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남산 정상
해뜨는 시간이 많이 빨라졌다. 2주전 7시에 산악회 버스를 탈 때에는 사방이 어두웠었는
데 오늘은 주위가 한결 밝아 보인다. 아침이지만 밖의 기온이 영상이라 버스안과 기온 차가 크지 않은 모양이다. 차창에 물방울 맺힘도 훨씬 적어져 밖을 내다보기도 수월해 졌다.
버스가 동서울 톨게이트를 지나자 차창으로 보이는 색은 오직 한가지 뿐이다. 안개가 짙어 희뿌옇고, 안개가 걷힌 곳은 눈으로 하얗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안개는 차차 걷히고 창밖으로는 더 많은 눈이 쌓여 있는 게 보인다. 눈이 쌓여있는 것을 바라보니 고속도로에서 15시간, 혹은 20시간씩 갇혀 고생한 사람들의 모습이 눈 속에서 보이는 것 같다. 꼬박꼬박 세금 내고, 고속도로를 이용할 때는 빠짐없이 통행료도 지불했건만, 왜 이들이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나?
전기, 수도, 가스, 도로, 철도, 통신은 우리들이 매일 살아가면서 받아야 할 필요 불가결의 서비스이다. 하지만 이들이 기간산업이란 이유로 이들 산업은 국가가 직접 운영 한다. 국영사업이 문제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문제는 누가 운영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다. 누가 하던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눈 속에서 그렇게 고생시킬 리가 없고, 참혹하게 불타서 죽게 할 리가 없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가? 국영기업체들의 인사관행, 이들의 운영체제를 살펴보면, 이들이 국민들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마음가짐에 투철할 수 없음을 쉽게 알 수 있고, 그래서 우리국민들이 이렇게 3등국가의 3류서비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서글퍼진다
눈 속에서 고생한 사람들에게 통행료를 환불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갇혀있던 시간, 이들이 헛되이 소비한 기름, 이들이 받은 고통에 대한 손해를 배상하겠다는 이야기는 아직 듣지를 못했다. 또 고통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국가를 상대로 손해를 배상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천재지변이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같은 지역의 민자 고속도로에서는 이러한 불상사가 없이 위기에 대처한 것을 보면 천재지변이라고 강변하기도 어렵다. 서비스 정신이 결여됐고, 잘못했을 때 책임을 져야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못한 상황에서 불합리한 것에 항거하고,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겠다는 시민정신 마저 실종돼서는 변화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에 아침부터 우울해 진다.
버스가 대전을 지나고 나서부터 창밖의 모습이 달라진다. 눈은 점차 눈에 뜨이지 않고, 겨울에서 벗어나는 보랏빛 산야가 눈에 들어온다. 우울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앞으로 할 산행에 집중하려 애써본다. 산에 가는 사람들이 산에 가는 이유는 다양하고, 가지각색이겠지만, 산길을 꾸벅꾸벅 힘들여 걷는 동안은 잡념이 사라지고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되는 느낌이 좋아 산을 찾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머리를 비우자, 오늘할 산행만 생각하자.
3월 9일. 가고파 산우회에서 행하는 제8회 당일 백두대간종주 3번째 산행이다. 코스는 『여원재⇒고남산⇒통안재⇒유치재⇒매요리⇒아실재⇒지리산 휴게소』로 백두대간 제5소구간, 약 14Km의 거리다. 버스가 11시 45분경 여원재에 도착하자 회장님은 알바하기 쉬운 구간에 대한 주의를 주고, 산행시간은 선두 5시간, 후미 6시간을 주겠다 한다.
여원재(女院峙) - 영남과 호남을 연결해 주는 여원재(약 480m)는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 이 고개를 넘을 때 백발의 여인이 나타나 승리를 예언하고, 싸움에 이긴 이성계가 이 고개 이름을 여원재로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또한 전라도 고부에서 거병한 동학군이 전라도, 충청도 일대를 장악하고, 경상도 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다 여원재에서 관군에 패퇴한 전적지이기도 하다. 지금은 24번 국도가 여원재를 시원하게 관통하고 있다.
24번 국도에서 여원재 이정표가 가르치는 언덕을 오르니 전형적인 야산 길이 잡목 사이로 이어진다. 밭두덕을 지나고, 임도를 건넌다. 불이 나서 갈대와 키작은 진달래만 보이는 곳도 여기저기 눈에 뜨인다. 묘지들도 많이 보인다. 완만한 오름 길이 오른쪽으로 굽어지면서 이제까지와는 달리 울창한 소나무 숲사이로 백두대간 길이 이어진다.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울창하고, 쌓인 솔잎으로 등산로는 푹신한 카펫길이다. 경사도 심하지 않아 삼림욕 하는 기분으로 걷는다.
오르면서 본 고남산 정상 - 선두팀은 정상에 섰다.
이윽고 소나무 숲이 사라지고 억새가 우거진 오름세 길이 이어지더니, 경사가 급해지며, 암릉으로 연결된다. 암릉에는 줄이 매어져 있지만 녹다만 눈이 쌓여있는 바윗길은 미끄럽다. 암릉을 지나니 바로 고남산 정상(846m)이다. 전망이 시원하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니 것이 눈 덮인 바래봉이다. 하지만 옅은 안개에 가려 지리산의 주능선은 보이지 않고. 바로 눈 아래로 황산과 황산벌이 희미하게 누워 있다.
