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 건너에서 바라본 포항제철소
2006년 1월19일(목).
아침에 잠을 깨니, 심신이 상쾌하다. 어제는 내가 먼저 잠이 든 덕에 김 사장의 코 고는 소리에 시달리지 않고 숙면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축구는 졌지만, 김 사장도 잘 잤다고 한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간, 두 사람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침의 어시장을 구경하러 나선다.
아침의 어시장에는 활기가 넘친다. 공판장 바닥에 문어가 벌겋게 널려 꿈틀거린다. 경매가 진행된다. 경매가 끝난 생선들은 낙찰자 이름을 붙여 상자에 담아 모아진다. 처음 보는 어시장 경매다. 박진감이 넘친다. 경매를 구경하고, 시장으로 나온다. 불을 환하게 밝힌 시장은 손님 맞을 준비로 분주하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솥에서, 통째로 삶은 문어를 꺼내, 머리를 제거하고, 다리만 가지런히 보기 좋게 진열한다.
죽산 어시장 문어 경매
손님을 기다리는 삶은 문어 다리
얼추 시장을 둘러 본 후, 상인들에게 물어, 아침 식사를 하는 식당을 찾아 들어선다. 선객들 몇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다. 모두가 시장상인들이다. 자리를 잡고 앉는다. 메뉴는 단일 메뉴로, 3,000원 짜리 백반이다. 뜨거운 숭늉부터 내 준다. 서울에서는 먹기 어려운 뜨거운 숭늉을 훌훌 불어 가며 마신다. 옆 자리에 놓인 신문을 보니, 역시 조선일보다. 시장 상인들이 보는 신문이 이처럼 대부분이 조선일보라면 가히 민심의 향배를 짐작할 수 있겠다.
푸짐한 밥에, 된장찌개, 묵은 김치, 고등어조림 등 다양한 반찬으로 풍성한 아침식사를 즐긴다. 옆 자리에 우리 나이또래의 두툼하게 차려 입는 할머니가 혼자 자리를 잡고, 숭늉을 마시며 식사를 기다린다. 표정이 잔잔하고, 곱게 늙은 할머니다. 눈이 마주친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시장이 꽤 크네요." 라고 말을 건넨다. 할머니가 머리를 끄덕이면서. "멀리서 오셨수?" 라고 묻는다. "예, 서울에서 구경 왔어요. 아침에 문어를 경매하던데요? " 라고 아는 체를 하니, 협동조합이 두 군데가 있어, 경매가 두 곳에서 이루어진다고 알려준다.
자녀들은 장성하고, 틀림없이 손자, 손녀들도 있으련만, 아직도 새벽 장을 떠나지 못하고, 시장 통 식당에서 혼자 아침식사를 하는 할머니, 어렵고 힘든 세월을 보낸 세대이지만, 의외로 표정이 잔잔하고, 담담한 얼굴이다. 사진을 한 장 찍고 싶지만, 실례가 될 듯싶어 참는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는 우리들을 보고, "구경 잘 하고, 편히 돌아들 가시오." 라고 먼저 인사를 한다. 여유 있는 죽도시장의 할머니이다.
모텔로 돌아와 뒷마무리를 하고, 짐을 챙겨, 트럭에 오른다. 오늘 첫 일정은 2003년 7월에 개관한 포스코 역사관 견학이다. 지금은 비가 오지 않지만, 언제 비가 내릴지 모를 우중충한 날씨다. 형상강을 건너, 포스코 본사 건물 옆에 자리 잡은 역사관에 도착한다. 이른 아침이라 역사관 건물로 들어서도 인적이 없다. 너무 빨리 왔나? 시계를 보니 9시 15분이다.
포스코 역사관
역사관 건립 취지문
사방을 둘러본다. 사무실 팻말이 붙은 방이 보여, 노크를 하고 들어서서, "박물관 견학 왔는데요." 라고 용건을 말하자, 사무직원 한 사람이 벌떡 일어서더니 현관 옆 엘리베이터로 우리를 안내를 한다. 우리 둘은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직원은 2층이라며, 우리들을 향해 허리를 굽힌다.
2층에는 접수대가 있고, 여직원 2명이 대기하고 있다. 접수대 뒤에 있는 여직원이 예약 여부를 묻는다. 예약은 못 하고, 포항 방문 중에 잠시 들렸다고, 미안한 얼굴을 하자. 어디서 왔고, 이름은 무엇이냐고 다시 묻더니, 대답한 내용을 PC에 입력한다.
