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웅석봉

기타산행기 2012. 11. 30. 11:12


지리산은 언제 보아도 넉넉한 산, 큰산이다. 지리산에 들어서면 마음이 넉넉해지고, 여유로와 지는 것 같다. 산을 닮는 모양이다.

 

웅석봉(1,099m)은 이런 지리산의 동쪽 끝자락에 한 발 떨어져 우뚝 솟아 있다. 웅석봉은 떠오르는 해를 등지고 매일 천왕봉(1,915.4m)과 대좌한다. 천왕봉에게도 꿀림이 없이 당당하다. 범머리재에 도로가 뚫리기 전까지는 웅석봉 오르기가 천왕봉 오르기 보다 어렵다 했다던가?

<웅석봉 정상 오르는 길>

 

이런 오연한 웅석봉이 경호강을 품고 산청읍을 병풍처럼 둘러 싸, 심산 속에 삶의 터전을 만든다. 이런 인연 때문인가? 인류 역사상 가장 크고, 비극적인 이데올로기 싸움인 6. 25사변 때, 북에서도 버림받고, 남측의 토끼몰이 사냥에 쫓기던 빨치산들이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린다." 라는 이현상의 말에 따라, 경호강을 건너고, 달뜨기를 거쳐, 웅석봉 깊은 골짜기로 들어선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노숙한 이들은 전례 없이 신중한 작전준비 끝에 덕산리와 대포리의 경찰 보루대를 공격한다. (李 泰의 南部軍 참조)

<웅석봉에서 본 산청읍>

요즈음에는 지리산 태극능선을 종주 하는 산악인들이 많아 졌다. 태극능선은 동쪽의 웅석봉을 기점으로 하는 동부 능선과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의 주능선, 그리고 지리산 서북능선의 종점 덕두봉까지의 능선이 태극을 닮았다해서 생긴 이름이다. 도상거리 약 70.5Km의 마루금을 40 여 시간 정도에 주파한다.

크리스마스가 토요일이라 신도들의 요청도 있어 대간 산행은 휴무하기로 결정한다. 대신 산악회의 토요 당일 산행지를 웅석봉으로 정하고 3차대간 팀 대원들의 참여를 유도한다. 산행코스는 『밤머리재-왕재-상투바위-웅석봉-895봉-지능선-지곡사』로 산행거리 약 13Km, 산행 소요시간 약 5 시간이다. 가보고 싶었던 산. 일찌감치 예약을 한다.

 

크리스마스 휴일, 집사람을 혼자 두고 나서기가 자꾸 걸린다. 하지만 마음은 이미 웅석봉으로 향한 걸 어찌하랴. 새벽에 일어나, 싫은 내색 없이 도시락을 챙겨주는 집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을 남기고 집을 나선다.

 

7시 10분 경 서초 구민회관 앞에 도착한다. 건장한 중년 사나이들이 모여 있지만, 아는 얼굴은 하나도 없다. 3차대에서는 나 혼자인가 보다라고 체념하는데, 和峰 님이 모습을 보인다. 역시 묵은 장(醬)맛 같은 연륜의 멋이 있다. 버스가 도착할 무렵, 함 사장님 부부가 도착한다. 평소에는 눈에 뜨이지 않게 조용하던 부부다. 버스에 오르니 짹 울프 님이 타고 있다.

 

오늘 산행인원은 39명, 적지 않은 인원이다. 대빵 님이 진두지휘한다. 和峰 님 말씀으로는 15명정도가 2차대간 팀 멤버라 한다. 이양숙 회장님도 보인다. 아마도 2차대간 팀은 대간종주 후에는 토요 당일 산행을 중심으로 다시 모이는 모양이다.

 

버스는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30분 정차한다. 크리스마스 휴일이라 그런지 휴게소에는 아이들을 동반한 여행객들이 많다. 모두를 즐거운 표정이다. 和峰 님과 함께 커피와 호두 과자로 간식을 즐긴다.