옅은 안개속에 뢍산과 황산벌이 흐릿하게 누워있다. 뒤가 바래봉이다
고려 말 우왕 6년(1380년) 7월 최무선은 금강구에 정박한 왜선 500여척을 새로 발명한 폭약으로 폭파한다. 퇴로가 끊긴 왜구는 영동을 거쳐 상주, 경산, 함양등 경상도 내지를 유린하고, 9월 운봉에 집결, 그 규모가 200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개경으로 쳐 오르겠다고 위협하고, 놀란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토벌사로 파견한다. 여원재를 넘은 이성계는 고남산 기슭에 진을 치고 왜구와 대치한다. 황산벌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적장 "아지발도"는 이성계가 쏜 화살을 맞아 죽고, 밤늦게 까지 왜구 섬멸은 계속된다. 이 때 어둠을 밝히려 달을 끌어 들였다 해서 마을 이름이 인월리가 됐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이 싸움 이후 고남산을 "태조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이런 전적지를 내려다보면서, 고남산 정상 헬리콥터 장에서 후미 팀이 점심을 먹는다. 이제부터는 내리막 길, 힘든 곳은 지났다는 여유로움일까, 아니면 회장님이 함께 있어서 일까, 후미에 쳐졌지만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느긋하게 점심을 즐긴다.
하산하면서 뒤 돌아본 고남산 정상.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은 경사가 급하고 얼었던 눈이 녹아 몹시 미끄럽다. 몇몇이 엉덩방아를 찧는다. 군사도로에 내려서서 우측으로 오르다가, 도로 꼭대기에 즈음하여, 왼쪽 숲으로 난 등산로를 찾기가 쉽지 않다. 리본이 몇 가닥 걸려 있지만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길이다. 등산로는 다시 송림으로 이어진다. 또 다시 삼림욕을 즐긴다. 여자회원들은 하늘에 오르는 기분이라고 무척 즐거워한다.
울창한 송림사이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매요리에 도착했다. 본래 대간 등산로는 마을 왼쪽 산등성이로 나 있으나, 매요리 사람들이 등산객을 마을로 유치하기 위하여, 이 길을 막아 버렸다고 한다. 등산객들이 거칠게 항의도 해 봤으나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마을을 관통하는 길이 대간 길이 돼 버렸다. 마을은 조용하고, 인적도 드믈어 다리가 불편한 할아버님 한 분이 힘겹게 지나치실 뿐이다. 대간 길의 이정표가 되는 언덕 위의 교회, 바로 그 아래에 허름한 매점이 있고, 할머니가 평상에 막걸리를 내 놓고 우리들을 부른다.
막걸리를 한병 따서, 남자들 잔은 7부정도, 여자들 잔은 1/3정도 부어 공평하게 여섯 잔을 만들자 할머니는 2병을 딴게 아니냐고 의심스럽게 물으신다. 산꾼들이 막걸리 병을 속였을 리도 없었을 터인데, 나이가 드시니 의심이 많아지는 모양이다. 우리들 후미 팀은 호기롭게 막걸리 잔을 부딪치며 부리보를 외친다. 옆에 놓인 묵은 김치가 안주다. 재빨리 술값을 계산하던 여자 회원이 잔돈을 받으면서 눈을 찡긋 하며 웃는다. 아마 김치 안주 값도 제하고 거스름돈을 받은 모양이다.
백두대간길이 지방도로로 이어진다.
도로를 따라 걷는 회원들의 모습이 한가롭다. 서부 영화에 나올 법하게 생긴 봉우리 하나가 앞에 누워 그림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대간 길은 왼쪽으로 다시 숲길로 이어지고, 얼마지나지 않아 밭으로 떨어지더니, 다시 도로로 내려선다. 이 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가자, 왼쪽으로 유치삼거리 이정표가 등산로를 다시 숲으로 유도한다. 매요마을을 떠나 여기까지 오는 길이 알바를 하기 쉬운 길이다. 하지만 도로를 타고 걸으면서 항상 왼쪽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리본이 걸려 있는 곳을 살핀다면 크게 헤메지는 않을 길이다.
산길로 들어서니 다시 소나무 숲이다. 오른쪽으로 바래봉이 가깝게 보인다. 날이 맑으면 지리산 주능선이 보일 터인데 아깝다. 다시 삼림욕을 한다. 오른쪽으로 88올림픽 고속도로가 가까이 보이고, 진달래가 군락을 이룬 바윗길을 지나니 바로 사치재 이정표가 서 있다. 회장님은 이 사치재 이정표는 잘못 표기된 것으로 "이실재"가 옳은 표시라고 알려준다.
88올림픽 고속도로가 백두대간길 허리를 자르고 뻗어있다.
88올림픽 고속도로로 내려섰다. 이 고속도로가 사치재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길을 끊고 달린다. 따라서 무박일 때에는 어둠속에서 산꾼들이 과감히 이 고속도로를 가로 건너는 모양이지만, 낮에는벌금이 무서워,사치재쪽에 놓인 고가도로를 타고 건넌다고 한다. 우리는 사치재와는 반대쪽에 있는 지리산 휴게소를 향해 터덜터덜 내려온다. 오늘 산행의 종점이다. 휴게소에 도착한 시각은 5시 5분 경이다. 5시간 20분을 걸은 산행이다. 송림길이 좋았고, 날씨가 쾌청하지 않아 지리산 능선을 보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5시 15분 버스는 서울을 향해 출발한다.
(2004.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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