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능선에 핀 진달래


에제 밤에는 그처럼 사납던 비바람이 지금은 부슬비로 변했다. 한참 가물다내리는 단비지만 남부지방과 영동지역에는 호우주의보가, 강원도 산골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렸다. 낮 기온이 30도를 웃돌아 한여름이 다 됐다고 하던 것이 며칠 전의 이야기다. 겨울과 봄과 여름이 공존하는묘한 시점이다.


2004년 4월 27일, 당일 대간종주 6번째 날이다. 오늘 산행구간은 제9소구간인 『영취산(1시간 40분)⇒전망대(1시간 35분)⇒민령(1시간)⇒깃대봉(1시간 10분)⇒육십령』으로 무령고개에서 영취산까지의 소요시간 30분 정도를 가산하면 5시간 45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는 비교적 짧은 구간이다.


회장님이 마이크를 잡고 인사를 한다. 오늘 참석인원이 27명, 15명 정도를 모시고 산행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우중에도 이렇게 참여한 여러분들은 진정한 산꾼들이라고 추켜세우며 고맙다고 한다. 대간종주를 전문으로 하는 가고파 산우회 산행에는 회원들이 날씨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은근히 자랑까지 한다. 많는 산악회, 산우회 간의 경쟁에서 대간종주로 차별화한 것은 탁월한 전략이라 할 수 있겠다. 비가 오니 스패츠를 작용하라고 권하면서, 여름에도 스패츠는 꼭 가지고 다니라고 당부한다. 오늘 산행은 후미 기준 5시간 30분이란다.


발목 보호가 주 용도라고 해서 숏 사이즈의 스패츠를 샀다가, 롱 사이즈가 편리할 듯 하여 다시 하나를 더 장만했다. 실제로 사용해 보니 발목 보호기능이란 말은 상술인 듯 싶고, 주기능은 눈이나 비가 신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데 있는 것 같다. 부수적인 효과로 아랫도리가 깨끗해서 좋다. 어쨌든 오늘 산행에서는 스패츠 덕을 톡톡히 봤다.


버스가 고속도로를 달린다. 간밤의 폭우로 잠을 설치신 분들이 많은 모양이다. 대부분이 주무신다. 하지만 봄비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차창 밖의 경치에 나는 눈을 돌릴 수가 없다. 빗속의 신록이 더욱 싱싱하다. 먼 산에는 침엽수들 사이에 간간이 연둣빛 신록이 섞여 있지만 나지막한 가까운 산에는 새롭게 피어난 연초록 새잎들로 생명력이 가득 느껴진다. 도로변 군데군데에는 연산홍이 붉은 자태를 뽐내고, 조그만 하얗꽃들이 다닥다닥 붙은 나무들이 군락을 이룬 곳도 있다


과수원을 지난다. 비스듬히 비탈진 과수원에는 키 작은 과수에서 돋아 나온 새잎들의 보드라운 색깔이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빗물을 머금고 황톳빛 대지가 속살을 드러내고 누워 있다. 아름다운 산하다.


고등학교 때인가? 이양하 교수의 "신록예찬"이 교과서에 실렸었다. 신록 속에서 하늘과 바람과 햇살로 우리들의 머리와 마음은 텅 비워지고, 그 비워진 자리에는 새로운 생명력으로 충만해 진다는 내용의 수필로 기억하고 있다. 집에 돌아가면 교수의 수필집을 다시 보아야겠다.


버스는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정차한다. 밖으로 나오니 비는 여전하고, 바람결에 오싹 추위가 느껴진다. 여벌로 얇은 스웨터는 준비했지만, 산 속의 기상상태가 걱정이 된다. 버스는 다시 출발하고 장수 인터체인지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나 다시 정차한다. 당일 대간종주를 위해 기다리던 회원 한 분이 승차한다. 이 분은 제주도에서 대간종주에 참여한다고 한다.


지방도로로 들어서자 2주전에는 벚꽃을 귀엽게 피우고 도열했던 어린 벚나무들이 지금은 꽃은 다 떨쳐 버리고 보드라운 새순으로 곱게 차려입고 우리들을 환영을 한다. 논개 생가를 지난다. 우중인데도 참배 객들이 눈에 뜨인다. 무령고개로 오르는 차창 밖의 경치가 빗속에 아름답다. 짙은 초록, 연초록이 뒤엉킨 사이사이로 철쭉이 무리 지어 피어 있고, 싸리꽃이 한창이다. 저수지가 고즈넉하고, 비구름이 산허리에 걸려있다. 버스는 무령고개 주차장에 도착한다.


빗속에서 점심 먹는 것을 피하려고, 버스 안에서 점심을 먹었더니, 차를 내리자 우선 담배 생각이 간절하다. 화장실 뒤로 가 담배 한대를 피우고 나오니, 회원들 대부분은 벌써 출발하고, 우중 산행준비가 늦은 몇 사람만 쳐져있다. 11시 36분 등산로 입구에 선다. 오늘 산행은 구간이 짧으니 서둘 필요가 없겠다고 주위를 찬찬히 둘러본다. 금남호남정맥이 분기되는 곳이라 그런지 여기저기 안내판, 이정표가서 있다. 서부지방 환경청에서 세운 백두대간 해설판, 등산로 안내도, 전북 산사랑회에서 세운 이정표, 장수군에서 세운 안내판 등 다양하다.


이 중 서부지방 환경청에서 세운 등산로 안내도가 아담하고, 예쁘다. 예산이 어느 정도 소요되는 지는 몰라도 길 잃기 쉬운 곳에 이런 안내도가 곳곳에 세워지면 백두대간 종주의 일반화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산림청에서 세운 등산로 안내도 - 간결하고 아담하다


대간 길 능선 안부로 오른다. 2주 전 똑같은 길을 걸었지만, 느낌은 사뭇 다르다. 지난번에는 삭막하다고 느꼈었는데, 이번에는 완연히 다른 느낌이다. 2주 사이에 초록빛이 훨씬 많아진 때문이다. 30분쯤 오르니 능선안부에 도착한다. 길가에 전북 산사랑회에서 세운 이정표가 서있다. 고개 이름이 선바위 고개다. 별로 크지도 않은 평범한 바위가 하나 우뚝 서 있는데 그 바위이름이 선바위인 모양이다. 어찌 보면 대단치 않은 바위지만, 이처럼 이름을 주고, 애착을 갖는 마음에 내 고장 사랑이 잘 나타나 있다. 영취산 0.4Km.


영취산(1075.6m) - 흔하지 않는 이름이다. "선바위 고개"와 같은 식의 이름 짓기와는 거리가 먼 이름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름 하나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신령 "영자"에 독수리 "취"자를 쓴다고 한다. 인도의 같은 산 이름을 옮겨온 모양이라고 한다. "신묘하고, 신령스럽다"는 뜻이 있고 "산줄기, 물줄기의 요출지"라는 의미가 있어 명명한듯 하다고 한다.


돌탑이 있고, 서부지방 산림청에서 새운 이정표가 있다. 뒤로 보이는 상수리나무에 잎이 돋아나 봄냄새를 풍긴다. 이 외에도 전북 산사랑회에서 세운 정상 표지, 장수군에서 세운 안내판도 보인다. 지나친 중복이란 느낌이다. 교통정리가 필요하겠다. 장수군에서 세운 안내판에는 육십령 11Km, 7시간이라고 표기돼 있다. 산행에서 선두 경쟁을 벌이는 사람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가 궁금하다. 오늘의 구간 제일봉에 올랐으나 유감스럽게도 빗속에서 사방의 시계는 제로다.

영취산의 돌탑과 이정표


영취산에서 내려가는 가파른 곳은 돌로 계단을 만들어, 능선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산사태가 났던 곳도 새롭게 흙을 돋우어 보수를 한 흔적이 보인다. 백운산이나, 월경산 주위의 방치된 비탈길에 비해 훨씬 정성을 들였다. 대간 길은 환경청에서 예산을 확보하여 이정표 등을 포함 모든 것을 일괄 관리했으면 좋겠다.


영취산을 지나 첫 전망대에 이른다. 바위들이 솟아 있고, 반대편 사면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가 바위 위를 기듯 펼쳐있는 모습이 신기하다. 전망대 바위 사이로 난 대간 길에도 봄기운이 완연하다. 덕운봉을 우회하여 또 하나의 전망대에 서 보아도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비구름뿐이다.

영취산을 지나 첫 번째 전망대 위의 소나무


전망대 위를 지나는 대간 길


977봉으로 산죽밭을 헤치고 나아간다. 산죽이 너무 무성해 전진하기도 어렵다는 말에 판초가 거치적거릴 것을 우려해 이를 포기하고, 방수재킷과 방수가 되는 바지를 착용한다, 재킷은 방수효과가 뛰어났으나, 바지는 산죽에 맺혔던 물방울로 허벅지 쪽이 축축하게 젖어 온다. 그래도 산죽밭이 생각보다는 험하지 않다. 아마도 손질을 한 모양이다. 1시 25분경 977봉에 도착한다. 영취산에서부터 약 1시간 20분이 걸렸다. 빠른 진행이다. 마침 빗줄기가 뜸한 사이에 977봉 전망대에서 후미 팀이 점심 도시락을 푼다. 나는 점심을 버스에서 했음으로 소주 한 잔을 나눠 마시고 먼저 출발한다.