 

버스는 산청 인터체인지를 빠져, 59번 국도를 타고 밤머리재로 향한다. 국도변 밭두렁 곳곳에 잔설이 보인다. 이 지역에는 어제 눈이 내린 모양이다. 버스가 밤머리재를 향해 언덕길을 오른다.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눈이 많아진다. 언덕으로 오르는 아스팔트길도 미끄러지지 말라고 흙을 뿌려놨다. 길가의 소나무들이 무겁게 눈을 이고 있다. 제법 많은 눈이 온 모양이다.

 

이리고불, 저리고불 눈 쌓인 길을 버스는 힘겹게 오른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주위의 산들이 점점 낮아진다. 바람이 거세게 지나가는 모양인지, 눈보라가 인다. 이윽고 고개 마루턱에 오른다. 고도 580m 높이의 밤머리재다. 11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다.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30분간 정차한 것을 감안하면, 서울서 이 곳까지 약 3시간 정도 걸린 셈이다.

 

버스에서 내려서니 바람이 강하게 분다. 아스팔트 위로 제법 눈이 쌓였다. 웅석산 군립공원 안내도 앞에서 사진을 찍고, 11시 8분 경. 그 옆으로 난 등산로로 오른다. 가파른 계단 길은 눈으로 덮여 있다. 아마도 10 Cm 이상 눈이 내린 모양이다. 왼쪽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 차지는 않은 바람이다. 하지만 눈발이 어지럽게 날려, 귀마개를 내리고 모자를 깊게 눌러쓴다.

<안내판 앞에서 기념 사진>

10여 분쯤 계단을 오르며 뒤돌아보니 건너편 밤머리재로 떨어지는 산 사면도 눈이 하얗게 덮여 있다. 왼쪽으로는 산청읍 너머로 우뚝 솟은 산이 보인다. 왕산인 모양이다. 황장산에서 첫 눈을 즐겼고, 두로봉에서 눈길에 고생을 했지만, 오늘처럼 많은 눈은 아니다. 오늘 비로소 본격적인 설산 산행을 한다.

<왕등재에서 밤머리재로 떨어지는 사면>

30분쯤 오르니 오른쪽으로 천왕봉과 중봉이 보이고, 하봉으로 이어져 쑥밭재, 왕등재, 깃대봉을 거쳐 밤머리재에 이르는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후 웅석봉 정상에 이르기까지 천왕봉은 줄곧 우리들을 따라온다. 11시48분 헬기장에 도착한다. 헬기장은 눈이 하얗게 덮여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천왕봉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평탄한 눈 덮인 능선 길을 비교적 빠른 속도로 진행한다. 和峰 님이 소리친다. "와아 ! 천왕봉쪽을 봐라 ! 눈보라가 휘날린다." 과연 쌓였던 눈이 바람에 휘날리는지, 아니면 눈사태라도 난 건지 천왕봉 중턱쯤에 하얀 눈꽃이 피어오르는 게 보인다.

<천왕봉의 눈보라>

 

11시 57분 경 암릉 길을 지나는데 오른쪽 방향이 활짝 트인다. 그 사이로 눈 덮인 지리산의 흐름이 깨끗하게 보인다. 실로 장관이다. 암릉 길에 조심스럽게 모여 이 그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천왕봉, 중봉, 그리고 동부능선>

12시가 지나자 눈 쌓인 능선 길이 가팔라진다. 12시 30분 왕재(925m) 이정표 앞에 선다. 밤머리재에서 3.3Km를 왔고, 웅석봉까지는 2Km가 남은 지점이다. 웬일로 산 속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빠를 따라 눈 덮인 산을 오른 3-4세쯤 보이는 남자애가 엄마가 없다고 떼를 쓰고 운다. 함 사장 부부가 사탕을 주면서 달래도 막가내다. 아이는 장갑도 없다. 눈길에 장갑이 다 젖어 벗겼다고 한다. 이 험한 겨울 산에 아무 준비 없이 아이를 동행한 젊은 아빠가 참 딱하다. 선녀탕 쪽으로 하산한다지만, 눈길 2Km를 우는 아이를 업고 걸어야 한다. 무모하다.

