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덕유산(왼쪽)과 장수덕유산>

 

백두대간 종주를 마무리하려면 아직 3구간 반을 더 땜방해야 한다. 산이야 어디를 가지 않겠지만, 시간은 간다. 그러니 느긋하게 땜방할 기회를 기다리지 못하고,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금년 중에 모두 마쳐야겠다고 생각한다.

 

육십령에서 동엽령까지의 장수덕유산(서봉) 구간이 땜방을 해야하는 구간 중에 하나다. 지난 7월에 땜방할 기회가 있었지만, 장마가 끝난 후, 무더위 속에서 무박으로 하는 산행이라, 그것보다는 더위가 얼추 가시는 9월중에 삿갓재 대피소에서 일박한 후, 향적봉을 거쳐, 백련사로 하산하는 덕유산 종주를 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교통편을 검색한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대전까지 가고, 대전에서 장계 행 버스를 탄 후, 장계에서는 택시로 육십령까지 가는 방안을 선택한다. 육십령에서 삿갓재 대피소까지의 산행시간을 8시간 정도라고 볼 때, 해 떨어지기 전에 대피소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늦어도 11시에는 산행을 시작해야하기 때문이다.

 

9월에 접어드니 낮 시간이 급격히 짧아지고, 해 지는 시간이 빨라진다. 따라서 덕유산 종주를 시도하려면 추석 전에 움직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하여 9월 15일, 16일을 산행 일로 잡고 널리 동반자를 물색한다. 하지만 웬만한 산꾼이면, 장수덕유산을 안 가본 사람이 없다보니, 동반자 구하기가 쉽지가 않다.

 

동반자가 없으면 혼자라도 떠나야겠다고 생각을 굳힌다. 반갑게도 심산(深山) 이문치 사장이 동반하겠다고 나선다. 덕유산 종주를 2번이나 했고, 대간을 하면서 2차례 장수덕유산에 오른 이 사장이지만, 내가 혼자 간다는 소리를 듣고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2l일부터 28일까지 일주일간의 일본 북 알프스 윈정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이 사장 입장에서는 결코 쉽지 않은 동반 결정이라 하겠다. 이후 이 사장의 연락을 받고, 대학 동창인 권기정 사장도 출발 전날 참여키로 하여, 모처럼 동창 세 사람이 덕유산 종주 산행길에 나선다.

 

종주코스는 아래와 같이 잡는다.
『육십령(약700m/2.3K)-할미봉(1,026.4m/2.92K)-교욱원삼거리(약900m/2.93K)-장수덕유산(1.492m/1.51K)-남덕유산(1,507m/1.45K)-월성재(1,240m/약 2K)-삿갓봉(1,418m/약 1K)-삿갓골재 대피소(1.260m/2.14K)-무룡산(1,492m/4.25K)-동엽령(1,320m/2,2K)-송계사삼거리(1,420m/2.0K)-향적봉(1,614m/2.4K)-백련암』마루금 도상거리 약 27.1Km, 여기에 백련암에서 버스 정류장까지의 거리 약 5.7Km를 합치면 총 32.8Km에 달하는 긴 여정이다.

 

2005년 9월 15일(목).
5시 50분 서울 고속버스터미널 경부선 매표구에서 만나기로 한다. 강남구청 역에서 7호선 첫차를 타고. 고속버스터미널 역에 내려, 5시 45분 경 경부선 제 2 매표소 앞에 선다. 대전행 표를 파는 곳이라, 이 곳에서 기다리지만, 5시 50분이 되어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윽고 권 사장이 모습을 보인다. 매표구가 여러 곳이라 이곳 저곳 찾아 다녔다고 한다. 혹시나 해서 이 사장에게 전화를 해보니 역시나 이 사장도 다른 매표구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대답이다.