산죽밭 속의 대간종주 부부


호젓한 산길을 혼자 걷는 기분이 그만이다. 싸리꽃이 군데군데 하얗게 피어있다. 얼마 걷지 않아 북바위 방향을 가르치는 화살표지가 땅에 꽂혀 있다.색다른 이정표다. 북바위도 평범하다. 선바위처럼 육산에서 바위가 소중했던 모양이다. 아마도 그럴 듯한 전설이라도 담겨져 있는 바위인지도 모르겠다. 내리막길을 지나니 억새밭이 나오고 억새 사이사이로 철쭉군락이 붉게 펼쳐있다. 아직 봉우리가 터지지 않은 철쭉도 많다. 상수리나무 사이로 난 길이 운무에 가려 아련하게 보인다. 길가에는 파릇파릇 새싹들이 고개를 뽀죽 내 밀고 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지만 바람으로 습기는 많지 않고, 공기가 상쾌하다. 오늘은 선경 속을 걷는구나.... 빗속에서 사진을 찍으며 유유히 걷다보니 식사를 마친 후미 팀이 따라온다.

화사하게 핀 싸리꽃

떨어져 누은 낙엽 사이로 새 순이 돋았다.

잎이 돋아난 상수리 나무숲으로 이어진 대간 길이 운무 속에 잠겼다


민령은 어딘지도 모르고 지나쳤다. 아마 돌무더기가 있던 곳인가 보다. 철탑을 지나면서는 완만한 오름 길이다. 힘이들 정도는 아니다. 깃대봉에 도착한다. 시간은 2시 50분 경이다. 깃대봉 정상표지와 깃대봉 조망안내판이 서 있다. 조망안내판에는 할미봉과 덕유산 줄기가 잡혀있다. 국립공원에서 볼 수 있는 규모의 조망 안내판이다. 하지만 지금 조망은 비구름 뿐이다.

깃대봉에 섰다.


육십령으로 내려가는 길도 뚜렷하여 알바의 위험은 없다. 갈대와, 관목사이로 뿌우연 운무 속을 비옷을 걸친 회원들이 줄지어 내려가는 모양이 마치 전투를 끝내고 귀대하는 병사들 모습 같다. 내리막길을 편하게 걷는다. 오른쪽으로 깃대봉 샘이 있다. 파이프로 샘물이 졸졸 흐른다. 물맛이 좋다.

육십령으로 향하는 회원들


육십령에 도착하니 3시 36분이다. 무령고개를 떠나서 꼭 4시간 만에 도착했다. 시계가 제로라 한눈 팔지 않고 줄 곳 걸었기 때문인가 보다. 육십령에 도착하니 얄궂게도 비가 그치고, 낮게 드리웠던 비구름들이 산을 타고 서서히걷히고 있다.


버스에 오르려니 기사양반이 질겁을 하며 막는다. 신발을 닦고 오란다. 신발을 내려다보니 새삼 무신경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화장실로 가 신발의 흙을 말끔히 닦고, 차에 올라 배낭을 자리에 둔 후, 서둘러 육십령 휴게소로 향한다.


식당에서는 하산주 파티가 한창이다. 막걸리 한잔을 마시고, 조정자 할머니를 찾았다. 조 할머니는 1941년 생이지만 건강하고,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인다. 음식 솜씨와 넉넉한 인심으로 대간 꾼들 사이에는 유명인사가 된 할머니다. 인사를 하고 장사가 어떻냐고 물었더니 오는 일요일에도 80명분 예약을 받았다고 환하게 웃는다. 어느 분 산행기를 보니까, 민박하려고 숙박비를 물은 모양이다. 할머니 말씀이 "숙박비는 무슨, 주는 대로 받지." 하더란다. 우리 조상들은 과객을 소홀히 대접하지 않는 전통이 있다. 아마도 산행기를 쓰신 분은 할머니 대답을 이런 전통의 흐름으로 이해하고 흐믓했던 모양이다.

1941년 생인 조정자 할머니는 대간꾼들 사이에서 인기가 "짱"이다.


버스는 4시 10분경 서울로 출발한다. 날씨가 개이면서 차창으로 보이는 풍광이 그만이다. 비가 개이자 신록이 더욱 돋보인다. 우리의 산들은 크지도 작지도 않고 아담하다. 개울도 그렇고 강도 알맞은 크기다. 늦은 봄, 초여름에 신록을 등지고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마을을 이룬 모습이 지나 간다. 이 시기의 우리의 산하는 그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한 멋이 세계에 제일이라 해도 지나치니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이 아름다움 속에서 살 수 있다는 것에 새삼 감사하는 마음이 된다.

달리는 버스 차창을 통해 본 아름다운 우리 산하.


버스는 7시 15분경 동서울 톨게이트를 통과한다.



(2004. 4. 28)







Posted by Urim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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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본 백운산 정상


백두대간 종주를 마친 분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대간 종주는 길고 힘든 자기와의 싸움이다”


“대간 종주를 마치고 나니, 「나라사랑」, 「국토보전」의 중요성이 피부로 느껴진다.”

 

요즈음은 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 형태로 대간 종주를 시도하고 있지만 그래도 완주는 쉽지가 않은 모양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나라사랑」, 「국토보전」의 중요성이 피부로 느껴진다는 표현이다.

 

“나라를 사랑하자.”


“소중한 우리의 국토를 잘 보전하고 관리하여 후손들에게 넘겨주자.”

 

우리는 이런 취지의 교육을 유치원, 아니 그 이전부터 받아 왔다. 문제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념적으로 배운 지식은 실천으로 옮겨지기가 쉽지 않다. 백두대간 종주를 하면서 몸으로 직접 체험한 느낌은 바로 산 지식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행위, 국토를 소중히 하는 행위로 직결될 수 있을 것이다.

 

한비야 여사에게는 장난 끼도 있어 보인다. 해남 땅끝에서 민통선까지의 보도여행을 800-49-10-225-150과 같이 숫자로 요약하고 있다. 약 800Km의 거리를 49일간, 10Kg의 배낭을 메고, 225미리 등산화를 신고 걸었다. 총 비용이 약 150만원 이였다는 내용이다.

 

백두대간 종주는 엄두가 나지 않았으나 한비야 여사처럼 국토를 종단하는 도보여행은 가능할 듯 싶었다. 시작해서 단번에 마치는 것은 무리일지 몰라도 일주일 걷고, 일주일 쉰 후에 다시 일주일 걷는 식이면 어려울 것도 없으리라. 집사람에게 넌지시 의논을 해봤다.

 

“잘 해 보시구려. 누가 말리나? 집에는 달랑 두 늙은이와 강아지 한 마리뿐인데, 할망구 혼자 두고 격주로 집을 비울 정도로 간덩이가 크지 못하니 체념하는 도리밖에 없겠다. 요즈음은 불경기라 그런지 주택가에 좀도둑들이 유난히 극성이다. 지난 1월말에도 친구들과 남도여행을 하느라 집을 비운 사이, 낮손님이 찾아 와 집사람이 혼이 나간 적이 있다. 아이들이 공부 마치고 돌아 올 때까지는 도보여행의 꿈은 접어 둘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언제고 반드시 할거다.

 

이런 상황에서 당일치기 백두대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은 행운이다. 4월 13일은 다섯 번째 산행일이다. 오늘의 구간은 『송리마을⇒광대치⇒월경산⇒중재⇒백운산⇒영취산⇒무령고개』다. 제8소구간이라고 알려진 구간에 송리마을에서 중재까지의 거리를 더 걸어야 한다. 총 거리가 약 20Km, 8시간이상 소요될 구간이다. 게다가 중재와 백운산 정상의 고도 차가 500m 정도에 이르니 당일 산행으로서는 힘든 코스라 하겠다. 산우회에서도 산행시간을 줄여보려고 궁리 끝에 택한 방안이 역방향 산행이다. 무령고개에서 출발하여 송리마을로 하산하기로 한 것이다.

 

오늘 산행에 참여한 인원은 산우회 회장 및 등반대장을 포함하여 총 36인이다. 40대, 50대가 주류를 이루고 여자 분들도 8명이나 된다. 60대도 섞여있지만 주중이라서 그런지 젊은이들은 없다. 아쉽다. 여름방학,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젊은 학생들이 대간 종주를 즐길 수 있게 구간을 재정비하고 필요한 곳에 야영장도 만든다. 길을 잃지 않도록 표지판을 정비하고 위험지역에는 안전시설을 보완하면 어떨까? 백 마디 설교보다 스스로 대간 종주에 참여해 보고, 「나라사랑」, 「국토보존」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도록 대간 코스를 정비하여 산 교육장으로 활용해 보면 어떨까?

 

버스는 장수 인터체인지를 벗어나 지방도로로 접어든다. 도로 양쪽으로 어린 벚나무들이 꽃을 활짝 피우고 도열해 서 있다. 논개 생가가 왼쪽으로 보인다. 무령고개를 향해 버스는 힘들게 굽이굽이 산길을 타고 오른다. 11시 30분경 버스는 무령고개 주차장에 도착하고 회원들이 서둘러 하차한다.

 

무무령고개의 쉼터 - 싸리로 지붕을 엮어 이채롭다.

 

3월부터 5월말까지는 산불방지를 위해 입산을 통제한다고 한다. 산우회 회장이 관리소에서 입산허가를 받느라 애를 먹는다. 영취산으로 바로 오르는 산행로를 피해 조금 더 올라가 백운산 능선의 안부로 연결되는 등산로를 택하기로 하고 겨우 허가를 받는다. 이 등산로 길 건너편은 금남호남 정맥의 장안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초입이지만 이 곳도 역시 입산금지 팻말이 걸려 있다. 11시 40분 회원들은 능선 안부를 향해 산죽과 싸리나무를 헤치며 가파른 언덕길을 오른다.