여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역사관을 둘러본다. 2층과 3층에 전시실이 배치돼 있다. 여직원은 조용한 목소리로 전시물을 하나씩, 하나씩 설명한다. 군더더기가 없고, 과장되지도 않은 차분한 설명이다. 질문을 하면, 질문의 요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간결하게 대답한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인은 크지 않은 키에 날씬한 몸매다. 총명하고, 잘 훈련 받은 프로급 안내원이다. 왼쪽 가슴의 명찰을 본다. 최국향(崔菊香), 풍기는 분위기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포철직원의 부인이라고 한다. 이하 최 안내원의 설명과 전시자료에서 본 것들을 종합하여 정리한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 5차례에 걸쳐, 종합제철소를 건립하려고 시도하지만, 자본과 기술 부족으로 모두 실패한다.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이 피츠버그 철강단지를 시찰하고, 이 때 코포스(Coppers)의 포이 회장은 박 대통령에게 제철소 건설지원을 약속한다. 이에 따라, 1966년12월, 미국을 비롯한 5개국의 8개 제철회사가 KISA (Korea International Steel Asociates - 대한국제제철차관단)를 결성하고, 1967년 10월, 정부는 KISA와 종합제철 건설에 관한 협정을 체결한다.
KISA와 기본협정 체결
1967년 포항이 종합제철소 부지로 선정이 되고, 박 대통령은 당시 대한중석 사장인 박태준 씨를 불러, "임자, 임자가 제철소 일을 맡아 해보라고. 이 일을 해낼 사람은 임자 밖에 없어."라며 박태준 씨에게 제철소 건설을 마낀다. 1968년 4월 포항종합제철 주식회사가 창립되고, 박태준 씨가 사장으로 취임한다. 하지만 세계은행(IBRD)은 한국경제 분석보고서에서 브라질, 멕시코, 터키, 베네수엘라 등이 모두 실패한 종합제철소 공장건립은 한국에도 힘에 부치는 사업이니 포기하라고 권고하고, 이어 1969년 4월, USAID (미국국제개발처)도 포항제철 건설계획에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하자, KISA의 반응이 냉담해진다.
이성지의 예언시
포항의 어제와 오늘
박태준 사장은 KISA를 설득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나, 성과를 얻지 못하고, 귀로에 하와이에서 이른바, "하와이 구상"을 한다. 대일청구권자금을 포항제철 건립자금으로 전용하자는 구상이다. 1966년에 합의된 대일청구권자금은 농업과 경공업 개발자금으로 그 용도가 제한 된 자금이다. 이를 제철소 건립을 위한 자금으로 전용하기 위해서는 일본 제철업계의 협조가 필요했다.
귀국 후 박태준 회장은 일본을 방문, 제철업계 인사와 정계 인사들을 두루 설득하여, 1969년 12월 한일기본협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이로서 포항종합제철소 건립을 위한 자금과 기술이 확보되고, 1970년 4월 1일 오후 3시, 역사적인 포항종합제철공장 착공식을 갖는다.
기공식 모형 - 최 안내원과 김 사장
포항에 조성하는 제철단지는 약 300만 평에 이른다. 1968년 5월, 부지 조성 현장에 연 면적 약 60평의 건설 본부건물이 세워진다. 모래바람만 황량한 벌판에서, 건설을 지휘하는 이 본부건물이, 마치 사막의 야전사령부처럼 보인다 해서, 이 건설 본부를 롬멜 하우스라고 불렀다고 한다.
역사관에 복원된 롬멜 하우스
1970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은 포항 현장을 방문한다. 롬멜 하우스 상황실에서 허허벌판인 제철소 부지를 바라보던 박 대통령은 "이거 남의 집 다 헐어놓고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건가?" 라고 혼잣말로 걱정했다고 한다. 이 후 박 대통령은 13차례나 포항 건설현장을 방문하고, “포항제철과 관련된 일은 박태준 사장이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소신껏 처리하라.”는 이른 바 "종이 마패"에 친필 서명을 하는 등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는다.
종이마패 - 박 대통령의 재량권 부여 문서, 왼쪽 위에 박 대통령 싸인
박태준 사장은 소장으로 예편한 육사 출신이다. 성공하지 못하면, 모두 우향우 하여 포항 앞바다에 빠져 죽자는, "우향우 정신", 열연공장 공기지연을 만회하기 위해, 두 달 동안이나 하루 700m²를 타설한, "밤낮 없는 돌관 작업", 그리고 "빨간 헬멧의 특공대" 등 공사현장은 흡사 전장 터와 같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1973년 6월 9일, 아침 7시 30분, 용광로 출선구가 "뻥" 하고, 뚫리며 황금빛 쇳물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감격적인 순간이다.