 

버스는 정각 6시에 대전으로 향한다. 대전 동부고속버스터미널이 목적지다. 대전에는 버스터미널이 3군데가 있다. 따라서 승차 전에 반드시 행선지를 확인해야 한다. 드믄드믄 자리를 잡은 승객들은 빼앗긴 새벽잠을 보충하느라 모두들 골아 떨어진 모습이다. 버스가 이동 침실인 셈이다. 분위기에 휩쓸려 깜빡 잠이 든다. 7시 10분 경 눈을 뜨고, 가져온 김밥 한 줄로 아침을 때운다.

 

7시 45분 버스는 예정보다 15분 빨리 터미널에 도착한다. 장계로 가는 동부시외버스터미널은 길 건너 5분 이내의 거리에 있다. 터미널에 도착하여 표를 산다. 8시 30분 출발, 요금은 7,200원, 장계까지 소요시간은 1시간 50분이다.

 

표를 사고 대합실 쪽으로 이동하는데, 낮선 아저씨가 다가오면서, 어디를 가느냐고 묻는다. 육십령까지 간다니까, 승용차로 가지 않겠느냐고 권한다. 마침 진주 쪽으로 가는 승용차가 있어 빈차로 가느니, 모시고 가겠다는 것이다. 이미 표를 샀다고 하자, 얼마를 주었냐고 다시 묻는다. 21,600원 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표를 무르고, 30,000원에 승용차로 가자고 한다.

 

일행들과 상의를 하고, 매표구로 가서, 환불을 요구하니, 아침인데도 아가씨는 선선히 환불에 응해준다. 미안하다. 8시 20분 경, 검정 색 다이너스티 승용차에 오른다. 당초에는 10시 20분 경, 장계에 도착하여, 택시를 타고(택시요금은 10,000원), 10시 40분 육십령에 이르러, 11시전에 산행을 시작한다는 계획이었으나, 뜻밖에 승용차를 이용하게 되어, 1시간 반정도 귀중한 시간을 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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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양반도 손님들을 모시고 가게되어 다행이라고 즐거워한다. 승용차는 대전, 통영간 고속도로를 무섭게 질주한다. 장수 IC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나 장계를 거쳐, 구 도로로 육십령으로 향한다. 승용차는 구불구불 험한 산길을 잘도 오른다. 기사 양반은 오랜만에 육십령을 오른다며, 전에 이 험한 길에서 버스가 굴렀던 끔찍한 사고를 회상한다.

 

9시 10분 경 육십령에 도착한다. 차에서 내리니 바람이 거세고, 춥다. 해발고도 약 700m의 육십령의 날씨는 이미 늦가을 날씨다. 휴게소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육십령루에 올라 주위를 조망한다. 좌우의 대간 마루금은 구름에 가리고, 발 아래로 장계면이 밝는 햇볕 아래 넓게 펼쳐져 있다. 아름답다. 산행 준비를 마치고, 장수군에서 세운 육십령 안내도 앞에 선다. 안내도는 간단히 육십령의 유래를 설명하고, 영남과 호남을 이어주는 이 고개에서 주위 명산들까지의 거리 및 소요시간을 알려준다. 남덕유산 약 8Km(7시간), 영취산 약 11Km(7시간), 백운산 약 14.5Km(9시간), 장안산 약 14.5Km(9시간).

<육십령루 현판>

<육십령 안내판>

고개 마루턱에 세워진 충영탑과 거대한 표지석을 카메라에 담고, 대간꾼들에게 잘 알려진 조경자 할머니 얼굴이라도 보려고, 고개 너머 휴게소를 찾는다. 조 할머니는 외출 중이라 만나지를 못하고, 다른 할머니 두 분이 지키고 있는 휴게소에서 식수를 보충하고 다시 고개 마루턱으로 되돌아온다.

