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테 오야리 갈림길 이정표
2012년 10월 4일(목)
새벽 4시 30분, 모닝 콜. 간단히 세수만 하고, 어제 저녁, 짐을 정리한 덕에 10kg 미만으로 줄어든 배낭과 가방을 들고 주차장으로 향한다. 일본이야기의 지시대로 준비해온 아이젠, 스패츠, 오버트라우저, 우모보온재킷, 겨울바지 등을 소형 여행용 가방으로 옮겨 배낭 무게를 가볍게 한 것이다.
출발 전에 인터넷으로 다카야마 지역의 일기예보를 검색하여, 산행기간 중에는 날씨가 맑고, 기온도 다소 높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다, 실제로 와보니, 아무리 3,000m가 넘는 고산이더라고 한겨울 장비는 필요 없겠다는 판단 하에 과감하게 짐을 줄인 것이다.
이윽고 일행들이 모두 모이자, 5시경, 가이드는 히라유(平湯)온천장으로 차를 몬다. 산행출발지인 가미코지(上高地)까지는 차가 들어갈 수가 없어, 히라유 온천장에 차를 두고,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가이드는 온천장으로 향하는 도중, 잠시 편의점에 들러, 일행이 아침과 점심에 먹을 도시락을 준비한다.
6시 20분경에 온천장에 도착했지만, 출발준비를 하다 보니, 간발의 차로 6시 30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놓치고, 7시 차를 기다리며, 도시락을 꺼내,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 아침식사를 한다. 국물도 없이 먹는 도시락이 맛이 있을 리가 없는데, 양은 왜 그리 많은지, 반도 못 먹겠다. 밥을 먹고 나자, 남은 도시락 처리가 문제다. 이 지역이 국립공원이라 쓰레기통이 없고, 자기 쓰레기는 자기가 가지고 다녀야 한다고 한다.

히라유에 도착

히라유 버스 정류장

버스 시간표
7시 정각, 버스에 오른다. 이른 시각인데도 승객들이 많다. 가미코지에 주차장이 없어 일반차량의 출입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7시 20 경, 버스는 가미코지(上高地, 1,523m)에 도착한다. 암봉 위로 파란 하늘이 보이는 맑은 날씨다. 가미코지는 3,000m급 호다카다케 연봉들에 둘러싸인 분지이고, 가운데로 아즈사가와(강)가 흐른다. 1927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가 그의 대표작중 하나인 소설 『갓파(河童)』를 발표하고, 그 소설에서 가미코치(上高地)와 갓파바시(河童橋)를 소개한 이후 관광객들이 급증하고, 1934년에는 가미코치 일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가미코지 소개 돌표지

가미코지 풍광 1 - 보이는 다리가 갓파바시다

가미코지 풍광 2

가미코지 풍광 3
버스터미널 옆 광장에 모여, 가이드로부터 오늘 산행일정을 듣는다. 이곳에서 야리가다케 산장까지는 도상 거리 약 22Km, 고도차는 1,520m나 된다. 하지만 덴구바라분기졈(天狗原 2,348m)까지는 평지와 다름없는 완만한 오름이고, 나머지 5Km가 경사가 심해 다소 힘이 들 거라면 4시~5시 경이면 산장에 도착할 것이라고 한다. 일정설명을 끝내고 7시 35분, 산행을 시작한다.

가미코지

산행시작
이윽고 갓파바시를 지나, 7시 50분 경, 가이드는 비지터 센터(Visitor Center)를 방문하고, 우리들은 그 근처에 있는 쓰레기장에 아침식사 쓰레기를 처리한 후,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며 가이드를 기다린다. 8시가 다 되어 일을 끝낸 가이드는 앞장서서 발걸음을 재촉한다. 신작로 같이 넓은 길이 평탄하게 이어진다. 기분 좋은 산책로다. 시야가 트이며 아즈사강과 구름을 이고 있는 묘우진다케(2,931m)가 그림같이 펼쳐진다. 8시 35분 묘우진산장에 도착한다.

비지터 센터

비지터 센터 부근에서 본 멋진 풍광

구름을 이고 있는 묘우진다케

이정표

묘우진 산장 주변
잠시 묘우진산장 주변을 둘러보고 일행은 서둘러 4Km 떨어진 도쿠사와산장(德澤 1,562m)으로 향한다. 앞장 선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가이드 정종균씨는 일본에 유학 와서 도쿄에서 6년 동안 체재했다고 한다. 산을 좋아하지만, 쓰루 가이드로 일을 하고 있을 뿐, 전문산악 가이드는 아니라고 한다. 쓰루가이드(Through Guide)는 여행인솔자와 현지가이드를 겸하는 가이드를 이르는 말이다. 물이 마른 넓은 강변으로 나온다. 시야가 확 트여 시원하다. 강 건너에 암봉들이 보인다. 우리나라의 주왕산과 같이 암괴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지만, 바위가 단단해 보이지가 않는다.