 

 

대간능선의 안부를 향해 비탈길을 오른다.- 온통 싸리와 산죽이다.

안부에 오르니 북쪽으로 영취산이 바로 코앞이다. 영취산은 다음 구간에 오르기로 하고, 남으로 방향을 잡아 백운산으로 향한다. 산죽과 싸리나무 사이로 난 등산로는 가뭄으로 메말라, 산에 들어서면 느낄 수 있는 싱그러움도 없다. 한낮의 햇볕을 가려주는 그늘도 없다. 싸리밭과 참나무들이 늘어선 완만한 오름세를 조금 오르다 보니 전망이 확 트인다. 아마도 1066m지점인 모양이다. 정면에 백운산으로 오르는 능선이 한눈에 들어 온다. 봉우리 3개도 모두 보인다. 제일 뒤 가장 높은 곳이 백운산이다. 오른쪽으로는 장안산으로 이어지는 정맥이 웅장하게 흐른다.

 

북쪽에서 본 백운산 능선 - 맨 뒤로 백운산이 보인다.

싸리나무군락을 지나니 산죽이 점점 더 많아진다. 키도 훨씬 커져 등산로가 산죽 터널을 지나는 곳도 있다. 완만한 오름세를 계속 오르니 오랜 비바람에 시달려 많이 풍화된 바위들을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백운산 정상(1,278m)에 이른다. 시간은 1시 14분이다.


백운산 정상

 

정상에는 중위 구룹에 속하는 회원들이 거의 점심을 마치고 하산 채비를 하고 있다. 우선 회원들의 사진을 찍어 주고. 북쪽으로 보이는 영취산, 그 뒤로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덕유산 줄기를 사진기에 담는다. 아쉽게도 지리산 능선은 보이질 않는다. 점심은 버스에서 해결했음으로 과일과 음료수를 나눠 마시는데, 회장님이 후미 일행과 함께 도착한다. 회장님은 우선 담배부터 찾는다. 입산허가를 받을 때 담배와 라이터를 영치당해 담배가 무척 고팠던 모양이다. 라이터만 빼앗으면 되었지 왜 담배까지 두고 가라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댄다. 하산 채비를 마친 중위 그룹이 서둘러 출발한다. 이번 산행이 17번째 대간 종주라는 회장님으로부터 주변의 산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지리산 능선은 보이지 않지만 지난번에 지나온 복성이재, 그리고 앞으로 가게 될 빼재의 위치를 알려준다. 후미 일행이 점심을 마치기를 기다리지도 못하고 1시 40분경에 먼저 일어선다. 정상에서 너무 오래 지체한 느낌이다.


날씨가 청명치 않아 덕유산 능선이 멀리 흐릿하게 보인다
.

 

눈앞의 헬리포트를 가로질러, 비탈길을 내려서니 왼쪽으로 무덤이 하나 누워있고 오른쪽에는 함양군에서 세운 이정표가 서 있다. 1,270m가 넘는 이 높은 곳에 묘를 쓰다니, 무언가 깊은 사연이 있는 모양이다. 이정표는 오른쪽 방향으로 백두대간(중재), 왼쪽으로는 하산길(4.2.Km), 그리고 정면으로 백운산 정상(0.1Km)을 가르치고 있다. 웬일인지 중재까지의 거리는 표기돼 있지 않다.


백운산 정상의 헬리포트

 

하산 길은 무척 가파르다. 가파른 길에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오가다 보니 너덜지대는 아닌데도 흙이 그대로 노출되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흙먼지가 풀풀 인다. 한참을 내려오니 암봉이 앞을 막아서고, 등산로는 암봉 오른쪽으로 우회한다. 우회로를 돌아 내려오면서 뒤를 돌아본다. 왼쪽으로 백운산 능선이 올려 보인다. 참나무인지 싸리나무인지 알 수는 없으나 잎이 없는 나무들이 능선을 따라 마치 열병식을 하듯 늘어서 있다. 무척 인상적인 모습이다. 뿌리를 땅에 박고, 하늘을 향해 용립한 나무들의 자세는 바로 우리들 인간들의 자세를 닮아 더욱 아름다운지 모르겠다. 카메라를 꺼내 이 모습을 담는다.


능선을 따라 용립한 나무들이 열병식을 하고 있다.

 

경사가 점차 완만해 지면서 진달래군락이 나타난다. 대부분 아직 꽃망울이 터지지 않았지만 군데군데 일찍 깨인 놈들은 진분홍 꽃잎을 활짝 피우고 제 모양새를 뽐낸다. 황량하던 주위가 일시에 달라 보인다. 진달래에 이끌려 걸음이 늦어졌는지 중위 구릅과 함께 먼저 하산했던 여자회원 두 분이 저 앞에 보인다. 진달래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으며 세 사람이 산책하듯 유유하게 걷는다. 오른쪽 길섶에 또 무덤이 하나 누워 있다. 오랫동안 돌본 사람이 없었는지 봉분이 많이 가라앉았다. 그 앞으로 하얀 야생화 한 무더기가 아름답게 피어 있다. “무슨 꽃이지?

 

 

드문 드문 피어 있는 진달래가 황량한 분위기를 바꿔 놓는다.

 

적당한 자리를 골라 낙엽 위에 자리를 잡고 차를 마신다. 과일도 먹으면서 후미가 올 때까지 늑장을 피운다. 20여분을 기다려도 후미가 나타나지 않자 의리 없단 소리를 들어도 더 기다릴 수가 없어 다시 출발한다. 이윽고 중재에 도착한다. 3시 10분경이다.

중재에서 사진을 찍으며 또 꾸물거리는데, 회장님이 혼자서 비탈길을 내려온다. 후미로 쳐졌던 2사람을 중고개재에서 탈출시키고 오는 길이라고 한다. 30대로 보이는 젊은 사람들이었는데, 한사람이 몸살 끼가 있어 도저히 산행을 계속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중재의 느티나무 - 대간길의 이정표다

월경산으로 오르는 길이 가파르다. 중재에서 월경산까지는 도상거리 약 2Km, 고도 차이가 약 230m에 달하니 결코 만만히 볼 게 못된다. 이 구역은 역주행하는 것이 더 힘들다. 급경사 길을 힘들여 오르니 앞에 오르막 너덜지대가 펼쳐지고 밧줄이 늘어져 있다. 바위가 무너져 내린 너덜지대가 아니고, 토사가 뭉그러져 내린 사면이다. 이런 사면은 나무계단이라도 설치하여 산 사면을 보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름길에 약하다 보니 제일 후미로 쳐져 힘들게 한발 한발 전진한다. 정상에서 회장님이 기다리고 있다. 선 채로 한숨 돌리는데 회장님이 산행요령을 일깨워 준다.

 

“앞으로는 후미 팀을 기다리며 한 곳에서 오래 쉬지 마라.”


“사진은 잠깐 잠깐 숨을 돌리는 시간을 이용해 찍어라.”

 

평지와 내리막에서는 제 속도를 낼 수 있어 광대치에 이르기 전에 앞선 여자회원들을 따라 잡는다. 광대치에서부터는 다시 오르막이 계속되고 또 뒤쳐지기 시작한다. 모든 운동이 다 그렇지만 운동에서 호흡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특히 산에서 오름세를 탈 때는 발로 걷는 것이 아니라 호흡으로 걷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월경산을 오르면서 힘을 소진했는지 944m봉의 가파른 길을 오르려니 호흡도 가쁘고 다리 힘도 많이 빠진 것 같다. 잠시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계속 전진하여 944m봉에 오른다. 순간 황금색 갈대밭이 눈앞에 펼쳐진다. 지는 햇살 속에 갈대밭이 아름답다.


무명봉으로 오르는 길은 아름다운 갈대밭이다
.

 

거의 평지와 같은 길을 속도를 내어 걷는다. 무명봉 정상 부근에서 다시 사진 몇 장을 찍고, 서둘러 내 달려 송리마을로 내려가는 안부에서 겨우 일행을 따라 잡는다.


걸어온 길을 뒤 돌아 본다. 많이도 왔다. - 노을 속에서 백운산이 푸르게 보인다.



나뭇가지 사이로 해가 저문다.- 갈 길은 아직도 멀다.

 

회장님이 안부에서 이미 하산한 등반대장의 전화를 받는다. 하산한 회원들은 소주를 구해 하산주를 즐길 터이니 후미팀은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하산해도 좋다는 연락이다. 회장님도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안부 갈대밭에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며 한숨 돌린다. 서편 하늘에는 지는 해가 운무에 가려 마치 달처럼 떠 있다. 회장님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 걸 본다고 감탄한다.


운무 속으로 지는 해가 마치 달처럼 떠 있다.

 

천천히 내려와도 좋다고 하지만, 후미팀은 구르듯 송리마을로 달려 내려간다. 버스에 도착하니 7시 30분이다. 장장 7시간 50분간의 산행이였다. 버스는 7시 40분 서울을 향해 출발한다.

 

멀리서 참여한 회원들이 있어 지하철이 끊기기 전에 서울에 도착하여야 한다고 인삼마을 휴계소에서 10분간만 정차키로 한다. 이 시간에 볼일도 보고, 배고픈 사람들은 먹거리를 사 들고 와 버스 안에서 저녁식사를 해 달라고 등반대장이 협조를 구한다. 웅성웅성 불평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등산대장은 강하게 밀어 부친다. 10시 56분 버스는 동서울 톨게이트를 통과한다. 후미팀이 늑장을 부려 귀가 시간에 불편을 끼쳐 무척 미안하다. 다음부터는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다짐한다.

