의 2/3인 4만 명을 잃는 막대한 손실을 입으나성을 뺏지는 못한다. 백제는 무왕의 장남인 의자왕 때 결국 나라가 망한다. 성은 허물어지고 빈터인데, 대간 길은 오른쪽 성벽으로 나 있다. 누군가 허물어진 돌을 쌓아 돌탑을 만들어 원혼을 위로한다.

 

<781m봉을 오르는 회원들이 억새 사이로 보인다.>


781m봉에서도 산불이 났던 모양이다. 불에 타서 억새밭으로 변한 곳과 소나무가 남아 있는 곳이 확연히 구분된다. 781m봉 위에서니 사방이 확 트였다. 앞으로는 봉화산으로 가는 길이 뚜렷하고, 왼쪽으로는 산과 골짜기가, 오른쪽으로는 아영면의 마을들이 평화롭게 누워있다.


<선두는 벌써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 697m으로 향하고 있다〉


697m봉 주변은 94년, 95년 겨울 연 다른 산불로 억새만 무성하고, 키작은 소나무들이 드믄드믄 보인다. 전형적인 육산인 이 구간에는 암릉도 없다. 산불이 나지 않은 곳은 울창한 송림이 복성이재까지 이어지지만 중간중간 산불이 났던 곳은 억새 밭이고 철쭉 군락지이다. 관광지로 만들기 위한 방화라는 설도 있으나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다.


〈후미가 송리마을로 들어선다〉


여자회원 한 분이 다리에 이상이 생긴 모양이다. 앞으로 걷기가 힘들어 동료의 부축을 받으며 뒷걸음으로 송리마을로 들어선다. 힘은 들어도 얼굴은 웃는다. 버스가 보이는 곳에서 등반대장이 마주 달려와 회원의 배낭을 대신 들어준다. 아마도 선두팀은 하산해서 한시간 이상을 버스에서 기다렸을 터인데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는 사람이 없다.


버스에 도착하니 6시 10분이다. 약 6시간 30분을 걸은 셈이다. 막걸리 한잔을 마시고 자리에 앉으니 한결 살 것 같다. 버스는 6시 20분 서울을 향해 출발한다. 지난번 만복대 구간보다 약 20분이 늦은 셈이다.


집에 도착하니 11시쯤 됐다. 얼굴이 창백하고, 목소리가가라앉은 것을 보고 집사람이 속이 많이 상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힘들면 나이를 생각해서라도 그만 두라고 퉁명스럽게 핀잔을 주더니, 저녁은 어떻했냐는 소리도 없이, 휭하니 혼자 침실로 사라진다.

 

 

(2004.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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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Urim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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