<가파른 눈길>


 

<왕재 이정표>

또한 고비 오름 길을 오른다. 왼쪽 능선 쪽으로 제법 눈이 깊게 싸였다. 눈 속의 산행이 즐거운지 앞서 걷던 和峰 님이 두 손을 버쩍 치켜세우며 포즈를 취한다. 뒤로 56번 국도와 밤머리재, 그리고 걸어 온 능선길이 보이고, 왼쪽으로 산청읍과 경호강, 그리고 35번 고속도로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56번 국도와 밤머리재 그리고 걸어온 길>

<저수지, 경호강 그리고 다리>

1시, 길가의 비교적 너른 공간에서 모여 앉아. 도시락을 푼다. 바람도 자고 햇볕은 따듯하다. 눈 앞의 천왕봉을 바라보며 점심을 즐긴다. 1시 20분 경 점심을 마치고 마지막 언덕길을 오른다. 20분쯤 지나 고개 마루턱에 서니, 안부를 지나 웅석봉으로 이어지는 눈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1시 43분 안부의 너른 헬기장 이정표 앞에 선다. <웅석봉 0.3K, 밤머리재 5K, 샘물 500m>. 바람이 거세다. 서둘러 사진을 찍고, 웅석봉을 향한다. 1시 50분 응석봉 정상에 이른다. 사방이 트여 조망이 일품이다. 지리산이 보이고, 우리가 걸어 온 능선이 일직선으로 보인다. 산청읍, 경호강이 아련하고, 내리 쪽으로 뻗은 눈 덮인 능선이 사납게 흐른다. 기념사진을 찍고, 아이젠을 착용한 후 2시경 하산을 시작한다.

<헬기장 이정표>

<남부능선>

<걸어 온 능선길>

<정상에서>

하산 길 능선이 가파르다. 북쪽이 터진 사면을 내려 설 때는 눈에 무릎까지 빠진다. 아이젠도 없고, 스틱도 준비하지 않은 여자들이 엉금엉금 긴다.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자빠진다. 뒤돌아보니 올돌한 웅석봉이 검게 솟아 있다.

 

무명봉을 지나면서 하산길은 북쪽 사면으로 이어진다. 눈은 더욱 많이 싸여 있고, 곳곳에 칼날 능선길이 이어진다. 역광 속의 웅석봉을 잡아 보려고 많은 시간을 보낸다. 고도가 낮아지면서 등산로는 잡목 숲을 지나고 낙엽송 사이로 이어진다.

<눈 쌓인 칼날능선>

<뒤돌라 본 웅석봉>

3시 34분 임도에 내려선다. 이정표가 서 있다. <고도 380m, 웅석봉 4.3Km>. 아이젠을 풀고, 미숫가루 탄 물을 마시며 쉰다. 다시 임도를 따라 걷는다. 지곡사를 왼쪽으로 보며 내려서서, 4시 조금 못 미쳐 버스가 대기한 곳에 이른다. 버스는 최종 후미를 태우고 4시 30분 서울로 향한다.

<임도 이정표>

<마을에서 본 웅석봉>

우연하게도 오늘 참여한 5명은 모두 지하철 7호선을 이용한다. 8시가 조금 지난 시각, 논현역에서 모두 함께 하차하여, 논현 비어 할레로 들어선다. 연락을 받고 조총부부가 이미 와 기다리고 있다. 10시 경 까지 연장 마루금 산행이 계속되고, 29일 송년회 때 다시 모이기로 하고, 흩어져 귀가한다.


(2004.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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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Urim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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