 

집에 도착하니 11시 50분이다. 새벽 5시 30분에 기상, 새벽밥을 먹고, 집사람이 싸준 도시락을 챙겨, 집을 나선 시간이 6시 30분이였으니, 17시간 20분만에 귀가한 셈이다. 만보계를 보니 37,124보로 기록돼 있다. 긴 하루였다.

 

 

(2004.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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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04/24/2010 08:56 am comment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담아갑니다 우림님 감사합니다

Posted by Urim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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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딸”로 알려진 한비야 여사는 58년 생이다. 그러니 한 여사도 40대 중반을 넘어, 50에 가까워지고 있다. 1993년 7월부터 1998년 6월까지 만 6년 동안, 지구를 세 바퀴 반을 돌아, 65개국을 걸어서 여행을 했던 한 여사는 지금은 NGO인 월드 비젼에서 난민구제에 헌신하고 있다.

 

한비야 여사는 15세 때 부친을 잃는다, 어려운 환경에서, 장학생으로 홍익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국제홍보학 석사과정을 마친다. 귀국하여 국제홍보회사인 버슨-마스텔라에서 3년 간 근무하며 여비를 모은 후, 미련 없이 모든 것을 털어 버리고, 어렸을 때부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여행을 떠난다. 보통사람들은 할 수 없는 결단이다. 그래서 “바람의 딸”이라는 별명도 얻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한평생을 거침없이 살아가는 흔치않은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부럽다.

 

세계일주를 마친 한여사는 1999년 3월 2일, 우리나라 국토종단 길에 나선다. 전남 해남 땅끝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약 800Km의 여정이다. 4월 20일 오색에서 대청을 오르고, 중청대피소에서 일박 후, 소청으로 가는 길에 공룡능선을 바라보며 한여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래서 공룡능선을 타다보면 백두대간 종주 중이라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된다. 목적지를 목전에 둔 사람들이어서인지 피곤한 얼굴이지만 아주 밝고 맑다. 그들을 보면 정말 부럽다. 나도 언젠가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싶다. 아니 꼭 할 거다.』 한비야여사가 이렇게 쓰고 있으니 언제, 어떤 방식으로 할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할 거라고 생각한다. 50 전후의 여사라 단독, 논 스톱 종주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하지만, 누가 알랴? 힘은 집중하는데서 나오는 것이고, 한여사 정도의 집중력이라면 예상을 넘어, 과감하게 논 스톱, 단독종주에 도전해 볼지도 모를 일이다.


당일 산행 백두대간 종주는, 3월 23일, 4번째 산행을 한다. 구간은 『사치재⇒사리봉⇒복성이재⇒다리재⇒봉화산⇒송리』, 도상거리 14Km에 서비스 거리 2Km, 총 16Km에 이른다. 소요시간은 6시간이 기준이다.


이 구간의 대간 길은 전라북도 장수군의 아영면과 변암면을 동서로 나누며 느슨한 S자모양을 하고 북동쪽으로 달린다. 사치재, 새맥이재, 복성이재, 치재, 꼬부랑재, 다리재등 유난히 재가 많다. 여기저기 산불로 송림이 훼손되고, 그 자리에는 갈대와 옮겨 심은 철쭉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백제와 신라의 싸움터 이었던 아막산성이 허물어진 모습으로 남아 있고, 치재에 서면 흥부마을로 유명한 아영리 성리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유사시 봉화를 올렸던 봉화대는 봉화산에서 동북쪽으로 1Km쯤 떨어진 이름 없는 봉우리에 있다고 한다. 봉화산은 7년 전의 산불로 나무들은 전부 소실되고, 지금은 무성한 갈대가 산봉우리를 온통 덮고 있다. 봉화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지리산 능선이 희미하게 보인다.


들머리인 사치재(500m)와 봉화산 정상(919.8m)간의 고도차가 제법 있고, 중간에 아실재, 새맥이재, 복성이재등 500m 대의 고개(재)에서 700m대의 봉우리 3개를 넘어야 치재에 이른다.게다가 치재에서 봉화산으로 오르는 약 4Km의 길은 키 큰 철쭉 군락군과 갈대 숲이라 등 뒤로 내려 쪼이는 햇빛을 막아주는 그늘도 없다. 만만한 코스는 아니다. 출발 전 산우회에서 식수를 충분히 준비하고, 천천히 걸으라고 주의를 주던 이유를 알겠다.


〈 봉화산 정상에 오르다 뒤돌아 본다 - 걸어 온 길〉


사치재를 출발한 후 약5시간이 지났다. 오늘 지나온 길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으로 88올림픽 도로가 보이고, 가운데 뾰족한 봉우리가 시리봉, 잘룩이를 지나 평평하게 이어진 끝 부분이 781m봉, 그리고 바로 앞 치재까지 S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능선 오른쪽이 변암면, 왼쪽이 아영면이다. 봉화산은 등 뒤에 있다.


날씨가 따듯해지자, 버스 안에서 눈치보며 점심을 먹어야 할 이유가 하나 줄었다. 버스 안의 식사가 일석이조가 아닐 바에야 산에서 점심을 먹기로 방침을 바꾸고, 복성이재에서 후미 팀 점심에 뒤늦게 끼어 들었다. 하지만 너무 식사를 서두르고, 식사 후 바로 출발한 것이 탈이 됐다. 치재로 향하는 첫 번째 오르막길에 몸에 이상이 느껴진다. 가슴이 답답하고, 진땀이 난다. 배에 힘이 하나도 없고, 두 발은 천근이다. 급히 먹은 점심이 위에 큰 부담이 된 모양이다. 젊었을 때야 별일 아니었겠지만, 나이가 든 몸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이 무리인 모양이다. 운동 에너지와 소화를 시키기 위한 에너지가 동시에 필요한데, 호흡을 통한 산소 공급량은 한정이 되다보니, 두 가지가 모두 신통찮다. 두 발은 납덩이처럼 무겁고, 소화도 되지 않아, 진땀만 솟는다.


<후미 팀마저 이미 정상에 섰다. - 몸에 탈이나 후미 팀에 10여분이나 쳐졌다>


후미 팀에서도 쳐져 두 걸음 걷고, 한 걸음 쉰다. 오늘 산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마저 든다. 산에 와서 이렇게 애를 먹어 본 적도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힘들어하는걸 눈치챈 회장님이 천천히 오라면서 앞서 나간다. 세련된 매너이고, 고마운 배려다. 천신만고 끝에 봉화산 정상에 오르니 이 때쯤에는 소화도 어느 정도 된 듯 몸상태가 많이 좋아진다.


〈 봉화산 정상에서 본 대간 길 - 갈대밭에 철쭉 군락과 어린 소나무가 보인다 >


봉화산 정상에서 한숨 돌리고 하산 직전에 찍은 사진이다. 7년 전의 산불로 봉화산 봉우리는 온통 갈대밭이다. 군데군데 철쭉이 무더기를 이루고, 어린 소나무들이 성글게 박혀 있다. 관광지를 만들기 위한 방화였다는 설도 있지만, 확인된 바는 없고, 어찌됐건 이제 봉화산은 철쭉제로 꽤나 알려진 명소가 됐다.


송리마을로 내려가는 길 찾기가 꽤 까다롭다. 하산 길의 임도가 보이고, 마을도 멀리 보이지만, 임도와 등산로의 구분이 애매하여, 갈대와 철쭉 사이에서 헤맬 가능성이 크다. 낮에야 별일 아니지만 어두울 때는 꽤 황당할 수도 있겠다. 요즈음은 백두대간 종주를 마친 선배님들의 종주기를 쉽게 찾아 볼 수 있어, 산행 전에 산행코스가 대강 머릿속에 입력이 되지만, 서둘러 하산하다보니 이 지점에서 정규 등산로를 벗어나, 길 없는 사면에서, 갈대를 헤집고 한참을 헤메다, 가까운 임도로 내려섰다.


〈봉화산 정상에서 본 지리산 능선〉

별 사진이 안되리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멀리 희미하게 누워 있는 지리산 연봉을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를 못하고 또 샤터를 누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4번째 소구간 산행이다. 꽤나 멀리 온 느낌이다.

 

 

〈사리봉을 지나면서 멀리 바라 본 봉화산이다. 〉


멀리보이는 봉화산은 온통 누렇다. 등산로는 치재에서 왼쪽으로 앞의 누런 봉우리를 지나 오른쪽 정상으로 이어 진다. 앞으로 봉화산은 봄에는 철쭉으로, 가을이면 억새로 유명해질 듯 싶다. 복성이재에서 정상까지는 2시간이면 충분하고, 복성이재는 포장도로가 나 있다.

 

 

〈치재에서 내려다 본 아영면 성리마을〉


흥부전은 픽션으로 알았는데, 성리마을이 흥부마을이라는데 놀랐다. 판소리에 나오는 화초장 바윗거리, 흰죽배미, 노리다리등의 지명이 실제로 있다고 하니 신기롭기까지하다. 4-5월 봉화산의 철쭉제를 즈음하여 많은 관광객이 모여든다고 한다.