<충영탑>

<표지석>

오늘의 산행 기록은 아래와 같다.
『(9:28) 산행시작-(10:07) 헬기장-(10:28~33) 할미봉 정상 -(10:40) 대포바위 갈림길-(11:13) 공터-(11:40) 교육원 삼거리-(12:13) 첫 번째 전망대-(12:37)-두 번째 전망대-(13:29) 돌탑-(13:32) 장수덕유산 정상-(13:35~14:20) 헬기장에서 중식-(14:29) 남덕유 갈림길-(15:10) 남덕유 정상-(15:22) 다시 삼거리-(15:58) 월성재-(16:40) 남덕유 2.3K 이정표-(17:19) 삿갓봉 정상-(17:38) 샘터/황점 방향표지-(17:46) 삿갓재 대피소』, 총 산행시간은 8시간 18분으로, 마루금 산행 7시간 33분(휴식 포함)에, 중식 시간이 45분이다.

 

대간길 입구에 이정표가 서 있고, 등산로는 통나무로 막혀 있다 아마도 경방기간에 출입을 통제하느라고 막아놓은 통나무를 치우지 않은 모양이다. 통나무를 잘라 만든 아취 있는 이정표를 카메라에 담고, 통나무 사이를 빠져 넘어, 9시 28분 산행을 시작한다. 이정표는 <육십령(2.3K)-할미봉(2.92K)-교육원 삼거리(2.93K)-서봉>이라고 거리를 알려주고, 그 아래로는 육십령은 덕유산 종주의 시점(始點)으로 삿갓재 대피소까지 거리는 약 13Km, 소요시간이 7~8시간임으로, 9시 이후의 종주는 조난의 위험이 있어 금한다는 알림 말이 적혀 있는 나무판이 붙어 있다.

<등산로 입구의 이정표>

육십령은 해발고도가 약 700m이다, 할미봉의 고도는 약 1,026.4m, 따라서 앞으로 300m 정도의 고도 차를 죽여야 한다. 승용차를 이용한 덕에 1시간 반을 벌었겠다, 기다리는 산악회 버스가 있는 것도 아니겠다, 바쁠 것이 하나도 없다. 느긋한 마음으로 가파른 사면을 천천히 오른다.

 

이윽고 주능선에 오른다. 직진하는 길과 오른쪽 내리막으로 이어지는 갈림길에 이른다. 오른쪽 내리막으로 붉은 산행리본이 매달려 있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리막을 내려서니, 등산로는 아름다운 소나무 사이로 이어진다. 산행을 시작한지 12분, 왼쪽으로 무덤 1기가 누워 있고, 그 뒤로 119 구조대의 <덕유 11-02> 팻말이 세워져 있는 곳을 지난다. 500m 단위로 세워진 이 팻말들은 이정표보다 더 유용하게 걸어 온 거리와 가야할 정도를 가늠하게 해준다.

<무덤 1 기 - 산행 중 유일하게 본 무덤>

비교적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습관이란 것이 무섭다. 바쁠 것도 없는데, 평탄한 길에서는 속도를 내어 두 사람을 젖히고 홀로 앞서 걷는다. 대신 오르막에서는 속도를 죽여 체력 손실을 최소화한다. 고래 대장에게 배운 행보법이다. 가파른 길이 참나무 숲으로 이어진다. 간간이 암릉이 나타나고, 암릉 위에서니, 왼쪽으로 장계면 너른 들이 눈 아래 펼쳐진다.

<할미봉 오르면서 본 장계면>

 

10시 경, 작은 봉우리에 올라선다. 비교적 너른 공터다. 공터 한 옆에 <덕유 11-03> 팻말이 서있다. 공터를 지나, 급한 비탈을 내려서서 안부를 지난다. 공터를 지난 후 7분만에 비교적 잘 손질된 헬리포트에 오르고, 등산로는 누런 황톳길을 지나 푸른 잡목 숲으로 이어진다. 오른쪽으로 서상면 상남리 방향의 마을이 보이고, 그 너머, 높은 산들은 구름을 이고 있다.

