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더니, 별난 산악회는 우리를 산 대신 바다로 안내한다.
2010년 8월 21일(토)
다음 주 월요일, 화요일에 비 소식이 있어 뒤 늦게 주말에 산행을 안내하는 산악회를 검색하다, 육백산, 응봉산, 이끼폭포를 안내한다는 XX산악회를 만나, 금요일 오후에 산행신청을 하고, 토요일 7시에 잠실역 2번 출구에서 산악회버스를 탑승하기로 한다.
토요일, 5시 15분에 기상, 집사람이 차려주는 새벽밥을 먹고, 6시 20분 경 집을 나선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잠실역 2번 출구에서 대기 중인 산악회버스에 도착한 시각이 6시 45분이다.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 놓은 40인승 새 버스다. 버스 안이 깨끗해 좋다. 어제 오후에 예약을 했으니, 으레 뒷좌석 중의 하나가 내 자리려니 짐작을 하고 등반대장에게 이름을 댄다. 인상도 엄홍길 씨 비슷한데 모자도 엄홍길 씨와 똑 같은 모자를 써서, 처음에는 엄홍길 씨로 착각을 할 정도로 닮은 대장이 앞자리를 주겠다며 고맙게도 14번 자리를 배정해 준다.
좀 일러서 그런가? 사람들이 보이질 않는다. 등반대장이 상황을 설명한다. 산악회 출발시간이 통상 7시 30인데, 오늘은 차랼혼잡을 피하기 위해 30분을 당겨, 7시에 출발하기로하고, 홈페이지에는 변경된 시간을 게시했으나, OK마운틴의 산행계획 알림표에는 깜빡 잊고 수정을 하지 못해, 7시 30분에 출발 할 것이라며 미안해한다. 요즘 열대야가 심해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이 많은 판이라 누구라도 깜빡할 수 있겠다고 이해를 한다. 7시 30분이 다 되어 회장이란 분이 모습을 나타낸다. 40대 후반의 건장한 사나이다. 검은색 캪아래로 흰 머리카락이 몇 가닥 내비치고, 검정색 민소매 티셔츠를 걸쳐, 구릿빛 튼실한 어깨와 굵은 팔뚝이 시선을 끈다. 그윽한 눈길, 부드러운 태도가 탤런트 저리가라다.
7시 30분이 됐는데도 버스는 떠나지를 못하고 늦는 대원을 기다려, 7시 40분에야 비로소 출발한다. 산악회 요원 3명을 제외한, 참여자 수는 모두 12명, 그 중 8명이 아주머니들이다. 회장이 전화를 받는다. 잠실에 늦게 도착한 여자대원 한 사람이 전화를 한 모양이다. 회장은 제 3아파트 단지 부근에서 기다릴 터이니 빨리 택시를 타고 쫓아오라며 전화를 끊는다. 버스는 길가에 멈추고, 택시 타고 쫓아오는 여자대원을 15분 동안 기다린다.
버스가 모란시장 앞에 도착한다. 7,8명의 대원들이 오래 기다렸다고 불평을 하며 버스에 오른다. 역시 2/3가 아주머니들이다. 8시 35분, 버스가 동서울 톨게이트를 지나자, 탤런트 회장이 출발이 늦어져 미안하다고 간단히 인사를 한 후, 인터넷으로 예약한 단체손님 10여 명이 불참하는 바람에 가족적인 분위기의 산행을 하게 됐다며, 오늘의 설행코스를 설명한다. 들머리인 강원대학에서 육백산까지 약 1시간, 응봉산 왕복 40분에, 이끼폭포를 거쳐 하산하는데 약 4시간, 모두 합쳐 6시간 내외의 산행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9시 10분 경, 버스가 이천 휴게소에 도착하자, 산악회는 주차장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식탁을 차려, 대원들에게 준비해온 아침식사를 제공한다. 선지를 넣고 끓인 해장국 맛이 그럴 듯하고, 반찬도 여러 가지를 준비하여, 아주머니들의 칭송이 자자하다. 이렇게 30여분 동안 아침식사를 마치고, 10시가 다 되어 버스가 고속도로로 들어서니, 이때는 이미 피서 나들이차량으로 고속도로의 정체가 심해 버스는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11시가 넘어 문막을 통과하고 원주를 지나서부터 다소 차량소통이 원활해진다. 1시가 다 되어 버스는 동해휴게소에 정차하고, 탤런트 회장은 대원들에게 화장실만 들렀다 빨리 돌아오라고 당부한다. 이윽고 버스는 다시 삼척으로 향한다. 회장이 마이크를 잡더니 현지 도착 예정시간이 너무 늦어 응봉산은 포기해야겠다며, 산행이 시작되면 부지런히 움직여 달라고 당부한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2시경에 산행을 시작하여, 응봉산을 포기하더라도 후미그룹의 하산시간은 해가진 8시 이후가 될 터인데, 랜턴준비를 했을 리가 없는 대원들을 데리고 어떻게 일몰 후 산행을 하겠다고 저렇게 한가한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이제 가능한 것은 전원이, 여자대원들을 위해 마련한 B코스, 즉 산행은 하지 않고 이끼폭포만을 구경하고 귀경하는 방법뿐이겠다.