 

 

<허물어진 아막성터와 돌탑>


1,400여년 전 백제와 신라의 격전지. 서기 602년 백제 무왕은 신라가 점유하고 있던 아막산성을 공격한다. 이 전투에서 백제는 총 군세의 2/3인 4만 명을 잃는 막대한 손실을 입으나성을 뺏지는 못한다. 백제는 무왕의 장남인 의자왕 때 결국 나라가 망한다. 성은 허물어지고 빈터인데, 대간 길은 오른쪽 성벽으로 나 있다. 누군가 허물어진 돌을 쌓아 돌탑을 만들어 원혼을 위로한다.

 

<781m봉을 오르는 회원들이 억새 사이로 보인다.>


781m봉에서도 산불이 났던 모양이다. 불에 타서 억새밭으로 변한 곳과 소나무가 남아 있는 곳이 확연히 구분된다. 781m봉 위에서니 사방이 확 트였다. 앞으로는 봉화산으로 가는 길이 뚜렷하고, 왼쪽으로는 산과 골짜기가, 오른쪽으로는 아영면의 마을들이 평화롭게 누워있다.


<선두는 벌써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 697m으로 향하고 있다〉


697m봉 주변은 94년, 95년 겨울 연 다른 산불로 억새만 무성하고, 키작은 소나무들이 드믄드믄 보인다. 전형적인 육산인 이 구간에는 암릉도 없다. 산불이 나지 않은 곳은 울창한 송림이 복성이재까지 이어지지만 중간중간 산불이 났던 곳은 억새 밭이고 철쭉 군락지이다. 관광지로 만들기 위한 방화라는 설도 있으나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다.


〈후미가 송리마을로 들어선다〉


여자회원 한 분이 다리에 이상이 생긴 모양이다. 앞으로 걷기가 힘들어 동료의 부축을 받으며 뒷걸음으로 송리마을로 들어선다. 힘은 들어도 얼굴은 웃는다. 버스가 보이는 곳에서 등반대장이 마주 달려와 회원의 배낭을 대신 들어준다. 아마도 선두팀은 하산해서 한시간 이상을 버스에서 기다렸을 터인데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는 사람이 없다.


버스에 도착하니 6시 10분이다. 약 6시간 30분을 걸은 셈이다. 막걸리 한잔을 마시고 자리에 앉으니 한결 살 것 같다. 버스는 6시 20분 서울을 향해 출발한다. 지난번 만복대 구간보다 약 20분이 늦은 셈이다.


집에 도착하니 11시쯤 됐다. 얼굴이 창백하고, 목소리가가라앉은 것을 보고 집사람이 속이 많이 상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힘들면 나이를 생각해서라도 그만 두라고 퉁명스럽게 핀잔을 주더니, 저녁은 어떻했냐는 소리도 없이, 휭하니 혼자 침실로 사라진다.

 

 

(2004.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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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Urim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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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남산 정상

 

해뜨는 시간이 많이 빨라졌다. 2주전 7시에 산악회 버스를 탈 때에는 사방이 어두웠었는
데 오늘은 주위가 한결 밝아 보인다. 아침이지만 밖의 기온이 영상이라 버스안과 기온 차가 크지 않은 모양이다. 차창에 물방울 맺힘도 훨씬 적어져 밖을 내다보기도 수월해 졌다.


버스가 동서울 톨게이트를 지나자 차창으로 보이는 색은 오직 한가지 뿐이다. 안개가 짙어 희뿌옇고, 안개가 걷힌 곳은 눈으로 하얗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안개는 차차 걷히고 창밖으로는 더 많은 눈이 쌓여 있는 게 보인다. 눈이 쌓여있는 것을 바라보니 고속도로에서 15시간, 혹은 20시간씩 갇혀 고생한 사람들의 모습이 눈 속에서 보이는 것 같다. 꼬박꼬박 세금 내고, 고속도로를 이용할 때는 빠짐없이 통행료도 지불했건만, 왜 이들이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나?

 

전기, 수도, 가스, 도로, 철도, 통신은 우리들이 매일 살아가면서 받아야 할 필요 불가결의 서비스이다. 하지만 이들이 기간산업이란 이유로 이들 산업은 국가가 직접 운영 한다. 국영사업이 문제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문제는 누가 운영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다. 누가 하던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눈 속에서 그렇게 고생시킬 리가 없고, 참혹하게 불타서 죽게 할 리가 없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가? 국영기업체들의 인사관행, 이들의 운영체제를 살펴보면, 이들이 국민들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마음가짐에 투철할 수 없음을 쉽게 알 수 있고, 그래서 우리국민들이 이렇게 3등국가의 3류서비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서글퍼진다


눈 속에서 고생한 사람들에게 통행료를 환불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갇혀있던 시간, 이들이 헛되이 소비한 기름, 이들이 받은 고통에 대한 손해를 배상하겠다는 이야기는 아직 듣지를 못했다. 또 고통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국가를 상대로 손해를 배상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천재지변이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같은 지역의 민자 고속도로에서는 이러한 불상사가 없이 위기에 대처한 것을 보면 천재지변이라고 강변하기도 어렵다. 서비스 정신이 결여됐고, 잘못했을 때 책임을 져야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못한 상황에서 불합리한 것에 항거하고,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겠다는 시민정신 마저 실종돼서는 변화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에 아침부터 우울해 진다.


버스가 대전을 지나고 나서부터 창밖의 모습이 달라진다. 눈은 점차 눈에 뜨이지 않고, 겨울에서 벗어나는 보랏빛 산야가 눈에 들어온다. 우울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앞으로 할 산행에 집중하려 애써본다. 산에 가는 사람들이 산에 가는 이유는 다양하고, 가지각색이겠지만, 산길을 꾸벅꾸벅 힘들여 걷는 동안은 잡념이 사라지고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되는 느낌이 좋아 산을 찾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머리를 비우자, 오늘할 산행만 생각하자.


3월 9일. 가고파 산우회에서 행하는 제8회 당일 백두대간종주 3번째 산행이다. 코스는 『여원재⇒고남산⇒통안재⇒유치재⇒매요리⇒아실재⇒지리산 휴게소』로 백두대간 제5소구간, 약 14Km의 거리다. 버스가 11시 45분경 여원재에 도착하자 회장님은 알바하기 쉬운 구간에 대한 주의를 주고, 산행시간은 선두 5시간, 후미 6시간을 주겠다 한다.


여원재(女院峙) - 영남과 호남을 연결해 주는 여원재(약 480m)는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 이 고개를 넘을 때 백발의 여인이 나타나 승리를 예언하고, 싸움에 이긴 이성계가 이 고개 이름을 여원재로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또한 전라도 고부에서 거병한 동학군이 전라도, 충청도 일대를 장악하고, 경상도 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다 여원재에서 관군에 패퇴한 전적지이기도 하다. 지금은 24번 국도가 여원재를 시원하게 관통하고 있다.


24번 국도에서 여원재 이정표가 가르치는 언덕을 오르니 전형적인 야산 길이 잡목 사이로 이어진다. 밭두덕을 지나고, 임도를 건넌다. 불이 나서 갈대와 키작은 진달래만 보이는 곳도 여기저기 눈에 뜨인다. 묘지들도 많이 보인다. 완만한 오름 길이 오른쪽으로 굽어지면서 이제까지와는 달리 울창한 소나무 숲사이로 백두대간 길이 이어진다.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울창하고, 쌓인 솔잎으로 등산로는 푹신한 카펫길이다. 경사도 심하지 않아 삼림욕 하는 기분으로 걷는다.

오르면서 본 고남산 정상 - 선두팀은 정상에 섰다.

이윽고 소나무 숲이 사라지고 억새가 우거진 오름세 길이 이어지더니, 경사가 급해지며, 암릉으로 연결된다. 암릉에는 줄이 매어져 있지만 녹다만 눈이 쌓여있는 바윗길은 미끄럽다. 암릉을 지나니 바로 고남산 정상(846m)이다. 전망이 시원하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니 것이 눈 덮인 바래봉이다. 하지만 옅은 안개에 가려 지리산의 주능선은 보이지 않고. 바로 눈 아래로 황산과 황산벌이 희미하게 누워 있다.

옅은 안개속에 뢍산과 황산벌이 흐릿하게 누워있다. 뒤가 바래봉이다


고려 말 우왕 6년(1380년) 7월 최무선은 금강구에 정박한 왜선 500여척을 새로 발명한 폭약으로 폭파한다. 퇴로가 끊긴 왜구는 영동을 거쳐 상주, 경산, 함양등 경상도 내지를 유린하고, 9월 운봉에 집결, 그 규모가 200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개경으로 쳐 오르겠다고 위협하고, 놀란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토벌사로 파견한다. 여원재를 넘은 이성계는 고남산 기슭에 진을 치고 왜구와 대치한다. 황산벌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적장 "아지발도"는 이성계가 쏜 화살을 맞아 죽고, 밤늦게 까지 왜구 섬멸은 계속된다. 이 때 어둠을 밝히려 달을 끌어 들였다 해서 마을 이름이 인월리가 됐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이 싸움 이후 고남산을 "태조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이런 전적지를 내려다보면서, 고남산 정상 헬리콥터 장에서 후미 팀이 점심을 먹는다. 이제부터는 내리막 길, 힘든 곳은 지났다는 여유로움일까, 아니면 회장님이 함께 있어서 일까, 후미에 쳐졌지만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느긋하게 점심을 즐긴다.

