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가을이 많이 깊어졌다. 버스는 남한강에 연한 6번 국도를 달린다. 차장 밖으로 안개가 자욱하다. 공기가 차가워져서 생기는 안개, 만추(晩秋)를 알리는 전령이다. 갈전곡봉을 주봉으로 하는 이번 백두대간의 마루금 능선은 이미 초겨울이다. 거센 바람으로 능선길에 도열한 상수리나무들의 잎은 거의 다 떨어져 가지만 앙상하고, 등산로를 덮은 낙엽은 그 고왔던 빛을 잃었다.
<능선길의 상수리 나무는 벌써 가지만 앙상하다.>
<떨어진 잎들은 변색이 시작되고..>
2004년 10월 16일(토).
오늘은 백두대간 제 48, 49 두 소구간을 한꺼번에 뛴다. 『구룡령(1,013)-치밭골령-갈전곡봉(1,204)-왕승골(800)-968.1봉-1,020봉-956봉-연내골갈림길-1,061봉-황이리갈림길-쇠나드리-조침령-진동리』 귀에 익은 지명은 한 곳도 없다. 모두 생소한 곳이다. 마루금 약 20 Km, 날머리 약 1 Km, 총 2l Km에, 산악회가 제시한 소요시간은 약 7시간이다.
대원들을 기다리느라 출발이 다소 늦어진 산악회 버스는 아침 식사를 위해 크린턴 휴게소에서 30분간 정차한다. 휴게소 앞마당은 설악산 단풍을 찾는 승객들을 태운 관광버스로 만원이다. 식사 후 다시 44번 국도에 오른 버스의 속도가 떨어진다. 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설악으로 몰리면 설악도 꽤나 몸살을 앓겠다.
버스는 44번 국도를 버리고, 56번 국도로 진입한다. 2차선 도로지만 차량통행이 드물어 한적한 길을 버스는 제 속도를 내어 달린다. 해가 오르면서 안개가 걷히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농촌 풍광이 아름답다. 56번 도로가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산 위로 오른다. 왼쪽으로는 삼봉자연 휴양림, 오른쪽으로는 구룡약수 지역을 지나면서 눈 아래 펼쳐지는 약수산, 응복산, 만월봉으로 이어지는 산세에 절정을 이룬 단풍이 숨막히게 아름답다. 승용차들이 도로변에 정차해 있고, 여행자들이 차에서 내려, 눈 아래 절경을 즐기고 있다.
버스기사 양반은 이 좋은 경치를 놔두고, 무엇 하러 고생하며 대간 길을 걷느냐고 묻는다. 대간 병에 걸려보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기사양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기사 양반은 마천계곡을 포함해 이 일대의 자연경관이 무척 아름답다고 소개한다. 설악 단풍 길에 나섰다가 사람들이 많아, 제대로 단풍을 구경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이 곳으로 손님들을 모시고 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10시 40분 경, 버스는 갈전곡봉과 약수산 사이의 고갯길, 구룡령 휴게소에 도착하고, 바로 산행이 시작된다. 산행이 시작되자 걱정이 앞선다. 산악회에서는 산행시간을 7시간으로 보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 구간은 8시간 30분에서 9시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10시 40분 경에 산행을 시작했으니 이 시간대로라면 1시간 정도는 해가 진 후에 걸어야 한다. 당일 산행이라고 가볍고 보고 랜턴을 챙기지 못한 것이 무척 걱정이 된다.
<구룡령 휴게소>
휴게소 일대는 아직도 안개가 자욱하다. 등산로는 휴게소 건너 편, 동물 이동터널을 지나, 바로 왼쪽 사면으로 나 있다. 10여분간 가파른 숲길을 지나 마루금에 오른다. 마루금에 오르니 바람이 거세다. 11시에 1,100. 3봉에 오른다. 정상에는 북부지방 산림청에서 세운 "백두대간 생태복원 조림" 안내판이 서있다. 훼손된 백두대간 생태계를 복원하기 위해 갈전곡봉에 주목, 전나무, 갈비나무 등 희귀나무 600그루를 심는다는 내용이다. 이 코스는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오지로, 원시림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고, 멧돼지들이 서식하는, 아직은 그다지 사람 때가 많이 묻지 않은 곳이라고 한다.