<미 8군 표지의 헬리포트>

 

2시 방향에 나뭇가지 사이로 암봉들이 보인다. 할미봉이 가까운 모양이다. 10시 10분 경 삐죽 삐죽 솟은 암봉 뒤로 할미봉 정상이 보인다. 길은 점점 가팔라지고, 걷는 속도가 느려진다. 본격적으로 암릉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두 사람에게 길을 내 주고, 잠시 멈춰 서서 걸어 온 길을 되돌아본다. 멀리 깃대봉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 뒤로 백운산, 영취산, 장안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온다. 대간과 정맥을 하면서 걸었던 능선이라 더욱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가까이 본 할미봉>

암릉길을 10여분쯤 더 올라, 10시 28분 경 할미봉 정상에 선다. 정상에는 앞서 오른 두 사람이 쉬고 있다. 할미봉 정상은 너른 암반이다. 정상에는 삼각점이 박혀있고 <함양 304, 2002년 복구>, 커다란 할미봉 정상 안내판이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동남쪽으로 불끈 솟은 암봉 뒤로 상남리의 마을이 그림 같다. 주위의 조망을 즐기며 5분 간 휴식한다.

<할미봉 정상에서 본 상남리>

<할미봉 정상의 조망 안내판>

<할미봉 지나 가야할 마루금 - 서봉은 구름에 가렸다>

 

급경사 암릉길을 내려선다. 로프가 걸려 있다. 전에는 로프가 없었다고, 심산 대원이 귀뜀을 해준다. 직벽이 아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내려서면, 로프가 없어도 크게 위험하지는 않겠다. 물론 눈 쌓인 겨울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로프는 3 구간에 걸쳐 거의 잇달아 매어져 있다. 급경사 암릉길을 내려서자 흙길이 이어진다.

 

10시 40분 대포바위를 설명하는 안내판을 지난다. 안내판 한 귀퉁이가 떨어져 너덜거린다. 보기가 흉하다. 안내판 설명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함락시킨 왜군들이 전주성을 공격하려고 육십령을 넘는다. 문득 할미봉 쪽을 바라보니, 산 중턱에 거대한 대포가 걸려있다. 혼비백산한 왜군들은 오던 길을 되돌아, 운봉을 거쳐 남원으로 선회한다. 덕분에 장계 지역은 화를 면하게 되고, 이 후 이 바위는 대포바위라 불려진다. 하지만 남근석이란 명칭이 더 친근하다고 한다. 사내아이를 갖지 못한 여인들이 이 남근석을 향해 치마를 걷어올린 채 소원을 빌면, 사내아이를 얻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포바위 안내판>

 

대포바위 안내판을 지나 등산로는 오른쪽으로 굽어져, 급한 암릉길로 이어진다. 역시 로프가 걸려 있다. 암릉길에서 서봉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능선을 카메라에 담는다. 암릉길을 내려서니 평탄한 길이 이어지고, 10시 55분, 넓은 공터에 세워진 <덕유 11-05> 팻말을 지난다. 이후 교육원 삼거리까지의 약 3Km 구간은 다소간의 업 다운은 있지만 비교적 평탄한 아름다운 참나무 숲 오솔길이다. 다시 앞장을 서서 빠르게 달려나간다.

<서봉이 보인다>

<너른 공터를지나고>

 

11시가 지나자 더워지기 시작한다. 11시 40분 교욱원 삼거리(900m)에 이른다. 아취있는 통나무 이정표와 팔을 벌린 이정표, 두 가지 이정표가 나란히 서 있다. 이곳에서 서봉까지의 거리는 2.13Km, 고도차이는 약 600m에 이른다. 가파른 언덕길을 허위허위 오른다. 10여분 정도 오르니, 나뭇가지 사이로 날카로운 서봉과 서봉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능선이 제 모습을 보인다. 산죽밭을 지나니, 황톳길 급경사 사면에는 밧줄이 이어져 있다. 자그마한 언덕을 지나, 커다란 소나무 숲을 지난다. 송림을 지나는 바람소리가 시원하다.
<교욱원 삼거리>

 

<나뭇가지 사이로 가까이 보이는 서봉>


 
삼거리를 지나오른쪽 급경사 암릉길을 오른다. 오른 쪽으로 남덕유산(동봉)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11시 54분 너른 헬기장에 이른다. 헬기장 주변에는 옅은 보랏빛 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들국화인가? 무척 아름답다.

