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봉에서 본 바래봉>
백두대간은 기회가 있으면 한번 종주를 해보고 싶다. 등산 전문가도 아닌데다, 마땅한 동반자도 없다보니, 산악회의 안내를 받을 수 밖에 없지만, 산악회에서 36회 정도로 분할, 12시간 이상을 무박산행하는 프로그램에는 참여할 엄두가 나질 않는다.
가고파 산우회에서 당일 산행으로 꾸며진 백두대간 종주 회원을 모집한다. 2004년 2월 10일부터 2006년 3월 14일까지 도상으로 총 745Km(구간을 연결하는 써비스 거리를 포함하면 총 807Km) 를 50회로 나누어 매월 둘째, 넷째 화요일에 산행한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어 용기를 내서 참여키로 했다. 다른 회원들에게 짐이 되지 않고, 또 일단 결정한 이상 완주를 해야겠기에 담배도 끊고, 꾸준히 체력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한다.
2004년 2월 10일 오전 6시 55분 경, 선릉역 1번 출구에 버스가 도착하고, 가고파 산우회 회장이 반갑게 맞는다. 내변산 산행시 인사는 했으나 아직 이분 성함도 모른다. 다른 때와 달리 이번 종주에는 40여명 이상이 참여했다고 즐거워하면서, 만복대에 눈이 많이 쌓여, 제3소구간은 포기하고, 제4소구간을 먼저 오를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한다.
버스에 오르니 좌석 앞 포켓에 등산지도, 고도표, 그리고 백두대간의 의의와 산행시 주의사항이 담긴 유인물이 준비돼 있다. 산행시 주의사항은 앞으로 계속 유의해야 할 사항이기에 그 그 주요 내용을 여기에 옮긴다.
● 일출 시까지는 선두 진행요원을 앞지르지 말자.
● 능선에 오를 때까지는 휴식은 서서 자주 취하고 땀이 식기 전에 출발하자.
● 백두대간 종주 리본을 확인하며 진행하자.
● 봉우리에 서면 항시 나아갈 방향 능선과 지나온 방향의 능선을 조망하자.
● 추억거리를 만들기 위해 특기사항(봉우리, 고갯길, 지난 능선과 지날 능선 등)을 촬영, 메모하자.
8시 40분 경 버스는 음성 휴게소에 도착, 아침식사를 하도록 20분간 정차한다. 10시 35분 경 덕유산 휴게소에 잠시 머물고, 11시 10분 경 함양 분기점에서 내려 24번 국도를 탄다. 버스가 국도로 접어들자 나는 준비해간 도시락을 풀었다. 새벽에 집에서 떠나기 전 6시가 못 돼서 아침을 먹었음으로 점심을 먹을 때도 됐고, 추운 산보다는 버스 안이 아늑해 좋다. 도시락은 토스트 3쪽 분량에, 쨈과 콩 버터를 넣어 집사람이 사과 6쪽과 함께 준비한 것이다.
냄새는 피우지 않지만 다른 회원들에게 미안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산에서 전진 속도가 느린 내게는 점심을 차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어 눈 딱 감고 결행한다. 당일 산행시 내가 준비하는 것은 이 도시락 외에, 미숫가루에 인삼분말과 꿀로 만든 음료수 약 500cc, 포카리스웨트 한병, 보온병에 커피, 초코렛과 사탕, 그리고 약간의 위스키나 꼬냑 정도다.
