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무박산행이다. 산행코스는 미시령에서 황철봉을 넘어 마등령까지 마루금을 걷고, 백담사 쪽으로 하산한다. 이 코스는 황철봉 부근의 악명 높은 너덜지대와 이따금씩 너덜바위 위에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을 본다고 해서 더욱 흥미를 끄는 코스다. 비가 온다는 예보도 있어 미끄러운 너덜 길을 무사히 통과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한다.
북주릉이라고도 불리는 이 코스는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사람들이 주로 찾는 곳이다. 지금은 황철봉 주위에 분포돼 있는 눈잦나무, 측백나무 등의 나무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휴식년제가 실시되고 있어 설악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산행이 불가능하다.
2004년 10월 8일(금).
자정이 가까운 11시 50분. 버스를 기다리는 대원들 수가 많지 않다. 매주 보던 얼굴들 중에 몇몇이 보이지 않는다. 악명 높은 너덜지대에 비까지 예보되어 결간하는 모양이다. 12시가 다 되어 버스가 도착하고, 버스에 오르니, 의외로 버스는 만원이다. 자연휴식년제 구간을 산행한다는 산악회의 홍보로 10여명이 넘는 일반 회원들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버스는 새벽 2시 45분 남설악광장 휴게소에 도착한다. 걱정하던 비는 내리지 않는다. 계속 예보가 틀리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한밤중인데도 광장에는 대형 버스들이 줄지어 서있다. 산악회 인솔자는 이곳에서 식사를 한 후, 대기했다가 관리소 감시가 소홀한 5시경에 미시령에서 산행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한다. 휴게소 식당은 한밤중인데도 식사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식사를 마친 일행들은 버스로 돌아와 소등한 버스 속에서 잠을 청하며 시간을 보낸다.
<남설악 광장 휴게소>
4시 30분 경 버스는 미시령으로 출발하고, 차안은 산행 준비를 하는 대원들로 부산하다. 미시령 정상이 가까워지자 버스는 실내등을 끄고 주차장으로 접근한다. 창 너머로 관리소 쪽을 응시하던 산악회 인솔자가 실망스런 소식을 전한다. 관리소 사무실이 불을 환하게 밝히고 감시하고 있다고 한다.
버스는 주차장에 정차하고, 인솔자가 관리소 사무실을 찾아 가 보지만 신통한 방법이 없는 모양이다. 지금은 인터넷 시대다. 관리 사무소가 대간산행을 하는 산악회 일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는 허가를 받지 않고, 잔재주를 부려 잠행하기가 쉽지 않겠다.
잠행이 실패할 경우에 대비하여 산악회가 준비한 대안에 따라 노인봉(1,328)으로 방향을 바꾸기로 하고 버스는 대관령으로 향한다. 노인봉은 백두대간 제 46 소구간에 속한다. 구체 산행코스는『대관령(840)-새봉(1.071)-선자령(1,157)-곤신봉(1,127)-동해전망대(1,165)-매봉(1,173.4)-소황병산(1,328)-노인봉(1,328)-진고개(970)』. 도상거리 약 22Km, 산악회가 제시한 소요시간은 약 7시간 30분이다.
버스는 7시 5분 경 텅 빈 대관령 주차장에 정차한다. 검은 구름이 하늘 가득하지만 비는 내리지 않고, 바람도 없다. 단체사진을 찍고, 7시 10분 경, 거대하게 솟아 있는 풍력발전용 홴(Fan)을 뒤로하고 산행이 시작된다. 시멘트 길이 왼쪽으로 굽어지는 초입에 큰돌이 한 개 우뚝 서 있다. 대관령국사선황당(大關嶺國師城隍堂) 입구를 알리는 돌비석이다. 대간 길은 왼쪽 대관령 기상대 쪽으로 이어진다.
<대관령 국사 선황당 안내석>
완만한 오름 길을 따라 점차 고도가 높아진다. 20여분을 오르니 풍력발전용 홴이 저 아래 자그마하게 보이고, 건너편 산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으나, 바로 눈앞에 단풍으로 채색된 능선이 새벽 안개비에 젖어 무겁게 누워 있다.
시멘트 길을 벗어나 왼쪽 산길로 등산로가 이어진다. 새봉을 지나면서 등산로는 목장의 신작로와 숲길을 번 갈라 드나들며 이어진다. 아마도 목장의 신작로가 대간 마루금을 지나는 모양이다. 내년부터 백두대간 보호법이 발효된다. 이 법이 시행되면 강원도 지역이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벌써부터 개발과 보호를 놓고 논쟁이 뜨겁다. 개발을 하더라도 최소한 백두대간의 마루금은 보존됐으면 하는 바램이다.