하산하면서 뒤 돌아본 고남산 정상.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은 경사가 급하고 얼었던 눈이 녹아 몹시 미끄럽다. 몇몇이 엉덩방아를 찧는다. 군사도로에 내려서서 우측으로 오르다가, 도로 꼭대기에 즈음하여, 왼쪽 숲으로 난 등산로를 찾기가 쉽지 않다. 리본이 몇 가닥 걸려 있지만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길이다. 등산로는 다시 송림으로 이어진다. 또 다시 삼림욕을 즐긴다. 여자회원들은 하늘에 오르는 기분이라고 무척 즐거워한다.

울창한 송림사이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매요리에 도착했다. 본래 대간 등산로는 마을 왼쪽 산등성이로 나 있으나, 매요리 사람들이 등산객을 마을로 유치하기 위하여, 이 길을 막아 버렸다고 한다. 등산객들이 거칠게 항의도 해 봤으나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마을을 관통하는 길이 대간 길이 돼 버렸다. 마을은 조용하고, 인적도 드믈어 다리가 불편한 할아버님 한 분이 힘겹게 지나치실 뿐이다. 대간 길의 이정표가 되는 언덕 위의 교회, 바로 그 아래에 허름한 매점이 있고, 할머니가 평상에 막걸리를 내 놓고 우리들을 부른다.

 

막걸리를 한병 따서, 남자들 잔은 7부정도, 여자들 잔은 1/3정도 부어 공평하게 여섯 잔을 만들자 할머니는 2병을 딴게 아니냐고 의심스럽게 물으신다. 산꾼들이 막걸리 병을 속였을 리도 없었을 터인데, 나이가 드시니 의심이 많아지는 모양이다. 우리들 후미 팀은 호기롭게 막걸리 잔을 부딪치며 부리보를 외친다. 옆에 놓인 묵은 김치가 안주다. 재빨리 술값을 계산하던 여자 회원이 잔돈을 받으면서 눈을 찡긋 하며 웃는다. 아마 김치 안주 값도 제하고 거스름돈을 받은 모양이다.

백두대간길이 지방도로로 이어진다.


도로를 따라 걷는 회원들의 모습이 한가롭다. 서부 영화에 나올 법하게 생긴 봉우리 하나가 앞에 누워 그림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대간 길은 왼쪽으로 다시 숲길로 이어지고, 얼마지나지 않아 밭으로 떨어지더니, 다시 도로로 내려선다. 이 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가자, 왼쪽으로 유치삼거리 이정표가 등산로를 다시 숲으로 유도한다. 매요마을을 떠나 여기까지 오는 길이 알바를 하기 쉬운 길이다. 하지만 도로를 타고 걸으면서 항상 왼쪽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리본이 걸려 있는 곳을 살핀다면 크게 헤메지는 않을 길이다.

 

산길로 들어서니 다시 소나무 숲이다. 오른쪽으로 바래봉이 가깝게 보인다. 날이 맑으면 지리산 주능선이 보일 터인데 아깝다. 다시 삼림욕을 한다. 오른쪽으로 88올림픽 고속도로가 가까이 보이고, 진달래가 군락을 이룬 바윗길을 지나니 바로 사치재 이정표가 서 있다. 회장님은 이 사치재 이정표는 잘못 표기된 것으로 "이실재"가 옳은 표시라고 알려준다.

88올림픽 고속도로가 백두대간길 허리를 자르고 뻗어있다.


88올림픽 고속도로로 내려섰다. 이 고속도로가 사치재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길을 끊고 달린다. 따라서 무박일 때에는 어둠속에서 산꾼들이 과감히 이 고속도로를 가로 건너는 모양이지만, 낮에는벌금이 무서워,사치재쪽에 놓인 고가도로를 타고 건넌다고 한다. 우리는 사치재와는 반대쪽에 있는 지리산 휴게소를 향해 터덜터덜 내려온다. 오늘 산행의 종점이다. 휴게소에 도착한 시각은 5시 5분 경이다. 5시간 20분을 걸은 산행이다. 송림길이 좋았고, 날씨가 쾌청하지 않아 지리산 능선을 보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5시 15분 버스는 서울을 향해 출발한다.

 

 

(2004.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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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치에서 본 천왕봉

 

오늘 산행코스는 백두대간 중 제3소구간인 『성삼재⇒소고리봉⇒만복대⇒정령치⇒고리봉⇒고기리』로 총 16Km의 산행이다. 이 구간은 지리산 서북능선에 해당하나 대간은 고리봉에서 돌연 능선을 버리고 고기리로 내려선다.

 

지리산 서북능선은 지리산에서도 바람이 거세고, 눈이 많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능선 왼쪽은 거의 절벽이라 할 정도로 가팔라, 매서운 북서풍이 실어나른 눈이 능선에 쌓여, 만복대 주변이나 정령치로 내려오는 곳에는, 눈이 허리나 가슴 높이까지 이른다고 한다. 하지만 이 능선에서 굽어보는 조망이 일품이다. 우리가 산행한 2월 24일은 날씨가 맑아, 한껏 조망을 즐길 수 있었다.

가고파 산우회 전세 버스는 861번 지방도로를 달려 11시30분 경 매표소를 통과, 지리산 국립공원으로 들어선다. 이덕연 회장님이 오늘 산행에서 길을 잘못 들 가능성이 있는 곳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한 후 선두구룹이 알바를 하지않도록 특히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아울러 봉우리에 올라서면 반드시 앞으로 가야할 길을 조망해서 큰방향을 잡으라고 일러준 후, 흐린날이나 안개 낀 날에 대비하여 나침반을 꼭 지참하라고 주의를 준다. 길이 질으니 스패츠는 지금 착용하고, 아이젠은 상황을 보아 착용하자고 한다. 산행시간은 선두 5시간, 후미 6시간정도이나 눈길을 감안 7시간까지 주겠다 한다. 속도가 느린 내게는 더 없이 반가운 소리다.

12시 좀 못 미쳐 버스는 성삼재에 도착하고 회원들은 서둘러 하차한다. 회장님 설명 중에 알바란 말을 3차례나 반복됐는데, 의미는 대강 짐작하지만 처음 듣는 말이라 버스에서 내리자,


 
"회장님, 알바가 뭐죠?"  

 

회장님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더니,


 
"길을 잘못 든다는 말이죠. 아르바이트를 줄여서 알바라고 해요."

지리산 서북능선 입구 - 성삼재에서 861번 도로를 100m 후퇴, 왼쪽에 문이 나 있다

웃기는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 지난번 수정봉 갈 때, 버스가 함양 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오니 차안 여기저기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린다. 배낭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각반처럼 신발과 바지 아랫도리를 감싼다. 색깔도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 가지가지다. '아하 ! 눈이 많이 쌓였다니까 신발에 눈이 들어가지 않도록 방비를 하는 구나, 저런 장비도 있었네...' 나는 어쩐다?

 

2001년 4월 20일 발간된 개정판 실전 백두대간 종주산행(조선일보사 간행)에서는 제3소구산의 소요시간을 아래와 같이 표기하고 있다. 『성삼재-(40분)-소고리봉-(1시간30분)-만복대-(50분)-정령치-(40분)-고리봉-(1시간15분)-고기리』 총 4시간 55분이다. 여기에 중식 및 휴식시간을 감안하여 6시간쯤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다. 또 이 코스에는 길 주의 표시가 4곳이 돼있다. 하지만 이 코스는 능선이 뚜렷하여 고리봉에서 고기리로 빠지는 왼쪽 통로, 그리고 고기리 다 내려와 무덤이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난 길만 조심하면 알바를 할 걱정은 없을 듯 싶다

12시 6분 지리산 서북능선길 입구에 들어 섰다. 능선에 올라 서니 바람이 차다. 양지바른 곳은 길이 질척거리고, 음지는 눈이 얼어 미끄럽다. 40여분 을 걸어 소고리봉에 오른다. 소고리봉에 보는 전망이 일품이다. 앞으로는 만복대에 이르는 능선이 굽이굽이 펼쳐있고, 뒤로는 지나온 성삼재가 보인다. 동쪽으로 지리산 반야봉이 가까이 있고, 남서쪽으로 구례구가 멀리 펼쳐져 있다.

소고리봉(1248m)에서본 만복대 가는 길

 

소고리봉에서 본 반야봉

갈 길만 서둘다 보면 소고리봉을 지나치기 쉽다. 주등산로를 걷다 왼쪽의 소고리봉을 알아보고 왼쪽으로 난 길을 올라야 소고리봉 정상이다. 소고리봉을 놓치면 앞 사진에서 보는 장관 을 즐길 수 없다. 소고리봉에서 주위를 살피고 사진을 찍느라 제일 후미로 쳐진다. 후미를 보는 회장님마저 앞서 출발한다. 전망이 하도 좋아 잠시 더 머믈다 미끄러운 비탈길을 따라 묘봉치로 향한다. 묘봉치까지는 거의 줄곳 미끄러운 내리막 길이다. 40분 정도 걸어서 묘봉치에 이른다.

묘봉치(1108m)에서 본 만복대 가는 길 - 오른쪽 밋밋한 곳이 만복대다.

묘봉치는 성삼재와 만복대의 딱 중간 지점이다. 왼쪽으로는 산동면 위안리로 빠지는 등산로가 나있고 산동면이 가깝게 내려다 보인다. 만복대 가는 길은 억새밭 길이다. 양지바른 곳에서 점심을 즐기는 회원들이 보인다. 배운대로 걸어온 길을 뒤 돌아 소고리봉을 찾아 본다.