<안개 속의구룡령>
<산림청 조림 안내>
바람이 거센 능선길에 서 있는 상수리나무들은 벌써 잎들을 거의 다 떨구고 가지만 앙상하다. 11시47분 치밭골령을 통과한다. 시멘트로 만든 작은 표지가 서 있다. 안개는 여전하고 하늘은 흐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싶다. 비가 내리면 오늘 같은 장거리 코스에서는 하산시간을 예측하기가 더 더욱 어렵겠다. 랜턴 준비 못한 것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12시 경 갈전곡봉에 이른다. 비교적 빠른 진행이다. 산악회 기준시간 1시간 30분보다 10분정도 빠르게 올랐다. 정상에는 이정표가 서있다. "쇠나드리 12.7Km, 6시간 30분, 구룡령 3.4Km, 2시간". 정상에 섰지만 안개와 주위의 무성한 나무들로 시계는 막혀있다.
<갈전곡봉 정상>
정상에서 등산로는 우측으로 내려선다. 이곳부터 왕승골 삼거리까지는 울창한 숲길이다. 만년 후미인 나지만 해 떨어지는 시간이 걱정이 되어 비탈길을 속도를 내어 걷는다. 12시 50분 경 1,080봉을 지난다. 연이어 6, 7개의 봉우리를 오르내린다. 높은 봉우리들은 아니지만 연달아 계속되어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안개가 슬어지고, 구름이 걷히며 북서쪽으로 먼 산줄기가 나뭇가지 사이로 굽이굽이 흐른다. 1시 25분 경, 왕승골 삼거리에 이른다. 갈전곡봉에서 3.2Km 떨어진 지점이다.
<아름다운 등산로>
<왕승골 삼거리 안내도>
주위 단풍이 아름다운 너른 공터에 대원 두 사람이 점심을 하고 있다, 중위 팀은 더 나가서 점심을 하려나 보다.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점심을 하기로 하고 일행을 기다린다. 이윽고 일행이 도착하여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2시 경 다시 출발한다.
점심식사 후라 오르막길을 천천히 걷는다. 산죽길이 이어진다. 대원 한 사람이 길가에 빨간 야생화를 보고 사진을 찍으라고 한다. 생전 처음 보는 특이한 모양이다. 열매인지, 꽃인지 구분이 어렵다. 그 대원은 청남성 이라고 이름을 알려준다. 야생화에 관해 대단히 조예가 깊은 분이다.이곳의 단풍들은 절정기를 지나 벌써 빛이 탁하다. 2시 55분 경 1,020봉에 오른다, 기념 사진을 찍은 후 다시 혼자 속력을 내 걷는다. 3시 10분 경 연가리골 샘터에 이른다. 안내판이 서 있다. 안내판은 조침령까지는 아직도 8.2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청남성 열매>
956봉을 지나면서 여기 저기 멧돼지들이 파헤친 구덩이를 지난다. 혼자 가다 멧돼지 떼와 조우하게되면 큰 낭패겠다. 무리를 지어 이동하거나 호각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있겠다. 4시 15분, 점봉산과 설악산 대청봉 등이 보인다는 1,061봉에 오르지만 정상에는 아무 표시도 없고, 나무에 가려 전망도 별로다. 4시 33분, 955봉에 오른다. 정상에는 비닐로 만든 이정표가 나무에 걸려있다. 1,061봉 25분, 쇠나드리 2시간이라고 적혀 있다. 해지기 전 조침령 도착이 어렵다는 것이 점점 확실해진다.
<아무 표지도 없는 1,061봉>
<955봉의 비닐 표지>
황이리 갈림길까지 약 2 Km의 숲길은 환상적이다. 곧게 뻗은 나무들이 빽빽하고, 수종도 다양한 듯 싶다. 고도가 낮아지면서 단풍이 절정을 이룬다. 단풍군락지라고 불리우는 이유를 알겠다. 육산에 이 정도로 울창한 숲에,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이 제 각기 자기 빛깔을 뽐내고 있으니 가히 장관이라 하겠다. 갈 길은 바빠도 이 아름다운 숲 속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느라 발걸음이 자꾸 늦어진다. 시간이 충분치 못한 것이 유감이다.