 

급경사 암릉길을 오른다. 두어 군데 "위험"표지 팻말이 나뭇가지에 걸려있다. 12시 34분 암봉에 올라선다. 지도에 표기된 첫 번째 전망대인 모양이다. <덕유 11-12> 팻말이 세워져 있다. 배낭을 벗어 놓고, 주위를 둘러보며 한동안 휴식을 취한다. 전면에 날카로운 서봉과 그 옆으로 부드러운 동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뒤돌아, 서상면 군장동에서 유연하게 시작하여 할미봉에서 힘차게 솟구친 아름다운 능선을 감상한다. 확 트인 시야에, 눈 아래 펼쳐진 조망이 그림 같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결이 시원하다. 머리 속이 텅 비워지는 느낌이다.

<전망대에서 본 서봉 가는 길>

<전망대에서 본 오른쪽 조망>

로프가 걸려 있는 급경사 암릉길을 내려선다. <덕유 11-13> 팻말을 지나니 서봉의 암봉들이 눈앞에 가까워진다. 해발 1,300m, 육십령에서 6.8Km 지점에 와 있다고 이정표가 친절하게 알려준다. 1시 10분, 두 번째 전망바위 위에 선다. 울퉁불퉁한 바윗덩어리, 서봉 정상이 눈앞에 있다.

<두번째 전망대에서 뒤돌아 본 조망>

<가까이 본 서봉>

 

암봉을 내려서서 정상으로 향한다. 길은 다시 가팔라지며, 곳곳에 로프가 걸려있다. 작은 공터에 이른다. 예쁜 돌탑이 서 있고, 약수터 방향과, 남덕유산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서 있다. 오른쪽으로 돌아 암릉을 오르니, 바로 장수덕유산(서봉) 정상이다. 시각은 1시 32분. 정상에는 <서봉, 해발고도 1,492m>를 알리는 안내판, <덕유 11-15>의 구조대 팻말, 그리고 통나무를 잘라 만든 이정표가 나란히 서 있다.

<돌틈에 세워진 119 구조대 팻말>

<동료들은 정상에 서고>

<정상 직전 돌탑과 이정표>

<서봉 정상의 등산 안내도>

<서봉에서 본 장계면>

이 사장과 권 사장은 정상을 지나 건너편 헬기장에 배낭을 벗어 놓고 쉬고 있다. 1,500m 가까운 고도임에도 바람도 없어, 사방이 고요하다. 추석이 가까운 평일이기 때문인지. 서봉 정상에 오르기까지 사람구경을 못한다. 정상주 한잔씩을 나누어 마시고, 김밥과 떡으로 점심을 즐긴다.

<정상 건너편 헬기장>

 

헬기장에서 하계(下界)를 굽어본다. 저 아래 장수군 장계면과 함양군 서상면이 밝은 햇빛 아래 평화롭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한 눈에 내려보며 신선노름을 하고 있는 거다. 수많은 능선들이 굽이굽이 깊은 골을 이루며 내달린다. 지리산 천왕봉도 보인다지만 안개에 가려 식별이 어렵고, 대간 능선이 멀리 아련하다. 앞을 막아 선 우람한 남덕유산은 구름을 이고 있다. 가까운 거리에서 속인들 앞에 제 모습 들어내기를 꺼리는 모양이다. 북동쪽으로 멀리 삿갓봉이 구름 속에 흐릿하게 솟아 있다.