묘봉치에서 본 소고리봉 - 가운데 삼각형으로 뾰족한 봉우리가 소고리봉이고, 거기서부터 C자형으로 굽은 능선이 흰 눈길로 이어져 묘봉치로 떨어진다. 이 사진을 보면 나도 학습능력은 뛰어났나 보다.

회장님은 묘봉치부터는 힘이 들 거라고 귀띔해 준다. 회원 한 분이 고리봉 오름도 가팔라 힘들 꺼라 하자. 거기는 가팔라도 구간이 짧아 여기보다는 힘이 덜 들 거란다. 가고파 산우회서 준 지도를 보니 묘봉치에서 만복대까지는 도상으로 약 3Km, 고도차이는 330m쯤 된다. 간단히 계산을 해 본다. 고도차가 300m가 넘으니 실제 걸어야 하는 거리는 4Km정도가 될 듯 싶다. 나중에 만복대에 올라 시간을 보니 이 구간을 오르는데 약 1시간 10분 정도가 소요됐다. 1,400m가 넘는 고도는 역시 만만치가 않다.

 

꾸준히 이어지는 오르막 억새 길에는 눈도 없고, 서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오름세를 타는데도 더운줄 모르겠다. 힘이 좋은  분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산행 코스이겠다. 눈 앞의 능선 꼭대기에 올라서니, 길은 오른쪽으로 굽지고, 저 멀리 만복대 정상이 보인다. 오르막은 여전한데 능선길가에 만복대 1Km를 알리는 이정표가 우뚝 서 있다. 뒤로 바위를 배경으로 억새와 바람과 어울린 이정표의 모습이 빼어나다. 이제 만복대 정상이 눈 앞에 있고 선두구룹이 정상에 뫃여 있는 것이 보인다.

만복대 1Km를 알리는 이정표


 

이정표 위치에서 본 만복대 - 선두구룹은 정상에 뫃여있다

만복대 정상에 올라서니 오른쪽으로 반야봉, 왼쪽 저 멀리 천왕봉, 중봉이 보이고 지리산 큰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만복대는 바람이 거세다. 만복대 정상은 암반인 모양이다. 그 암반위에 돌탑을 세워 만복대 키를 키웠다. 정상의 이정표 위치 역시 절묘하다. 능선길의 이정표와 정상의 이정표를 세운분은 미적 감각이 뛰어난 분이란 생각이 든다.

만복대(1433.4m) 정상의 돌탑

거센 바람을 피해, 동쪽 사면에서 회원 두분이 점심을 들고 있고, 한발 앞서 도착한 회장님과 회원 한분이 막 도시락을 풀고 있다. 사진 찍는 것도 뒤로 미루고, 회장님과 어한주라도 나눠 마시려고 서둘러 밧줄을 타고 넘어, 회장님 옆으로 서서, 어한주(禦寒酒)를 나눠 마시고 빵도 한 조각 얻어 먹는다. 식사를 먼저 마친 두분은 앞서 출발을 하고, 이미 차안에서 점심을 해결한 나도 실례를 무릅쓰고 먼저 일어선다. 다시 만복대 정상에서니, 바람이 거세고, 차서 금방 손이 시리다. 서둘러 사진을 몇 커트 찍고, 정상을 뒤로한다.

만복대에서 본 정령치, 고리봉 가는 길,


 
만복대 오르는 길은 남향에 갈대가 우거져 눈이 보이지 않았으나, 정령치로 향하는 내리막길은 북향이라 눈이 녹지를 않고, 며칠 전에 내린 비로 얼어 있다. 눈 위에 난 발자국 중에는 거의 허벅지 높이까지 빠져 있는 것도 보이고, 능선 사면에는 가슴 높이까지 싸인 눈이 얼어 있다.

뒤 돌아 본 만복대 - 왼쪽 제일 높은 곳이 만복대다.

정령치에 가까워지자 내리막이 급해지며, 눈은 완전히 결빙이 되어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희미하다. 혹시 알바를 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내려오니 산불 감시소로 오르는 길과 정령치로 내려서는 갈림길에 이른다.

문 닫힌 정령치 휴게소 - 하늘의 비행운만 한가롭다.

갈림길에서 내려서니 바로 정령치 휴게소다. 비수기라 인적이 드믈어 휴게소 문은 잠겨 있다. 역시 전망이 좋다. 정령치에서 보온병의 커피를 한잔 마시고, 담배도 한 대 피우며 휴식을 취한다. 회장님과 후미 팀이 도착하자 다시 앞서 출발한다. 고리봉으로 오르는 길은 경사가 급하고, 곳곳에 바위들이 돌출해 있다. 경사가 심한 돌길에는 줄이 매어져있다. 35분쯤 걸어 고리봉에 오른다.

고리봉(1304.5m) 근경 -정령치에 이르는 미끄러운 길을 신경 써서 내려오다 보니 고리봉을 원경으로 잡을 기회를 놓쳤다.

고리봉에서는 3면이 훤히 트였다. 동쪽으로 천왕봉을 비롯한 지리산 주능선이 눈에 들어오고, 지리산 서북능선은 동북쪽으로 휘어져 멀리 바래봉이 보인다.서북쪽으로는 우리가 지난번 산행했던 수정봉, 그리고 다음 산행지인 고남산이 내려다 보인다. 급경사 내리막 눈길에 대비하여 아이젠을 착용하고 고기리로 향한다.

고리봉에서 본 지리산 능선과 천왕봉 - 뒤로 푸르게 보이는 능선의 가운데높은 봉이 천왕봉, 그 왼쪽이 중봉이다.

 

고리봉에서 본 바래봉 - 고리봉에서 지리산 서북능선은 동북쪽으로 바래봉으로 이어진다. 벗겨진 봉우리가 바래봉이다.

 

고리봉에서 본 수정봉, 고남산

급경사 내리막길은 눈이 쌓여 아이젠을 신어도 미끄럽다. 2Km정도 내려오니 울창한 소나무 숲이 나타난다. 하늘로 쭉쭉 뻗은 잘 생긴 소나무들이 빽빽하다. 이 소나무 숲은 남원 봉화산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점점 고도가 낮아지며, 왼쪽으로 최근에 조성한 듯 싶은 가묘 3기, 그 아래 눈 덮인 2기의 묘가 있는 공터쪽으로, 가고파 산우회 전단지가 방향을 알린다. 고기리 삼거리에 도착하니 5시 30분이다.

하산길의 이정표 - 가묘 3기, 눈 덮힌 묘 2기가 누워 있다

버스는 6시에 고기리를 출발한다. 오늘 산행시간은 약 5시간 30분. 많이 피곤하다. 자기 체력의 80%정도를 소모하는 것이 이상적이라는데, 그 이상의 체력을 소모한 것 같다. 특히 만복대에 오르는 1시간 10분이 힘들었다. 조금 더 천천히, 중간에 서서 쉬면서, 포카리스웨트를 더 마시는 게 옳은 주법이 었던 듯 싶다.

9시 40분 버스는 동서울 톨 케이트를 통과한다. 잘 하면 대장금 절반은 볼 수 있겠다. 강동 역에서 지하철로 바꾸어 타고 집에 도착하니 10시 35분, 대장금을 보고 샤워를 하니 피로가 한결 풀린다.

 

 

(2004년 2월 27일)

 
Posted by Urim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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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봉에서 본 바래봉>


백두대간은 기회가 있으면 한번 종주를 해보고 싶다. 등산 전문가도 아닌데다, 마땅한 동반자도 없다보니, 산악회의 안내를 받을 수 밖에 없지만, 산악회에서 36회 정도로 분할, 12시간 이상을 무박산행하는 프로그램에는 참여할 엄두가 나질 않는다.


가고파 산우회에서 당일 산행으로 꾸며진 백두대간 종주 회원을 모집한다. 2004년 2월 10일부터 2006년 3월 14일까지 도상으로 총 745Km(구간을 연결하는 써비스 거리를 포함하면 총 807Km) 를 50회로 나누어 매월 둘째, 넷째 화요일에 산행한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어 용기를 내서 참여키로 했다. 다른 회원들에게 짐이 되지 않고, 또 일단 결정한 이상 완주를 해야겠기에 담배도 끊고, 꾸준히 체력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한다.


2004년 2월 10일 오전 6시 55분 경, 선릉역 1번 출구에 버스가 도착하고, 가고파 산우회 회장이 반갑게 맞는다. 내변산 산행시 인사는 했으나 아직 이분 성함도 모른다. 다른 때와 달리 이번 종주에는 40여명 이상이 참여했다고 즐거워하면서, 만복대에 눈이 많이 쌓여, 제3소구간은 포기하고, 제4소구간을 먼저 오를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한다.


버스에 오르니 좌석 앞 포켓에 등산지도, 고도표, 그리고 백두대간의 의의와 산행시 주의사항이 담긴 유인물이 준비돼 있다. 산행시 주의사항은 앞으로 계속 유의해야 할 사항이기에 그 그 주요 내용을 여기에 옮긴다.


● 일출 시까지는 선두 진행요원을 앞지르지 말자.

● 능선에 오를 때까지는 휴식은 서서 자주 취하고 땀이 식기 전에 출발하자.

● 백두대간 종주 리본을 확인하며 진행하자.

● 봉우리에 서면 항시 나아갈 방향 능선과 지나온 방향의 능선을 조망하자.

● 추억거리를 만들기 위해 특기사항(봉우리, 고갯길, 지난 능선과 지날 능선 등)을 촬영, 메모하자.