물 마른 너른 강변, 시야가 트여 시원하다.

당겨 찍은 먼 산

강 건너편 암봉, 바위가 단단해 보이질 않는다.
가이드의 걸음이 다소 빠른 편이지만, 모두들 열심히 뒤를 쫓는다. 오늘은 갈 길이 멀다. 나는 내 페이스대로 뒤쳐져 걷는다. 하지만 일행들이 쉬고 있는 동안에 그들을 따라 잡고, 이어 쉬지 않고 진행하여, 그들을 앞선다. 하지만, 곧 일행에게 추월당해 또 뒤진다. 이런 식으로 일행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를 반복한다. 9시 27분, 도쿠사와(德澤)산장에 도착한다. 이정표는 요오코 산장(橫尾 1,620m)까지 3.9Km라고 알려준다.

도쿠사와 캠핑장

도쿠사와 산장

독특한 모양의 이정표
등산로는 한동안 잘 생긴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아름다운 숲 사이로 이어진다. 9시 43분, 신무라바시(新村橋)를 지난다. 왼쪽의 신무라바시를 건너면 단풍으로 유명한 가라사와(涸沢)에 이르게 된다. 다시 강변으로 나온다. 강 건너에 암봉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쭐우쭐 솟아있다. 암봉들의 모양이 우리 것들과는 다르게 푸석해 보이고, 바위가 부서져 내린 너덜지대들이 눈에 뜨인다. 아이들을 동반한 일본 산책객들 그리고 젊은 트래커들이 유장하게 아름다운 강변길을 걷고 있다.

신무라바시를 지나고

강 건너 암봉

강변길
10시 26분, 요오코 산장(橫尾 1,620m)에 도착한다. 가미코지와 야리가다케의 중간지점이다. 이제까지 11Km를 걸어왔고, 야리가다케까지는 11Km를 더 가야한다. 왼쪽에 보이는 멋진 요오코 대교를 건너면 가라사와 휴테로 가는 길이고 야리가다케는 직진이다. 북 알프스 종주코스가 한눈에 들어오게 표시된 ‘요오코 야영장 부근 안내’가 눈길을 끈다.

요오코 산장

요오코 대교

이정표

요오코야영장 부근 안내도 1

안내도 2
요오코 산장 주변을 둘러보고, 잠시 화장실에 들른 후, 점심식사를 하기로 한 야리사와 롯지(槍澤1,850m)로 향한다. 화장실 입구에 화장실 관리에 비용이 많이 드니, 이용자들이 100옌 정도씩 협조를 해달라는 안내문이 있지만, 일본인들도 협조를 않는 것 같아, 나도 그냥 묵살한다.
일본의 숲은 우리나라 숲보다 훨씬 습기가 많아 보인다. 고색창연한 느낌이 드는 숲길을 걷는다. 앞장서서 걷는 일본인 젊은 남녀의 발걸음이 내 걸음 속도와 비슷하여 한동안 이들 뒤를 따른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줄을 서고, 푸른 산죽이 청정하다. 아름다운 숲이다.

습기 많은 일본의 숲

그 숲속을 일본인 젊은이들이 산책하듯 여유 있게 걷는다.

산죽 밭도 지나고
이윽고 숲을 벗어나 개울가로 나온다. 투명하게 맑은 물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흐른다. 다리를 건너 추색이 완연한 계곡을 따라 오른다. 12시 12분, 야리사와 롯지에 도착하여 배낭에서 도시락을 꺼내 점심식사를 한다. 일본에는 ‘산장’의 표현이 다양하다. 산소우(山莊), 규모가 좀 작다 싶으면 고야(小屋), 영어의 롯지, 독일어인 휴테 등이 그것이다. 싸늘하게 식은 도시락에 국물도 없으니 식욕이 날 리가 없다. 억지로 반쯤 먹지만, 또 남은 쓰레기 처치가 문제다. 이 쓰레기는 이틀 후 가미코지로 내려올 때까지 지고 다닌다. 롯지에 1,000옌 하는 소고기 덥밥, 카레 등이 있는데, 왜 가이드가 도시락을 준비했는지 알 수가 없다.

맑은 개울

단풍이 고운 개울가를 걷고

앞산의 노란 단풍을 즐긴다.
식사를 마치고 한동안 휴식을 취한 후, 1시 정각에 롯지를 출발한다. 이곳의 고도가 1,820m, 야리가다케 산장이 3,060m 높이에 있으니, 이제부터 1,240m의 고도차를 극복하며, 약 6Km의 험난한 구간을 가야한다. 바위가 무너져 내린 너덜을 오르고, 왼쪽에 보이는 하얀 동그라미를 따라 작은 외나무다리를 건넌다.