왼쪽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가 쉽지 않은 광활한 목초지가 안개 속에 펼쳐진다. 날씨 때문일까? 소들은 보이지 않는다. 8시 20분 경 선자령 정상의 이정표를 지난다. 군데군데 목초지에 남겨진 나무들은 단풍이 한창이다. 누렇게 변한 구릉진 목초지 너머, 먼 산에는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고, 안개가 베일처럼 흩날린다. 마치 한 폭의 서양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목장 풍경 1 >
<목장 풍경 2 >
선자령 나즈목 까지 내림 길을 달리던 등산로는 다시 평탄해 진다. 곤신봉은 모르고 지나친다. 9시 10분 경 등산로 가까운 돌 위에서 중위 팀이 둘러앉아 아침상을 차리고 있다. 합류하여 함께 아침 식사를 한다. 식사를 마친 대원들이 서둘러 길을 떠난다. 등산화 끈을 고쳐 매느라 지체한 나는 다시 맨 뒤 후미로 쳐져 천천히 일행을 뒤따른다.
9시 45분 경, 목초지를 배경으로 "태극기 휘날리며" 라는 표지목이 서 있는 곳을 무심코 지나치다가, 그림이 될 듯 싶다는 생각에, 다시 돌아와 표지 목과 목초지를 카메라에 담는다. 9시 52분 동해 전망대에 이른다. 대원들은 이미 거쳐가고, 일반 회원으로 참여한 젊은이 한 사람이 남아서 사진을 찍고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
<누렇게 변해가는 초지>
동해 전망대에는 2004년 4월에 세운 커다란 돌비석이 서있다. 돌비석에는 "망망대해 동해일출, 희망의 전망대" 라는 글씨가 음각돼 있다. 그 옆에는 사위(四位)의 방향을 표시한 펀펀한 바위가 놓여있다. 대청봉, 주문진, 경포대, 발왕산, 그리고 황병산 등의 방향을 가르친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것은 짙은 안개뿐이다. 아쉬운 마음을 "비가 안 오는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라고 스스로 달래며 전망대를 뒤로한다.
<동해 전망대의 자연백경>
<돌 위에 새긴 방향 표지>
<동해 전망대>
다시 신작로와 숲길이 번 갈라 교체된다. 신작로에서 숲길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주의를 하지 않으면 자칫 지나치기가 쉽겠다. 매봉이 가까워지는 모양이다. 앞에 거대한 통신 탑이 우뚝 솟아 있다. 하늘은 다시 시커멓게 변한다. 하지만 묘하게도 하늘과 맞닿은 목초지의 구릉을 따라 흰 구름이 띠처럼 걸려있어, 그 빛 아래로 펼쳐진 목장의 풍광이 신비롭다.
<목장 풍경 3 >
<목장 풍경 4 >
묘봉을 지나서 등산로는 신작로를 버리고 산 속으로 이어진다. 산 속의 단풍이 아름답다. 등산로 주변에는 키 작은 싸리나무들이 채색을 뽐내고, 머리 위 키 큰 나무들도 단풍이 곱다. 산이 점점 깊어지면서 등산로는 온통 안개비에 젖은 낙엽으로 뒤 덮여, 앞서 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찾기가 힘들다. 이따금씩 보이는 대간 표지 리본이 없다면 짙은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가능성이 크다.
<대관령 단풍>
<단풍 길>
길이 가팔라지면서, 미끄러운 암릉과 흙길이 나타난다. 조심조심 오르니 눈앞에 안개에 덮인 넓은 초지가 펼쳐진다. 소황병산 정상이다. 정상에는 아무 표시도 없다. 이 곳까지 이어진 신작로를 따라 올라 온 트럭 두 대가 안개 속에 버려져 있다.
내리막길을 내 닫는다. 앞에 여자 대원 두 사람이 보인다. "이 길이 맞나요? 계속 내리막이고, 물소리도 들리는 것 같은데."라고 여자 대원 한 사람이 묻는다. 지도를 꺼내본다. 지도상에도 내리막이 한참 계속되고, 갈림길 표시는 없다. "맞아요. 외길이로군요."라고 대답한다. 여자 대원은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산 속을 여자 대원 두 사람만 걷게 하다니... 아마도 우리 대간 팀의 기사도가 잠깐 어디 나들이라도 간 모양이다. 이 여자 대원은 새벽에 남설악 광장에서 식사를 한 후 버스에 시달리다 차멀미를 했다 한다. 차멀미를 경험해 본 사람이면 잘 알겠기만, 진땀만 나고, 전신에 맥이 풀려, 앉아 있기도 힘들다. 눕고만 싶어진다. 중위 팀에서 쳐진 이 대원이 후미의 다른 여자 분을 만나 함께 걷고 있는 중이란다.