우향우 정신
붉은 헬멧
역사관에는 이 1기로를 1/10로 축소한 모형로가 있다. 안내원의 안내로 안으로 들어가, 첫 출선 장면을 그린, 2분 10초짜리 영상물을 본다. 실로 감격적인 장면이다. 콧마루가 시큰하고, 눈물이 쏟아 질 것 같다. 안내원은 조용한 목소리로, "나이 드신 어르신들은 이곳에서 눈물을 흘리시는 분들이 많아요." 라며 고개를 돌린다.
로(爐) 하나를 완성하는 데는 돈이 얼마나 들까? 3기로를 완성하는데 소요된 건설비는 약6,300억 원 이였다고 한다. 그 해 우리나라 년 간 예산규모에 해당하는 금액이라고 한다. 1981년 2월, 4기로가 준공되어, 850만 톤 규모의 일관제철소가 완성된다. 세계 11위의 대단위 제철소가 태어나는 순간이다.
협동의 상징, 세 손잡이 삽
이어서 포스코는 다시 광양에서 제2의 신화를 만들어 낸다. 포항제철소가 모래위에 세워진 것이라면, 광양제철소는 바다위에 세워진 제철소다. 바다를 매립하여 약 450만 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1,300톤 규모의 "꿈의 제철소"를 건립한 것이다.
광양만의 어제와 오늘
1968년 포항에서 시작한 제철소 건설 사업은 1992년 10월, 광양 4기설비가 완성됨에 따라, 포스코의 조강생산 능력은 2,100톤에 달하여, 세계 3위의 철강기업으로 부상하는 기적을 이룬다.
3층의 창의관, 창암관, 세계 속의 포스코를 둘러보고, 2층 영상관으로 내려와 김해에서 왔다는 한 무리의 초등학생들과 함께 "사운드 오브 포스코"를 관람한다. 이로서 약 1시간 20분에 걸친, 감동적인 포스코 역사관 견학이 끝난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업 역사관 - 짧은 기간에 세계 제일의 종합제철소를 만들기까지의 건설 역군들의 꿈과 땀과 힘을 느낄 수 있는 실로 감동적인 역사관이다. 안내원도 프로급이다. 포스코 역사관 홈 페이지 "http://museum.co.kr"을 당장 열어 보시고, 포항에 가게 되면, 열일 젖히고, 꼭 포스코 역사관을 방문하라고, 권하고 싶다.
역사관 문을 나서니 빗방울이 후둑거린다. 트럭을 타고, 조금 높은 곳에 자리 잡은 포스코 홍보관 앞에서, 흰 연기를 뿜어내는 제철공장을 바라본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이 여의도의 1.5배, 포항제철공장이 2.7배, 광양제철공장은 무려 4,5배에 이른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고, 사명감을 갖고, 이런 단일 공장을 세운 사람들, 이들이 바로 한국경제의 기적을 만들어 낸 거인들이다.
홍보관에서 본 포항제철소
빗속의 형산강 변을 달린다. 빗발이 좀 잠잠해진다. 차에서 내려 강둑을 걸으며, 하얀 연기를 토해 내는 거대한 공장을 넘겨다본다. 역사관에서 받았던 감동이 다시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형산강, 연기에 쌓인 공장, 환경감시탑, 그리고 형산교 등을 망연히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트럭에 오른다. 트럭은 해안도로를 달려, 대게가 기다리고 있는 영덕을 향한다. 바람이 이나 보다 파도가 거칠어진다.
환경감시탑
삼사해상공원에 도착하여 주변을 둘러본다. 비는 여전히 오락가락이다. 영덕대게 타운이 있는 강구리 항으로 들어서서, 매스콤에서 좋은 집이라고 소개하는 봉성영덕대게 집을 찾아 들어선다. 1시가 가까운 점심시간인데도 식당 안 은 텅 비었다. 시즌도 아닌데다 비까지 내려 더욱 더 손님이 없는 모양이다.
영덕 대게 타운이 있는 강구리 항
주인이 다가오더니, 수족관에서 드실 게를 고르라고 한다. 김 사장은 서비스로 내 놓은 땅콩만 까먹으면서 꿈적도 않을 기세다. 할 수 없이, 주인을 따라 수족관으로 가서, 대게를 구경한다. 한 마리에 10,000원에서 180,000원까지 다양하다고 한다. 이렇게 선택 범위가 넓어지니, 고르기가 쉽지 않다. 김 사장에게 나와 보라고 소리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알아서 골라 오라는 것이다.