11시 45분 경 버스가 운봉에 도착, 60번 국도로 접어들며 정차한다. 회장은 성삼재가 장비를 동원한 제설작업으로 폐쇄가 됐고, 만복대의 눈이 허리까지 싸여, 불가피하게 제4소구간인 수정봉 코스로 변경해야겠다고 양해를 구한다. 12시 10분 경 버스는 고기리 삼거리에 도착, 하차한 회원들이 등반채비를 차린다. 갑작스런 코스 변경 때문일까? 결단식 기념촬영도 없이 일행은 회장의 유도로 가재마을로 향한다
<수정봉을 향하여>
730번 도로를 걷다가 버스 정류장에서 왼쪽으로 난 씨멘트 길이 가재마을로 가는 길이다. 오른 쪽으로는 고리봉이 보이고, 2시 방향으로 철쭉으로 유명한 바래봉이 하얀 눈을 이고 서있다. 가재마을은 산자락에 자리잡은, 어디서고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마을이다. 백두대간이 이러한 마을을 관통한다는 것이 이상하지만. 우리 선조들의 산에 대한 개념, 즉 산경원리(山經原理)를 이해하면 고개가 끄덕여 진다. 선조들은 산자락 앞의 들까지를 포용한 하나의 덩치를 산으로 보았다고 한다. 조상들은 우리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물뿌리(水分岐)로, 모든 생명체의 시작인 물의 산지로, 산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산은 저 혼자만의 산이 아니라 크고 유명한 산이나 해안가 낮은 구릉의 이름 없는 산이라도 모두 하나로 이루어진 산줄기로 보았다고 하니 백두대간길이 마을을 관통하는 게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겠다.
도룡용이 산다는 노치샘을 들여다보고 산으로 향한다. 한 낮이건만 마을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고, 갑자기 많은 발자국 소리에 놀란 개들만 컹컹 짖어댄다. 산은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다. 앞서 산행한 분들이 밟아서 50Cm 정도 폭으로 내 놓은 등산로가 능선을 향해 구불구불 오르고 있다.
<노치샘 >
가재마을과 수정봉의 고도 차이는 약 300m 정도로, 200m까지는 경사가 급하고, 나머지 100m 차는 완만한 오름세를 보이다가 봉우리 아래서 다시 급해 진다. 환갑, 진갑이 다 지난 나이에 마음만 젊어, 용기를 내여 참여는 했지만, 오르막길은 여전히 힘겹다. 뒤에서 오던 회장님을 중심으로 한 젊은 회원들이 오름 길에서 앞질러 나간다.
능선에 오르니 경사가 완만해 지고, 오르내림이 반복되어, 아이젠을 착용했다. 하얗게 눈 덮인 산이 고즈녁하고, 코끝의 공기는 시릴 정도로 상쾌하다. 오르막을 오르면서 솟은 땀에 스쳐 지나가는 바람결이 더 없이 시원하다. 잡목들에 가려 전망은 좋지 않으나 적당히 오르내리는 등산로를 산책하듯 여유 있게 걸으니 기분이 최고다.
한 시간쯤 걸어 오르자 양지 바른 무덤 가에 회장님을 비롯한 한 무리의 회원들이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 온 산이 눈으로 덮였는데, 무덤 주위의 꽤 넓은 공간에 금잔디가 두드러져 보인다. 회장님이 소주를 한잔 따라 주며 반긴다. 안주로 족발이 푸짐하다. 족발을 뜯으며 바라보니 정면으로 보이는곳이 고리봉, 그 오른쪽으로 정령치가 보이고, 더 오른쪽의 높은 곳이 만복대인 모양이다. 산자락 아래로 넓은 평야가 펼쳐 있다. 가히 명당 자리라 하겠다. 저 아래가 황산벌이라 한다.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크게 무찌른 곳이다. 왜구의 발호가 얼마나 심했으면 이 곳까지 뻗쳤을까? 그들은 어디로 들어 왔을까?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왔나? 궁금한 게 많기도 하다. 기회가 있으면 찾아봐야겠다. 사과도 한쪽 얻어먹고,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먼저 다시 오름세를 탄다. 오름세가 끝나자 다시 무덤이 2-3기 보이고, 회원 두 분이 점심을 드신다. 역시 무덤 주위에는 눈이 자취도 없다. "식사 하시죠.", "먹었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인사를 나누고 다시 길을 재촉한다.
