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언론사 신입 사원 면접에 같은 학교, 같은 학과 여학생 둘이 올라왔다. 필기 성적도 비슷했지만 채용 숫자가 적어 둘 다 합격시키기 곤란했다. 당락(當落)은 두 학생이 면접 마치고 일어서면서 한 말에서 갈렸다. 한 명은 "수고하세요", 다른 한 명은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면접 위원들은 '고맙습니다' 쪽에 점수를 더 줬다. '수고하세요'는 국립국어원 '표준 언어 예절'에 윗사람에게 해선 안 되는 말로 올라 있다.
▶'수고하다'는 '일하느라 힘을 들이고 애를 씀'이다. 어른에게 "먼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고 하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헤어질 때 흔히 건네는 '수고하세요'는 같은 연배나 아랫사람에게 할 인사다. 존대한다고는 해도 윗사람에게 명령하는 셈이고 '고생하라'는 것도 예가 아니다. "먼저 가서 죄송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쯤이 맞다.
▶작년 봄 마흔 중반 IT 사업가가 모교 자전거 동아리에 장비 사 쓰라고 1000만원을 내놓았다. 총무를 맡은 학생은 장비도 안 사고 일부를 써 버렸다. 그는 동아리 회원들이 추궁하자 지난주 선배 사업가에게 "사과하겠다"고 SNS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면서 20년 선후배 사이에 오간 SNS 대화가 어제 조선일보 사회면에 실렸다. 후배는 잘못을 인정하고 "처벌을 받겠다"고 했다. 그 메시지를 맺은 말이 "수고하십시오"다.
▶그 대목에선 당연히 '죄송합니다'라고 해야 했다. 사과는커녕 '더 힘들여 애쓰시라'고 화를 부채질한 꼴이다. 대학생이지만 그 말 자체가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부터 몰랐을 것이다. 선배가 "사과할 줄 모르느냐"고 하자 후배는 "습관적 작문이었던 점 사과드린다"고 했다. 참 메마른 대답이다. 거기에도 미안해하거나 뉘우치는 진심이 비치지 않는다. 그러고는 평행선이었다. 후배는 "침착하십시오"라고 했고 선배는 "그냥 고소하마"고 했다.
▶SNS엔 토막글만 있다. 마주하는 표정·몸짓·자세와 음성·억양·호흡이 없다. 표현 하나 삐끗하면 대화가 깨진다. 뜬금없는 '수고하십시오'라니. '하십시오' 한다고 다 존댓말이 되는 게 아니다. 후배는 적절한 말을 쓸 줄 몰랐거나 그게 속마음이었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문자 찍고 있을 게 아니라 달려가 용서를 비는 게 순서다. "죄송하다"는 말이 그렇게 하기 힘들었을까. 온기 없는 SNS는 애초부터 사죄하고 용서하며 진심을 나누기에 알맞은 매체가 아닌 모양이다. 우리 속담에 '가루는 (체에)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고 했다. SNS가 딱 그렇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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