8시 40분 경 버스는 음성 휴게소에 도착, 아침식사를 하도록 20분간 정차한다. 10시 35분 경 덕유산 휴게소에 잠시 머물고, 11시 10분 경 함양 분기점에서 내려 24번 국도를 탄다. 버스가 국도로 접어들자 나는 준비해간 도시락을 풀었다. 새벽에 집에서 떠나기 전 6시가 못 돼서 아침을 먹었음으로 점심을 먹을 때도 됐고, 추운 산보다는 버스 안이 아늑해 좋다. 도시락은 토스트 3쪽 분량에, 쨈과 콩 버터를 넣어 집사람이 사과 6쪽과 함께 준비한 것이다.


냄새는 피우지 않지만 다른 회원들에게 미안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산에서 전진 속도가 느린 내게는 점심을 차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어 눈 딱 감고 결행한다. 당일 산행시 내가 준비하는 것은 이 도시락 외에, 미숫가루에 인삼분말과 꿀로 만든 음료수 약 500cc, 포카리스웨트 한병, 보온병에 커피, 초코렛과 사탕, 그리고 약간의 위스키나 꼬냑 정도다.


11시 45분 경 버스가 운봉에 도착, 60번 국도로 접어들며 정차한다. 회장은 성삼재가 장비를 동원한 제설작업으로 폐쇄가 됐고, 만복대의 눈이 허리까지 싸여, 불가피하게 제4소구간인 수정봉 코스로 변경해야겠다고 양해를 구한다. 12시 10분 경 버스는 고기리 삼거리에 도착, 하차한 회원들이 등반채비를 차린다. 갑작스런 코스 변경 때문일까? 결단식 기념촬영도 없이 일행은 회장의 유도로 가재마을로 향한다

<수정봉을 향하여>

730번 도로를 걷다가 버스 정류장에서 왼쪽으로 난 씨멘트 길이 가재마을로 가는 길이다. 오른 쪽으로는 고리봉이 보이고, 2시 방향으로 철쭉으로 유명한 바래봉이 하얀 눈을 이고 서있다. 가재마을은 산자락에 자리잡은, 어디서고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마을이다. 백두대간이 이러한 마을을 관통한다는 것이 이상하지만. 우리 선조들의 산에 대한 개념, 즉 산경원리(山經原理)를 이해하면 고개가 끄덕여 진다. 선조들은 산자락 앞의 들까지를 포용한 하나의 덩치를 산으로 보았다고 한다. 조상들은 우리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물뿌리(水分岐)로, 모든 생명체의 시작인 물의 산지로, 산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산은 저 혼자만의 산이 아니라 크고 유명한 산이나 해안가 낮은 구릉의 이름 없는 산이라도 모두 하나로 이루어진 산줄기로 보았다고 하니 백두대간길이 마을을 관통하는 게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겠다.

도룡용이 산다는 노치샘을 들여다보고 산으로 향한다. 한 낮이건만 마을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고, 갑자기 많은 발자국 소리에 놀란 개들만 컹컹 짖어댄다. 산은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다. 앞서 산행한 분들이 밟아서 50Cm 정도 폭으로 내 놓은 등산로가 능선을 향해 구불구불 오르고 있다. 

<노치샘 >

 

가재마을과 수정봉의 고도 차이는 약 300m 정도로, 200m까지는 경사가 급하고, 나머지 100m 차는 완만한 오름세를 보이다가 봉우리 아래서 다시 급해 진다. 환갑, 진갑이 다 지난 나이에 마음만 젊어, 용기를 내여 참여는 했지만, 오르막길은 여전히 힘겹다. 뒤에서 오던 회장님을 중심으로 한 젊은 회원들이 오름 길에서 앞질러 나간다.


능선에 오르니 경사가 완만해 지고, 오르내림이 반복되어, 아이젠을 착용했다. 하얗게 눈 덮인 산이 고즈녁하고, 코끝의 공기는 시릴 정도로 상쾌하다. 오르막을 오르면서 솟은 땀에 스쳐 지나가는 바람결이 더 없이 시원하다. 잡목들에 가려 전망은 좋지 않으나 적당히 오르내리는 등산로를 산책하듯 여유 있게 걸으니 기분이 최고다.


한 시간쯤 걸어 오르자 양지 바른 무덤 가에 회장님을 비롯한 한 무리의 회원들이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 온 산이 눈으로 덮였는데, 무덤 주위의 꽤 넓은 공간에 금잔디가 두드러져 보인다. 회장님이 소주를 한잔 따라 주며 반긴다. 안주로 족발이 푸짐하다. 족발을 뜯으며 바라보니 정면으로 보이는곳이 고리봉, 그 오른쪽으로 정령치가 보이고, 더 오른쪽의 높은 곳이 만복대인 모양이다. 산자락 아래로 넓은 평야가 펼쳐 있다. 가히 명당 자리라 하겠다. 저 아래가 황산벌이라 한다.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크게 무찌른 곳이다. 왜구의 발호가 얼마나 심했으면 이 곳까지 뻗쳤을까? 그들은 어디로 들어 왔을까?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왔나? 궁금한 게 많기도 하다. 기회가 있으면 찾아봐야겠다. 사과도 한쪽 얻어먹고,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먼저 다시 오름세를 탄다. 오름세가 끝나자 다시 무덤이 2-3기 보이고, 회원 두 분이 점심을 드신다. 역시 무덤 주위에는 눈이 자취도 없다. "식사 하시죠.", "먹었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인사를 나누고 다시 길을 재촉한다.

<양지바른 무덤가의 점심>


<정령치, 고리봉, 만복대>

길은 다시 가팔라지고 점심을 끝낸 회원들 한 무리가 다시 앞지른다. 회장님이 빠진걸 보면, 아마 후미를 보시는 모양이다. 이쯤이면 수정봉 정상이 나타날 때가 됐는데도 정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도 선행한 분들이 시간을 재촉하느라 정상으로 향하는 길을 버리고 봉우리 사면을 타면서 만들어 논 눈 위의 발자국을 따르다 보 니 지나친 모양이다.


길가 왼쪽으로 또 한 기의 무덤이 보인다. 이제까지의 무덤과는 달리 하얀 눈을 소복이 이고 있다. 무덤 왼쪽으로는 가파른 낭떠러지다. 묘한 곳에 외로운 묘를 보고 카메라를 꺼내 각도를 잡는데, 뒤따라오던 50대쯤으로 보이는 중년 부부가 걸음을 멈춘다. 방해를 하지 않겠다는 배려다. 가벼운 목례를 하고, 먼저 지나가시라고 손짓을 한 후 무덤을 향해 샷터를 누른다. 부부가 함께 백두대간 종주를 시도하다니 얼마나 큰 행운인가? 다 같이 산을좋아해야겠고, 체력도 뒷받침 돼야하지 않나? 집사람은 청계산 정도는 오르지만, 2시간 이상 산행할 체력이 못된다. 부부가 나란히 등산하는 모습은 보기가 좋다. 무척 부러운 모습이다.

<흰 눈을 소복히 이고 있는 묘>


길은 줄곧 내리막이 계속되더니 평탄한 길을 거쳐 다시 오름세로 바뀐다. 아마 이 곳이 입망치인 모양이다.언덕을 다 올라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오니 왼쪽으로 임도(林道)가 하얀 눈에 덮여 골짜기로 뻗어 있다. 눈은 발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다. 오른쪽 임도에는 눈 위에 발자국으로 길이 나 있다. 오른쪽 임도를 따라 내려가면서 혹시 길을 잘못 잡은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면 마을 쪽으로 내려가는 것 같은데, 벌써 다 왔단 말인가? 사진도 찍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보니 앞선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뒤따라오는 사람들도 없다. 임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군데군데 나뭇가지에 백두대간종주 리본이 걸려있었지만 이 주위에는 그런 표시도 없다. 길을 잘못 든 건가? 하지만 줄 곳 발자국을 따라 왔음으로 마음은 불안하지 만 계속 내려간다.


오른쪽으로 샘이 보이고, 누군가가 치성을 드리는지 샘 가에는 촛불이 켜져 있지만 인적은 없다. 샘물로 목을 축이고, 왼쪽으로 굽은 임도를 따라 계속 내려온다.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다. 창고 같은 집 한 채가 보이고 임도를 가로질러 시멘트 길이 누워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여원재 못 미쳐 시멘트 도로가의 창고>

화살표로 방향을 표시한 가고파 전단지가 길 위에 돌로 눌려 있다. 비로소 안심하고 전단지가 가르치는 방향으로 올라가니 주지사 이정표가 보이고, 다시 가고파 전단지가 여원암 쪽으로 방향을 가르친다. 여원재에 다 온 것이다. 저 아래로 앞서 내려온 회원들이 마치 행군하는 군인들처럼 24번 국도를 따라 남원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이제는 서두를 것도 없다. 마음이 느긋해 진다.


24번 국도 버스정류소에서 아이젠을 풀고, 미숫가루 음료수를 마신다. 느긋하게 담배도 한 대 피운 후 회원들이 간 길을 따라 내려간다. 길가에 버스가 대기해 있어 배낭을 자리에 놓고, 건너편 길가 공지에서 막걸리로 하산주를 즐기는 회원들과 합류한다.


이렇게 3시간 여의 짧은 산행으로 백두대간종주 첫 일정을 마친다. 마치 고향 마을 뒷산을 산책하듯 정겹고, 마음이 푸짐해지는 산행이다.




(2004.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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