<군락지 단풍 1>
<군락지 단풍 2>
<군락지 단풍 3>
<군락지 단풍 4>
5시 5분 경, 황이리 갈림길에 도착하니, 산악회 인솔자가 아름다운 숲을 망연히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다. 인솔자는 뒤에 처진 대원들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다. 미숫가루 탄 물을 나누어 마시고, 일행을 기다리는 인솔자를 남긴 채, 혼자 서둘러 쇠나드리로 향해 달린다. 5시 30분이 지난다. 저 앞 숲길에 대원 한 사람이 앉아서 쉬고 있다. 랜턴이 없다고 걱정하는 소리를 듣고, 해 질 때가 되니, 뒤에 오는 나를 기다린 모양이다. 하지만 미안해 할까봐 "오늘 코스가 대관령 길보다 힘들어 몸이 무겁다"고 능청을 부린다.
소도 바람에 날린다는, 바람이 세기로 유명한, 쇠나드리는 어떻게 지나는 지도 모르고 지나친다. 길은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6시가 가까워지자 서쪽 하늘에 노을이 물들고, 그 아래로 산줄기가 선명하다. 6시 15분 경 동행한 대원이 헤드 랜턴을 켠다. 길은 다시 오름세로 이어지고, 최근에 설치한 로프가 오름세를 따라 어둠 속에서 하얗게 떠 있다.
<서쪽 하늘에 노을은 지는데 아직 갈길은 멀다.>
산길은 금방 어두워진다. 이미 사방이 캄캄하다. 앞선 대원의 랜턴 불빛이 겨우 앞길을 열어준다. 앞서 가던 대원이 나무 뿌리에 걸려, 휘청, 몸의 균형을 잃는다.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는다. 조심해야겠다. 조침령이 멀지 않을 터이니 천천히 걷기로 한다. 조침령 정상에 정상석이 있다고 하니, 그 곳까지 가서, 정상주나 마시며 일행을 기다리기로 한다.
마지막 언덕길을 천천히 오른다.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멈춰 서서 기다린다. 산악회 인솔자가 불도 없이 앞장서고, 그 뒤로 다른 대원 한 사람이 불을 비추며 따라온다. 인솔자의 랜턴은 밧데리가 다 했다고 한다. 함께 모여서 뒤에 쳐진 3사람을 걱정한다. 뒤에 남은 세 사람이 모두 랜턴을 가지고 있고, 침착한 후미 담당이 함께 있으니 별 일이야 있겠냐고 애써 걱정을 털어 낸다. 우선 임도 까지 나가서 기다리기로 하고 다시 출발한다.
6시 45분 경 임도로 내려선다. 대원 한 사람이 후미와 전화를 해 보지만 불통이다. 산악회 인솔자는 모두 함께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 자신이 혼자 남아서 기다리겠다며, 세 사람은 먼저 내려가라고 한다. 회원들 전화 번호와 랜턴 하나를 인솔자에게 넘기고, 세 사람이 먼저 임도를 따라 하산하여, 7시 10분 경 버스에 도착한다.
<임도에 내려서 본 이정표>
몸이 가벼운 대원 한 사람이 후미 일행을 지원하기 위해 임도로 향한다. 7시 30분 경 후미 일행이 버스에 오르고, 차안에서는 박수소리가 터져 나온다. 일부러 기다렸다 길을 밝혀 주는 대원. 묵묵히 후미를 지키는 후미담당, 혼자 기다리겠다고 세 사람을 내려보낸 후, 일행을 맞으러, 온 길을 되 달려 간 산악회 인솔자, 배낭이라도 들어주겠다고 지원 차 나서는 또 다른 대원, 그리고 최선을 다하는 후미 일행. 이래서 나는 후미가 좋다. 앞으로도 만년 후미를 스스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선두 팀의 걸린 시간이 대강 7시간이라고 한다. 후미 팀은 약 8시간 50분을 소요했다. 조선일보사에서 간행 한 백두대간 종주산행에서는 이 코스의 마루금 산행 소요시간을 8시간 45분으로 보고 있음으로, 점심시간, 그리고 임도를 걸은 시간을 감안하면, 후미 팀도 최선을 다한 훌륭한 산행이었다고 생각한다.
(2004.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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