<헬기장에서 본 장계면 - 깃대봉, 영취산, 백운산, 장안산이 보인다>

<헬기장에서 본 서상면>


<남덕유산 정상부>

바쁠 것 없는 산행이다. 식사를 마치고, 과일을 들면서 자리를 뜨지 못한다. 땀이 다 식었는지 오싹 한기를 느끼고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철사다리를 내려선다. 산죽 사이로 <덕유 11-16> 팻말을 지나, 남덕유산으로 오르는 갈림길을 지난다. 오른쪽으로 산행리본들이 가득 달려있다. 4분 후 두 가지 이정표가 나란히 서 있는 삼거리에 이른다. 남덕유 정상까지는 0.34Km, 월성재까지 1.1Km 라고 거리를 알려준다. 오른쪽 공터에 배낭을 벗어 놓고, 2시 50분 경, 권 사장과 함께 남덕유산 정상을 향한다. 이 사장은 공터에 남아, 낮잠을 즐기겠단다.

<두번째 남덕유 갈림길 이정표>

롱 다리 이사장이 성큼성큼 앞장을 서는가 싶더니, 어느새 시야에서 모습이 사라진다. 교보증권 사장노릇을 끝으로 월급쟁이에서 벗어난 이 사장은 스포츠를 좋아하는 건장한 체구다. 아마도 90년대 후반, 여의도에서 만나 것이 마지막이니, 거의 10년 만에, 오늘 새벽, 다시 만난 이 사장의 입술이 터져 있다. 웬일이냐고 물으니, 기분 나는 김에 테니스를 다섯 게임하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 꼴이 됐다고 웃는 친구다.

 

동봉 오름 길에 오른쪽으로 조망이 트이고, 바위 덩어리 서봉이 험상궂게 버티고 서있다. 공터에 이른다. 앞서 보았던 갈림길에서 올라오는 길이 보이고, 한 옆에 이정표가 서 있다.<남덕유산 0.1Km, 삿갓재골 대피소 4.2Km> 계단을 오르고, 암릉을 거쳐, 3시 10분 경 남덕유산 정상(1,507m)에 선다. 정상에는 <덕유 11-17> 팻말, 이정표, 정상석, 삼각점 등이 고루 배치돼 있다. 안개가 짙어 주위 조망은 별로다. 가까운 서봉이 안개에 가려 더욱더 험상궂어 보인다. 권 사장과 기념사진을 찍고 하산한다. 3시 22분 이 사장이 기다리고 있는 공터에 도착하여 월성재로 향한다.

<남덕유산 정상석>

<동봉에서 본 서봉>

 

가파른 비탈길을 달려, 3시 58분 경, 월성재(1,240m)에 도착한다. 커다란 등산 안내판, 통나무를 잘라 만든 이정표, 그리고 <덕유 01-44>팻말이 사이 좋게 나란히 서 있다. 너른 공터 주변에는 작은 붉은 꽃이 다닥다닥 달린 야생화가 가득하다. 오른쪽으로 황점으로 내려서는 길이 뚜렷하고, 직진하는 길이 삿갓봉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오른쪽으로 삿갓봉 꼭지가 보인다.

<월성재 안내판>

<월성재에서 북동 방향으로 멀리 보이는 삿갓봉>

 

월성재에서 약 5분간 휴식을 취한 후, 산죽 사이로 이어진 등산로를 따라, 오늘 산행의 마지막 오름인 삿갓봉으로 향한다. 5분 정도 올랐을까? 갑자기 전망이 확 트인다. 정면으로 멀리 삿갓봉이 보이고, 삿갓봉으로 이어진 웅장한 능선이 눈앞에 펼쳐진다. 장관이다. 오른쪽으로는 낮게 드리워진 검은 구름 아래 저녁을 맞는 황점 마을이 아련히 누워있다. 이 사장이 시커멓게 우뚝 솟은 서봉을 등지고, 전망대로 올라오고 있다.

<삿갓봉으로 이어진 아름다운 능선>

 

4시 15분 <덕유 01-43> 팻말을 지난다. 검은 구름에 쌓인 삿갓봉이 가까이 보인다. 등산로는 삿갓봉으로 이어진 능선을 타지 않고 산 사면을 따라 비스듬히 이어진다. 4시 50분 삿갓골재 대피소 2.0Km를 알리는 이정표를 지나, 1,340m봉 전망대에 선다. 배낭을 벗어 놓고, 주위를 살핀다. 서봉에서 동봉을 거쳐, 월성재로 떨어지는 긴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정면으로 삼각형 삿갓봉이 뾰족하다.