단체산행에서 중위 팀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선두 경쟁을 벌이는 선두 팀은 내버려둬도 별 상관이 없지만 전체의 산행 속도를 조절해야 하는 것은 중위 팀의 역할이다. 바람직한 단체산행을 위해서는 중위 팀이 후미 팀과 30분 이상 시간 차가 나지 않도록 산행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 전망대나 쉴만한 산봉우리에 이르면, 중위 팀은 후미 팀과 교신하여, 후미 팀의 진행 상황을 파악하고, 30분 이상 시간차가 날 경우에는, 쉬면서 후미 팀을 기다려, 초과 예상 시간을 흡수해 줘야 한다.
중위 팀이 함께 걷던 자기 대원이 뒤로 쳐져도 아랑곳없이 앞으로만 내 닫는다면, 이 팀이 후미의 진행 상황을 파악하고, 산행 속도를 조절할 리가 없다. 앞으로 다가오는 동절기의 안전 산행을 위해서는 사명감을 갖고 전체 산행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중위 팀을 편성할 필요가 있겠다.
소황병산을 내려서 노인봉으로 이어진 등산로는 단풍이 아름다운 산책길이다. 12시 50분 경 노인봉이 눈앞에 보이는 전망대 바위에 올라선다. 노인봉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멀리 보인다. 전망대 옆에 우뚝 솟은 바위에는 산에서 사고를 당한 사람을 추모하는 동판이 박혀 있다. '41년 생으로 '92년 원숙한 나이에 사고를 당한 모양이다. 산에 다니는 우리들에게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멀리서 본 노인봉>
노인봉으로 향한다. 안개가 걷히며 햇빛이 비친다. 1시 경 노인봉 대피소에 이른다. 대피소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아마도 진고개나 청학동 무릉계곡 쪽에서 오른 등산객들이 많은 모양이다. 노인봉 정상도 만원이다. 정상석을 배경으로 증명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정상에서의 시야는 유감스럽게도 앞산으로 제한되고 무릉계곡 쪽으로는 구름이 가득하다. 후미팀이 모여, 정상석을 배경으로 증명사진을 찍고, 1시 15분 진고개로 향한다.
<노인봉 정상에서 본 산세>
노인봉의 암봉을 내려서니, 앞서 지나쳤던 중위 팀이 진고개로 향하는 길을 찾아 되돌아 올라오고 있다. 정면의 오르막으로 이어진 길을 찾아 중위 팀과 후미가 어우러져 함께 걷는다. 진고개로 향하는 길도 산책로다. 단풍이 아름답다.
나무 가지 사이로 저 아래 마을이 보인다. 2시가 조금 지난 시각. 이제 서두를 것이 없다. 길가 나무 그루터기에 배낭을 내려놓고, 미숫가루 탄 물을 마시며 쉰 후, 후미로 쳐져, 앞선 일행을 뒤쫓아 길을 서둔다. 급한 내리막이 시작된다. 한동안의 내리막을 지나 안부에 이른다. 앞선 대원들이 안부를 지나 산굽이를 감돌아 진고개로 향하는 모습이 보인다.
<진고개 못 미친 안부의 이정표>
안부에서 보는 풍광이 아름답다. 뒤로는 방금 하산한 노인봉이 단풍 속에 우뚝 솟아 있다. 왼쪽으로는 동대산의 장엄한 산세가 흘러내리고, 그 사이로 6번 국도가 저 아래로 보인다. 단풍으로 곱게 물든 산에 둘러 싸여 진고개로 향하는 산굽이를 천천히 따라 오른다.
<왼쪽은 동대산 흐름, 저 아래 6번 국도>
2시 30분 경 진고개 휴게소에 도착한다. 버스에 배낭을 내려놓고, 갈아입을 옷을 들고 휴게소 화장실로 간다. 옷 갈아입을 곳이 마땅치 않다. 세수를 하고 겨우 한 귀퉁이에서 땀에 젖은 상의만 갈아입은 후, 식당으로 향한다.
<진고개 휴게소>
식당에는 벌써 하산주로 거나한 대원들이 반겨 맞아 준다. 맥주로 갈증을 풀고, 육개장으로 점심을 마친 후, 진고개 주위를 구경한다. 버스는 3시 40분 경 서울로 향한다.
<진고개 휴게소에서 본 풍경>
횡계를 지나면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광이 아름답다. 저 아래 논들이 황금색으로 펼쳐져 있고, 가을 채소로 밭들은 푸르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예쁜 집들이 그림 같다. 문막을 지나면서 충주에서 올라오는 차량들이 겹쳐, 정제가 생긴다. 가며 쉬며 버스는 여주로 향한다. 버스 앞 창을 통해 고속도로 너머 저 멀리 산 위에 커다란 태양이 붉은 빛을 토하며 걸려 있다. 태양은 점점 낮아지고, 차안에는 붉은 빛이 감돈다. 참으로 아름다운 우리의 산하다. 세월이 갈수록 이런 느낌이 더욱 더 강해진다.
여주를 지나면서 정체도 풀리고, 중부고속도로로 갈아 탄 버스는 8시가 조금 지나 양재역에 도착한다.
(2004.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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