주인에게 먹을 만한걸 추천해 달라고 부탁한다. 주인은 영덕 대게는 큰 놈일수록 맛이 좋다 면서, 한 마리에 150,000원 하는 큰놈 중에서, 다리가 1~2개 잘린 상이용사를 골라, 50,000원에 줄 터이니, 2 마리 정도면, 영덕 대게 맛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이다. 김 사장은 이 마트에서 러시아 산 털게를 Kg 당 25,000원 주고 사 먹었다고 하니, 아마 점심에 100,000원어치 대개를 먹자하면 펄쩍 뛸게 틀림없다. 일이 난처하게 됐다.
수족관의 영덕 게 - 한 마리에 18만을 호가하는 놈도 있다
주인에게 Kg 에는 얼마냐고 묻는다. 주인은 영덕 대게는 Kg으로는 팔지를 않고, 수입 게만 Kg으로 판다면서, 맨 아래 수족관에 둥둥 떠 있는 놈들을 가리킨다. 그러는 사이에 불륜(不倫)으로 보이는 남녀가 다가와 수족관을 기웃거린다. 눈치 빠른 주인이 더 이상 나를 상대할 리가 없다.
자리로 돌아와 김 사장에게 상황을 보고하자, 김 사장 왈, "맛만 보고가자." 그렇다면, 무슨 소린지 알아듣겠다. 다시 수족관으로 나간다. 점포 뒤로 150,000원짜리 게를 보러 갔던, 불륜들도 다시 나와, 앞의 수족관을 기웃거린다. 좋은 영덕 대게를 고르는 법을 책에서 본 적이 있다. 다리가 가늘고, 몸집이 큰 놈으로 활발하게 움직이는 놈을 고르는 것이 요령이라고 한다.
눈을 크게 뜨고 수족관에서 움직이는 게들을 본다. 적당한 놈이 눈에 띄어, "저거, 얼마요?" 라고 물으니, 35,000원이라고 한다. "그 놈으로 합시다."라고 하니, 주인은 "한 마리 만요?" 하며 딱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그래요, 오늘은 영덕대게 맛만 봅니다."라고 대꾸해준다. 주인은 내가 고른 놈 뒤를 느릿느릿 따라가는 엉뚱한 놈을 꺼내, 아줌마에 획 던지며, "이거, 삶아요." 라고 한다. "아니, 그 놈이 아닌데...."라고 하고 싶지만, 말할 기회를 놓치고, 할 일 없이 자리로 돌아온다.
백세주를 주문하니, 삶은 소라와 함께 가져다준다. 서비스로 주는 소라 맛이 아주 좋다. 불륜들도 게를 골랐는지 식당으로 들어와서, 저 만치에 자리를 잡는다. 이윽고 아주머니가 커다란 쟁반에 담긴 삶은 게를 가져 다 놓는다. 등껍질이 붉은 놈이 그럴 듯해 보인다.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으려는데, 아주머니는 순식간에 게 등짝을 뜯어내고, 다리를 떼어 낸 후, 몸통을 가위로 자른다.
역시 본 고장에서 먹는 게 맛이 훌륭하다. 불륜들의 테이블에도 삶은 게가 운반된다. 쟁반이 두 개다. 얼마짜리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마리씩 주문한 모양이다. 남자가 소주를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면, 여자는 잽싸게, 발라 논 게살을 남자 입에 넣어준다. 저런 호강 한번 못해보고 고지식하게 세월만 보낸 두 늙은이는 게 껍데기 국물에 비빈, 한 공기 밥을, 둘이 나누어 먹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식당 문을 나선다. 오락가락하던 비가 어느새 진눈개비로 변하여 도로가 하얗다. 날씨가 험해져서 걱정이 되지만, 이제 남은 것은 하회마을을 잠시 둘러보고 집으로 가는 일만 남았다. 만약 계속 진눈개비가 내린다면, 하회마을 관광을 포기하고 서울로 바로 올라가면 된다. 하지만 34번 국도로 들어서니, 이 곳 날씨는 말짱하다. 34번 국도에는 차량 통행이 뜸하고, 의외로 곳곳에 도로 양쪽으로 넓은 들이 펼쳐져있다. 임하호가 가까워지자, 임하호로 흘러들어가는 계류 위로 높다랗게 걸린 다리를 지나면서, 굽어보는 풍광이 아름답다.