1시 30분 경, 강원대학 삼척 제2 캠퍼스에 도착한다. 해발고도 900m 가까운 곳에 대학 캠퍼스가 있다는 것이 이채롭다. 수위 아저씨가 달려 나와 어떻게 왔느냐고 묻는 모양이다. 등반대장이 육백산을 등산하고 이끼폭포를 구경하러 서울서 왔다고 설명하니, 수위 양반이 수위실에서 공문을 들고 나와 보여준다. 작년 9월부터 이끼보호를 위해 등산객들의 이끼폭포 출입을 통제하고, 위반 시 범칙금을 물린다는 내용이다. 한동안은 이장 혼자서 통제를 하다보니 유야무야한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지금은 군에서 나온 공무원들이 이끼폭포의 출입구 양쪽을 모두 막고 있어 출입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젊은 엄홍길 씨가 버스로 돌아와 상황을 설명하더니, 대원들에게 이끼폭포가 출입 통제된 사실 알고 있었느냐고 묻는다. 작년 9월부터 이끼폭포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사실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다. 1000m가 넘는 고지에 화전민들이 조밭 육백 마지기를 개간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인 데, 사진으로 보는 이끼폭포는 다른 여타 폭포와 달리 사뭇 이국적인 정취를 풍겨, 한 번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지만 하도 사람들이 몰린다는 소리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많은 사람들의 방문으로 이끼의 훼손이 심해지고, 보다 못한 삼척군에서 출입을 통제한다는 소식에 실망했던 기억이 새롭다.
탤런트 회장이 마이크를 달라더니 정중하게 사과를 하면서, 이제 이끼폭포를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육백산, 응봉산을 가는 것도 그러니, 가까운 두타산의 무릉계곡으로 이동하여 점심식사를 한 후, 잠시 바다구경을 하고, 서울로 올라가자고 제안을 한다. 서울에서 7시간 가까이 달려 내려와 등산도 못하고 고작 이끼폭포의 출입금지 사실만을 확인 한 꼴이 됐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화도 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진행상황이 예사롭지 않아 오늘 산행은 글렀다고 일찌감치 체념을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3시가 다 되어, 버스는 천은사 일주문을 지나 공터에 정차한다. 그 유명한 무릉계곡에 물이 말랐다. 중부지방에는 지겹게 비가 내렸는데, 영동지방은 무척 가물었던 모양이다. 계곡 널찍한 그늘에 자리를 잡고, 산악회가 준비해온 음식으로 점심식사를 한다. 속 좋은 탤런트 회장은 유장하게 버너를 피우고 코펠에 불고기를 끓여 아주머니들에게 나눠주니 인기가 짱이다. 나는 산행할 때의 점심은 행동식으로 때운다. 밥을 가져가면 반찬과 국물이 있어야하니 짐이 많아지고 식사시간이 길어진다. 집사람이 떡집에서 떡을 사다, 한 끼 식사 분씩 비닐과 은박지로 싸서 냉동실에 얼렸다 준다. 점식식사를 하는 것을 봐도 나와 탤런트 회장은 영 궁합이 맞질 않는다.
서둘러 점심식사를 마치고 천은사 구경에 나선다. 아주머니 한 사람이 따라 오며 불평이 대단하다. 이끼폭포를 보겠다고 잔뜩 기대를 하고 나왔다가 사기를 당한기분이라며, 점심을 먹고 나면 4시가 넘을 터인데, 바로 서울로 가지를 않고, 무슨 얼어 죽을 바다구경이냐고 화를 낸다.
천은사로 이어지는 한적한 길가에 보호수로 지정된 고목들이 천은사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 싶다. 천은사는 신라 흥덕왕 4년(829)에 백련대(白蓮臺)로 창건되었고,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가 간장암(看藏庵)을 지어 이곳에서 제왕운기를 저술한 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규모가 큰 절은 아니다. 1948년 화재로 소실됐다, 그 후 중창을 했기 때문인 모양이다. 커다란 북을 걸어 놓은 영월루가 시선을 끈다. 얼추 절 구경을 마치고 버스로 돌아와 일행들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천은사 가는 길
이승휴 유허지 안내문
극락보전
영월루
4시가 넘어서야 식사가 끝나고 버스는 정동진의 등명해수욕장으로 향한다. 해수욕장에 도착하자 산악회는 해변 가에 자리를 펴고, 준비해온 족발에, 맥주, 소주 등을 풀어 놓는다. 이처럼 완벽한 먹거리 준비 앞에서 어찌 화를 낼 수가 있겠는가?
산에는 못 가도 바다가 즐거운 아주머니들
바닷가에 대원들을 풀어 놓았으니 6시 출발 예정시간이 지켜질 리가 없다. 총무가 전화를 거는 등 한 동안 소동이 벌어진 후, 6시 30분경에야 버스는 서울을 향해 출발한다.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할 능력이 없으면서 일을 벌이면 여러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마련이다. 한데 이런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능력이 주어졌다는 사실에 묘한 신의 섭리가 느껴진다. 탤런트 회장, 엄홍길 씨를 닮은 대장, 귀엽게 생긴 총무, 그리고 선지해장국으로 아침을 준비하고, 점심때는 불고기를 대접을 하더니, 해변 에서는 족발에 맥주까지 주는데, 도무지 화를 낼 수가 없겠다.
빵빵하게 틀어주는 에어컨 덕에 시원한 버스 속에서 몇 차례 졸다, 깨다를 반복하다보니 어느덧 잠실이다. 버스에서 내리니 무지 덥다. 두 차례 지하철을 바꾸어 타고, 11시 경에야 집에 도착하고 나서, 비로소 화가 나기 시작하는 것은 또 무슨 조화인가?
(2010.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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