<양지바른 무덤가의 점심>
<정령치, 고리봉, 만복대>
길은 다시 가팔라지고 점심을 끝낸 회원들 한 무리가 다시 앞지른다. 회장님이 빠진걸 보면, 아마 후미를 보시는 모양이다. 이쯤이면 수정봉 정상이 나타날 때가 됐는데도 정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도 선행한 분들이 시간을 재촉하느라 정상으로 향하는 길을 버리고 봉우리 사면을 타면서 만들어 논 눈 위의 발자국을 따르다 보 니 지나친 모양이다.
길가 왼쪽으로 또 한 기의 무덤이 보인다. 이제까지의 무덤과는 달리 하얀 눈을 소복이 이고 있다. 무덤 왼쪽으로는 가파른 낭떠러지다. 묘한 곳에 외로운 묘를 보고 카메라를 꺼내 각도를 잡는데, 뒤따라오던 50대쯤으로 보이는 중년 부부가 걸음을 멈춘다. 방해를 하지 않겠다는 배려다. 가벼운 목례를 하고, 먼저 지나가시라고 손짓을 한 후 무덤을 향해 샷터를 누른다. 부부가 함께 백두대간 종주를 시도하다니 얼마나 큰 행운인가? 다 같이 산을좋아해야겠고, 체력도 뒷받침 돼야하지 않나? 집사람은 청계산 정도는 오르지만, 2시간 이상 산행할 체력이 못된다. 부부가 나란히 등산하는 모습은 보기가 좋다. 무척 부러운 모습이다.
<흰 눈을 소복히 이고 있는 묘>
길은 줄곧 내리막이 계속되더니 평탄한 길을 거쳐 다시 오름세로 바뀐다. 아마 이 곳이 입망치인 모양이다.언덕을 다 올라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오니 왼쪽으로 임도(林道)가 하얀 눈에 덮여 골짜기로 뻗어 있다. 눈은 발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다. 오른쪽 임도에는 눈 위에 발자국으로 길이 나 있다. 오른쪽 임도를 따라 내려가면서 혹시 길을 잘못 잡은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면 마을 쪽으로 내려가는 것 같은데, 벌써 다 왔단 말인가? 사진도 찍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보니 앞선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뒤따라오는 사람들도 없다. 임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군데군데 나뭇가지에 백두대간종주 리본이 걸려있었지만 이 주위에는 그런 표시도 없다. 길을 잘못 든 건가? 하지만 줄 곳 발자국을 따라 왔음으로 마음은 불안하지 만 계속 내려간다.
오른쪽으로 샘이 보이고, 누군가가 치성을 드리는지 샘 가에는 촛불이 켜져 있지만 인적은 없다. 샘물로 목을 축이고, 왼쪽으로 굽은 임도를 따라 계속 내려온다.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다. 창고 같은 집 한 채가 보이고 임도를 가로질러 시멘트 길이 누워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여원재 못 미쳐 시멘트 도로가의 창고>
화살표로 방향을 표시한 가고파 전단지가 길 위에 돌로 눌려 있다. 비로소 안심하고 전단지가 가르치는 방향으로 올라가니 주지사 이정표가 보이고, 다시 가고파 전단지가 여원암 쪽으로 방향을 가르친다. 여원재에 다 온 것이다. 저 아래로 앞서 내려온 회원들이 마치 행군하는 군인들처럼 24번 국도를 따라 남원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이제는 서두를 것도 없다. 마음이 느긋해 진다.
24번 국도 버스정류소에서 아이젠을 풀고, 미숫가루 음료수를 마신다. 느긋하게 담배도 한 대 피운 후 회원들이 간 길을 따라 내려간다. 길가에 버스가 대기해 있어 배낭을 자리에 놓고, 건너편 길가 공지에서 막걸리로 하산주를 즐기는 회원들과 합류한다.
이렇게 3시간 여의 짧은 산행으로 백두대간종주 첫 일정을 마친다. 마치 고향 마을 뒷산을 산책하듯 정겹고, 마음이 푸짐해지는 산행이다.
(2004.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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