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레스트의 미스터리

라인홀트 매스너(Reinhold Massner) 지음 / 신혜원 옮김

 

1852, 인도 측량국 앤드류 워는 “15호 봉우리가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봉우리보다 높다는 보고를 받고, “지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발견되었다.”라고 발표한다.

 

“15호 봉우리7년간의 측량 끝에 1849, 그 높이가 8,840m라는 측정치를 얻었고, 앤드류 워가 최종적으로 이를 확인하여 발표한 것이다. 그리고 1856, 영국왕립 지질학회는, 1823년부터 1843년까지 인도 측량국 국장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조지 에베레스트 경의 이름을 따서, 이산의 이름을 에베레스트 산이라고 명명한다.

 

남쪽에서 본 에베레스트

 

븍쪽에서 본 에베레스트

 

에베레스트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공표된 후, 100년 동안, 영국이 9차례, 미국과 스위스가 2차례, 소련과 덴마크가 1차례씩,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총 15번의 원정대를 파견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초기 에베레스트 등정기록

 

9차례나 원정대를 보내고도 정상등정에 성공하지 못한 영국은 1953, 존 헌트(John Hunt)를 대장으로 한 최강멤버의 원정팀을 편성하고, 정상등정에 도전한다. 1953, 528, 2차 정상공격대, 힐러리(E. Hillery)와 사다 텐징(Tenzing)은 두 사람의 대원과 셰르파 1명의 지원을 받으며 사우스콜에서 남릉으로 올라간다. 그들은 지난해 스위스 대 가 올랐던 최고지점 바로 아래에 제9캠프를 설치하고, 지원 병력 3 사람은 사우스콜로 철수한 후, 힐러리와 텐징은 그곳 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동남 루트

 

1953529, 쾌청한 날씨다. 그들은 6시 반경, 9캠프를 출발하여, 좋은 컨디션으로 정상을 향한다. 9시경 남릉을 통과하고,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올라, 오전 11시 반, 드디어 정상에 선다. 에베레스트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공표된 후 101년 만에 이룬 쾌거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힐러리와 텐진

 

세계의 모든 국가, 모든 산악인들이 에베레스트 정상등정을 염원하지만, 유독 영국이 두드러지게 열을 올리고, 앞장을 선 것에는 이유가 있다. 지구상의 극지인 북극과 남극의 최초 탐험의 영예를 , 미국의 피어리(1909)와 노르웨이의 아문센(1911)에게 빼앗기자, 해가지지 않는 나라 영국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는다. 그리하여 이제 하나 남은 제 3의 극지, 에베레스트가 상처받은 영국의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돼 버렸다.

 

영국 산악회는 1907, 창립 50주년을 맞아, 에베레스트 정상등반을 제안한다. 하지만 티베트와 네팔이 외국인 입국을 꺼려하는 입장을 고려하여, 영국의 인도정부가 그 제안을 거부하자, 진전을 이루지 못한다.

 

세계 1차 대전이 끝나고 에베레스트 등정 분위기가 무르익은 시기인 1919년 영국 왕실 지질학협의회 회장에 취임한 프란시스 영허즈밴드(Francis Edward Younghusband)경은 협회와 산악회 대표들로 구성된 에베레스트 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에베레스트 등정을 추진하게 한다.

 

1920년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로부터 등산 허가를 얻은 영국은 다음 해에 제1차 에베레스트원정대를 파견한다. 하워드 바리(Howard Bury)대령을 대장으로 하는 이 원정대는 4명의 대원과 수명의 과학자로 구성하여, 에베레스트 산록까지의 길을 답사하고, 다음에 등반 할 수 있는 루트를 정찰하게 한다.

 

20년대 영국의 에베레스트원정대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에 에베레스트와 함께 영원히 기억되는 사람이 있다. 왜 산에 오르느냐는 질문에,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Because it is there.)”라는 명언을 남긴 조지 말로리(George Leigh Mallery)가 바로 그 사람이다.

 

조지 말로리

 

1886618, 영국 모벌리에서 출생한 말로리는 케임브리지대학 재학 중 당대 최고의 등반가인 어빙(Irvine)과 훗날 영국 산악회 회장이 된 제프리 영(Jeoffrey winthrop young)에게 등산기술을 배운다. 그는 등반 기술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폭 넓은 신뢰를 얻어, 당시 영국 산악계에서 가장 우수한 등반가로 인정을 받는다.

 

그는 19211차 원정대에 참여하여, 노스콜에서 북능을 거쳐 북동능에 진입한 후 정상에 오르는 루트를 최초로 발견한다. 그는 19222차 원정대에도 참여했으나, 원정대는 눈사태로 대원들만 잃고, 뜻을 이루지 못한다. 말로리는 1924년의 3차원정대에도 참여한다. 3차 원정대의 1, 2차 정상공격에 실패한 후, 말로리는 앤드류 어빈(Andrew Irvine)과 함께 3차 정상공격을 시도하지만, 북동능 제2스텝 부근, 8,600m 지점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그들의 에베레스트 정상등정 성공여부가 미스터리로 남는다.