<가까이 본 삿갓봉>

왼쪽으로 가파른 암릉길을 내려선다. 로프가 걸린 곳이 있고, 와이어 로프가 설치된 곳을 지난다. <덕유 01-41> 팻말을 지나고, 쑥부쟁이가 흐드러지게 핀 칼날능선 위를 걷는다. 저녁안개가 온 몸을 휩쓸고 흐른다. 하늘을 걷는 기분이다. 이윽고 암릉이 끝나고, 산죽길이 이어진다.

<칼날능선 위의 쑥부쟁이>

 

삿갓골재 대피소 1,0Km를 알리는 이정표를 지나 조금 더 걸으니, 나뭇가지에 "봉갓삿"이라는 묘한 팻말이 붙어 있다. 붉은 화살표가 가르치는 방향을 따라 삿갓봉으로 오른다. 6분 후 정상표지석이 세워진 좁은 삿갓봉 정상(1418.6m)에 이른다. 사방이 온통 안개다. 정상석을 카메라에 담고, 산행 리본이 어지럽게 걸려있는 왼쪽 사면을 따라 삿갓봉을 내려선다. 이번에는 "삿갓봉"이란 팻말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묘한 팻말>

<삿갓봉 정상석>

 

나무에 걸린 "삿갓골재 대피소" 팻말이 가르치는 방향을 따라 빠르게 걷는다. 부드러운 흙길이 비교적 평탄하게 이어진다. <덕유 01-40> 팻말을 지나고, 삿갓골재 대피소 0.5Km를 알리는 이정표를 지난다. 숲길에 안개가 내려앉아 주위가 벌써 어둑해지는 느낌이다. 샘터/황점 방향을 알리는 팻말을 지나니 길은 오른 쪽으로 굽어져 내리막 비탈길로 이어진다. 발전기 소리가 들리고, 나뭇가지 사이로 대피소가 보인다. 5시 46분 삿갓골재 대피소에 도착한다.

<삿갓재골 대피소>

7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피소지만, 오늘 손님은 달랑 우리 세 사람뿐이다. 대피소로 들어서서 널널하게 자리를 잡는다. 배낭을 내려놓고, 관리인에게 땀 씻을 곳을 물으니, 60m 아래, 샘터를 이용하던가, 아니면 대피소 앞 물통에 받아 놓은 물을 사용해도 좋다고 한다. 물통의 물을 이용해 땀을 닦는다. 춥다. 수건에 물을 적셔, 몸의 땀을 대강 닦아내고, 서둘러 재킷을 꺼내 입는다.

 

대피소에서 파는 음식은 사발 라면이 고작이다. 전자 레인지가 없어, 햇반도 취급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맥주도 팔지 않는다. 고객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전형적인 철가방의 자세다. 사발 라면 3개를 주문하고, 방으로 들어와 술잔을 나누며, 피로를 달랜다. 보드카와 럼주를 1;1로 섞고,(東城 대원의 비방이다) 이에 다시 2배 정도의 백세주를 부어 만든 칵테일이다. 신문도, TV도 없는 썰렁한 대피소에서 세 사람이 술잔을 나누며 앉아 있자니, 속세와 단절된 별 세계에 온 것 같아, 마음이 고요하다. 이 사장도, 권 사장도 같은 느낌인 모양이다.

 

남은 김밥과 사발 라면으로 저녁을 마치고, 뒤처리를 끝냈지만, 아직 8시도 안 됐다. 널찍널찍 떨어져 담요를 펴고 잠자리를 마련한 후, 마당으로 나선다. 산 속의 공기가 상큼하다. 둥근 달이 잠깐 얼굴을 비치더니, 하늘 가득한 구름 속으로 숨어버린다.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주위의 정적을 깨뜨린다. 10시 경 잠자리에 든다.

 

 

(2005. 9. 20)

Posted by Urim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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