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마당 천장 구조물 - 천장에 설치된 3,000여개의 구조물은 신흥무관학교 학생 3,300명을 기린다고 한다.

 

지상의 녹지공원 등을 대강 둘러보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서 이회영 기념관으로 향한다.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예장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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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회영 기념관 앞에서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젊은이들

 

이회영(李會榮-1867.4. ~ 1932.11.)은 조선 말 명문 거부집안의 6형제 중 넷째로 태어난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상가이다. 호는 우당(友堂).

 조선 최고의 가문

 

 조선최고의 부자

 

19051117일 일본 제국주의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외교권을 강탈하자, 이회영은 을사늑약 체결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 특사 파견을 추진한다. 그리고 여섯 형제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우리 집안은 결코 일본제국의 휘하에서 살아갈 수 없다.”라고 설득하여, 일가족 50명이 전 재산을 모두 급히 처분한 대금 40만원 (제값을 받고 제대로 팔았으면 현재가치로 수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을 갖고 중국으로 망명한다,

이회영 선생 6형제()

 

이회영은 중국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10년 동안에 약 3,500명의 독립군을 배출한다. 일본군을 대패시킨 봉오동 전투, 그리고 일본군 1,200여명을 사살한 청산리 대첩 등에 참가한 독립군들이 바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라고 한다.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이회영과 형제들은 하루 한 끼를 제대로 먹을 수 없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굴하자 않고,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다. 이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된 이시영을 제외한, 다섯 형제들은 모두 조국의 해방도 보지 못한 채 사망했다.(이상 관련 자료 발췌)

 

조용하고 한적한 기념관이다. 1, 2층을 빠짐 멊이 둘러보고 조용히 기념관을 나와, 공원 들머리를 둘러본다. 이어 명동역 1번 출구로 나갈려 하니, 그쪽 출구를 막아 놓았다. 어쩔 수없이 에스컬레이터로 지상으로 올라와, 명동역 1번 출구로 향한다.

 기념관 안

 

 군복 외

 

 봉오동으로 가자, 청산리가 되자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을 선포하고 일본군과 싸웠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다수인 독립군은 봉오동 골짜기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중국 지린성 청산리에서 엿새 동안 치른 전투에서 대승첩을 거두었다.

 

이 독립전쟁에서 사용한 무기의 상당수는 체코군단에게서 획득한 것으로, 대략 소총 1,200여정, 기관총 6, 박격포 2문과 권총, 수류탄 등이었다. 무기구입대금은 돈이나 금붙이뿐만 아니라, 여인네들이 뽑아 바친 비녀, 은가락지로 지불했다

 봉오동으로 가자, 청산리가 되자. 의 영문 안내

 

 체코군 무기

 

 청산리 전투 직후 사진

 

인간의 폭이 넓은 우당 이회영은 막힘 또한 없었다고 한다. 이런 그가 30세에 세상풍운을 거스르고, 중국인들과 항일공동전선 지하조직을 만들려고 노구를 이끌고 상해를 떠나 만주로 향하다 다렌항에서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 끝에 숨을 거두었다. 향년 66

 이회영 기념관과 우당 이회영

 

 청년 이회영 세상 풍운을 거스르다

 

 이회영의 최후

 

이회영 6형제가 일제에 항거하여 투쟁을 벌이고 있는 뒤에서, 뒷바라지를 해온 이회영의 부인, 영구 이은숙 여사를 빼 놓을 수 없다. 그녀는 삯바느질을 해서 모은 돈으로 총을 사고, 6형제의 투쟁과정을 글로 적은 귀중한 서간도 시종기를 남겨, 6형제에 더해 7번째 별로 칭송을 받고 있다.

 난잎으로 칼을 얻다

 

 양구 이은숙

 

 신흘무관학교를 세우다 <서간도 시종기>

 

 삯바느질로 총을 사다 <서간도 시종기>

 

 공원 들머리 표지

 

오늘 남산예장공원을 둘러보는데 소요된 시간은 약 1시간 20분 정도다.

 

 

(2021. 6. 20.)

 

 

 

 

Posted by Urim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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