 

  말로리 루트

 

1924년 베이스 캠프에서 찍은 어빈과 말로리(우)

 

노스콜로 오르는 등반대

 

이 책은 금세기 최고의 탐험가,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가 에베레스트 최초등정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정리 한 것이다. 그는 에베레스트 북동능 제2 스텝에서 후퇴보다는 죽음을 택한 조지 말로리에게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역자 신혜원씨는 이 책의 특징으로 매스너가 시간의 흐름을 뛰어넘어, 말로리와 연관된 중요사건들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역어 나아감으로, 이야기 전개가 무척 박력이 있고, 저자 스스로가 조지 말로리가 되어, 그이 눈으로 과거와 현재를 보고 말하는 기법을 도입하여, 현실감을 배가시켜, 독자들을 매료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1944년 알프스 남쪽 남 티롤에서 태어났다. 그는 히말라야 8,000m14좌 고봉을 세계 최초로 완등하고, 산소 없이 단독으로 에베레스트에 오른다. 그는 도보로 그린란드, 남극, 동 티베트 등을 횡단하여, 금세기 최고의 탐험가 중의 한사람으로 칭송을 받고, <검은 고독 흰 고독> 둥 많은 책들을 쓴 저술가로도 유명하다.

 

라인홀트 메스너

 

그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말로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고, 그의 도전정신과 등산스타일에 매료되어 그를 존경하게 된다. 그에게도 말로리와 어빙이 정상에 오른 후, 하산하다 실종된 것인 지, 아니면 제2스텝을 오르다 조난을 당한 것인지가 무척 궁금했다. 메스너는 1980년 단독으로 동북능선 루트를 거쳐 에베레스트 정상등반에 성공한 후, 말로리가 제2스텝을 오르다 추락하여 사망했을 것으로 확신한다.

 

두 번째 스텝의 이 굉장한 암벽.” 1824년의 장비, 징 박힌 등산화를 신고 이 암벽을 오른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말로리는 이곳에서 돌아서야 했다. 하지만 정상이 아니면 죽음이다.’ 라는 것이 그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이었기에, 그는 산에 남기로 한 것이다.

 

  두 번째 스텝

 

우리는 분명히 돌아가야 했다. 오로지 하강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이다. 두 번째 스텝은 우리에게 불가능 한 곳이며, 다른 우회적인 방법을 쓰기에는 너무 늦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듣고 있었고, 느끼고 있었다.”

 

만약 어빈이 남은 산소통을 내게 넘겨주고 돌아갔다면, 나 혼자 시도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설사 그런 생각을 했더라도 동료를 속일 시도 같은 것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이상 메스너가 말로리가 되어 남긴 말.)

 

  말로리의 선택

 

이 제2스텝은 1975년 총 453명의 인력을 투입하여, 마치 인해전술로 군사작전을 펴듯, 에베레스트 북쪽사면에 도전한 중국원정대에 의해 최초로 돌파된다.

 

- 홍위병과 티베트인으로 구성된 포터들이 6일 동안에 다섯 번 노스콜에 오르면서 산소통을 포함한 모든 물자를 운반했다.

 

중국의 인해전술 1

 

중국의 인해전술 2

 

 

- 그동안 베이스캠프와 제3캠프 사이에 전화선이 가설된다.

 

- 1975526일 날씨가 맑아지자, 동북능선 위로 이어지는 빙면(氷面)과 수직암벽에는 고정자일로 안전장치를 하고, 두 번째 스텝에는 알루미늄 사다리를 고정시키는 작업이 행해진다. 특히 두 번째 스텝의 안전장치는 이틀 동안 계속된 두 번의 시도 끝에 비로소 고정자일과 네 개의 알루미늄 사다리로 안전장치를 설치하는데 성공한다.

 

- 1975527일 아직 밖은 어두운데 2개의 정상공격조가 출발하여 첫 번째 스텝을 지나서, 높이가 20m나 되는 두 번째 스텝 앞에 선다. 그들은 고정 자일에 매달려 두 번째 스텝을 오른 쪽으로 우회 한 후, 금속제 사다리를 타고 오른다. 오전 8, 2조의 정상공격 팀 9명의 대원들이 정상을 향해 출발하여, 모두가 1430, 정상에 오르고, 70분 동안 정상에 머문다. 쾌청한 날씨에 바람도 없다.

 

  두 번째 스텝의 사다리

 

529일 전 대원들이 베이스캠프로 돌아온다. 정상에 오른 팡톡여사(37), 소드남 노르부(29), 로체(37), 삼드롭(25), 다르푼초(30), 쿵가 파상(29)체링 톰기알(29) 느가포 카엔(21)8명의 티베트인과 유일한 중국인 혼 셍푸(36), 9명은 그 공로로 훈장을 받는다.

 

199951일 정오, 말로리와 어빈 수색 원정대 대원인 콘라드 앵커(Conrad Anker)8,520m 높이에 있는 테라스에서 밀랍처럼 하얀 시신을 발견한다. 입고 있는 옷은 건드리기만 해도 찢어질 것 같고, 왼쪽 발은 아직도 튼튼해 보이는 등산화를 신고 있다. 경골과 비골은 골절 된 것이 확실하다. 실종 후 75년 만에 말로리의 시신이 발견된 것이다. 말로리가 사체가 발견된 곳은 1933년 어빈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스 피켈을 찾은 곳에서 조금아래 쪽이라고 한다.

 

말러리 시신발견

 

메스너는 말로리 시신이 발견된 후, 시신이 발견된 위치를 볼 때, 말로리가 전력을 다해 두 번째 스텝을 기어오르다 추락했거나, 혹은 어빙이 스텝아래의 미끄러운 경사면에서 미끄러졌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이들은 결코 정상등정에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거듭 단정한다.

 

하지만 그는 불가능한 것, 정복되지 않은 것, 영원히 정복할 수 없는 것에 도전하는 말로리의 순수한 모험정신과 도전정신만으로도 그가 뒷사람들에게 패배자가 아닌, 영원한 승리자로 길이 남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2016.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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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Urim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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