안동 시내를 통과하느라 시간을 많이 소비하여, 하회 마을에는 5시가 다 되어 도착한다. 주차비가 2,000원, 입장료가 2,000원이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니, 1999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곳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오른쪽에 있다. 기념관 안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생일상을 받는 커다란 사진이 걸려있다. 해지기 전에 강변 풍광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마을로 들어서지 않고, 바로 강변길을 따라 걷는다.
하회마을에서 생일상을 받는 엘리자베스 여왕
강변길
마을 삼면을 낙동강이 감싸고 흐른다. 너른 백사장, 무성한 송림, 강 건너편의 단애, 그리고 지는 해를 받으며 펼쳐진 옛 가옥들, 완연히 별세계에 들어선 느낌이다. 멀리서 보면 마치 연꽃이 물에 떠 있는 형상이라 해서 연화부수의 지형이라고 한다. 나룻배를 타고 강 건너 부용대에 오르면 하회마을을 부감할 수 있다는데, 시간이 없어 유감이다.
부용대
부용대로 건너는 나루터
강변 송림
김 사장은 몇 년 전에 가족들과 함께 하회마을에 와 봤다고 한다. 오늘은 나를 위해 복습을 하는 셈이다. 김 사장 설명에 의하면, 독특한 지형에 들어선 이 마을은 대대로 풍산 류씨의 집성촌으로, 전통가옥들, 그리고 마을에 갖고 있는 유물들을 보전 발전시키기 위해, 정부는 이 마을 전체를 주요 민속자료 제 122호로 지정했다고 한다.
강변을 따라 걷다가, 남쪽에서 마을로 진입한다. 마을중심부에는 양반들이 살았던 대규모의 기와집들이 처마를 맞대고 늘어서 있고, 그 주변을 에워싸듯이 평민들의 초가집들이 배치되어 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 나지막한 토담, 주렁주렁 탈바가지가 걸린 하회탈 전시관, 민박을 받는다는 낮은 초가집 등, 모두가 지나간 세월과 함께 사라져 버린 것들을 이곳에서 본다. 김 사장의 안내를 받으며, 유명한 입암고택(양진당)과 충효당을 중점적으로 둘러본다. 이런 큰 고택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는다고 한다. 정부에서 도배까지 해 주며 관리를 해주기 때문이란다.
남쪽에서 본 마을
초가 매점
하회탈 전시관
좁은 골목길
정겨운 토담길
양진당은 솟을 대문이 높직하고, 커다란 규모의 사랑채에는 입암고택 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서둘러 충효당을 둘러보고, 징비록을 비롯한 서애 류성룡의 귀중한 저서와 유품 등이 전시된 영모각으로 들어선다. 미증유의 왜란을 겪은 재상, 유성룡은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하고, 이반된 민심 수습에 진력했던 명재상이다. 그분의 유물들을 이 정도로 모으고, 보전하는 것은 참으로 뜻 깊은 일이다.
입암고택 솟을대문
임압고택 사랑채
충효당
영모각
유성룡 초상
영모각을 나서니 밖은 이미 어두워졌다. 마을 입구로 나오면서, 적당한 식당을 찾아 들어선다. 테이블이 대여섯 개 놓인, 고풍스런 분위기의 작은 식당이다. 두 개의 테이불에서 선객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간 고등어 정식과 직접 만들었다는 두부, 그리고 동동주 반 되를 주문한다. 할머니가 시중을 들고, 할아버지가 거든다. 며느리가 쉬는 날이라고 한다.
식당 내부
동동주도 싱거운 편이고, 음식도 별 특징이 없다. 꼬장꼬장해 보이는 할아버지는 서애 유성룡의 13대 손이라고 한다. 할아버지에게 이것저것 물으며, 술 한 잔을 권해도, 술은 못한다고 손사래를 치더니, 이제 더 찾아올 손님도 없다고 보았는지, 할머니만 남겨 놓고, 횡 하니 밖으로 나가버린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 문을 나선다. 사방이 조용하고 인적이 없다. 너른 주차장에 홀로 서 있는 트럭을 움직여 서울로 출발한다. 집에 도착하니 12시가 다 됐다. 사흘 전, 7시에 서울을 떠났으니, 꽉 찬 2박 3일간의 여행을 한 셈이다. 다음부터는 여행의 패턴이 조금은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한다. 주마간산 격으로 많은 것을 보려고 하기 보다는, 유서 깊은 곳을 골라, 여유를 갖고, 차분히 돌아보고 싶은 기분이다.
(2006.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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