너덜을 지나 왼쪽 숲길로
1시 36분, 고도 1,990m인 바바다이라 캠핑장을 지난다. 이정표는 야리가다케까지의 거리가 5Km라고 알려준다. 점심식사를 하고 천천히 걸어서일까? 앞선 우리일행은 보이지도 않는다. 눈앞에 보이는 깍아 지른 절벽들이 가히 위압적이다.

바바다이라 캠핑 장

이정표
계곡을 따라 돌 많은 등산로가 이어진다. 아마도 우리일행은 캠핑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던 모양이다. 돌길을 걷는 일행의 뒷모습이 보인다. 계곡 군데군데에는 녹다 남은 눈이 두꺼운 얼음 층을 이루고 있다, 이윽고 등산로는 계곡을 버리고 산 사면을 오르며 고도를 높이고, 고도가 높아질수록 양쪽 산사면의 단풍이 곱다.

일행들 뒷모습이 보이고

계곡에 남은 설잔(雪殘)

등산로는 계곡을 버리고 산 사면으로 들어서고

산 사면의 단풍
너덜길을 걸어 삼면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너른 협곡에 접근하여, 사면길을 따라 타고 안으로 들어서자, 절벽에서 굴러 떨어진 부서진 바윗돌로 가득한 협곡 속에, 오색단풍으로 곱게 치장을 하고, 의연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그마한 구릉이 눈길을 끈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한 폭의 그림이다.

삼면의 절벽으로 둘러싸인 협곡으로 들어서고

협곡 속의 꽃 밭
고도가 높아지며 이따금씩 가볍게 비를 뿌린다. 방수복을 꺼내 입을 정도는 아닐 것 같아, 잠시 비를 맞고 걷다보면, 이내 비가 그친다. 뒤를 돌아보면 이제 제법 많이 올라왔음을 알 수 있겠다. 주위 풍광에 취하고 고도가 높아지자 발걸음이 점점 늦어진다. 늦어지면 어떠랴? 오늘은 어차피 야리가다케 산장에서 묵을 건데...저 앞 멀리 우리 일행의 뒷모습이 보인다.

뒤돌아 본 지나온 계곡

뒤돌아 당겨 찍은 왼쪽 절벽

저 앞 멀리 우리 일행의 뒷모습이 보인다.
다시 뒤를 돌아본다. 흰 구름 한줄기가 계곡을 따라 들어오다 왼쪽 절벽에 걸려 있는 모습이 처연하다. 너덜길이 오른쪽으로 굽어지며, 병풍처럼 솟아 있는 암벽을 비켜간다. 2시 24분, 고도 2,348m인 텐구바라분기점을 지난다. 야리사와분기점에서 약 2Km 떨어진 이곳까지 오는데 2시간 24분이 걸렸다. 보통 2시간 걸린다는 곳이니 그렇게 많이 늦지는 않은 셈이다.

뒤돌아본 지나온 계곡

계속되는 너덜길

텐구바라 분기점
본격적인 오름길이 시작된다. 가미코지를 떠난 지 7시간이 가까운 시각이다. 몸도 지치기 시작하는데, 경사는 급하고, 고도마저 높으니 다리가 천근이다.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앞선 우리일행은 어디까지 갔을까? 일순 궁금한 생각이 들지만, 말 할 수 없이 아름다운 주위 경관에 시선을 빼앗겨 이내 무념무상의 경지로 빠져든다. 오른쪽 저 끝으로 날카로운 암릉이 모습을 보인다. 아마도 그 암릉 가까이에 접근하면 창끝같이 뾰족한 야리가다케가 보일 것이다. 또 한 차례 빗줄기가 흩날리는 너덜길을 터덜터덜 걷는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너덜길 주변풍광 1

주변풍광 2

주변풍광 3

주변풍광 4

주변풍광 5
한 시간 전에 멀리 보았던 날카로운 암릉에 접근하고, 10여분 쯤 더 오르자, 보라! 정면으로 야리가다케 산장이 성냥갑처럼 보이고, 그 오른쪽으로 야리가다케가 흰 구름을 걷어내며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는가?

암릉에 접근

보라! 흰 구름을 걷어내고 있는 야리가다케
4시 57분, 이정표가 있는 휴테 오야리(大槍) 갈림길을 지난다. 이정표는 야리가다케까지의 거리가 아직 1.25,km 남았다고 알려준다. 이지점의 고도는 약 2,730m정도다. 머리에 구름을 이고 있는 야리가다케가 노을 속에서 불타는 것 같다. 조금 더 오르다 뒤를 돌아보니, 이정표가 십자가처럼 보이고, 흰 구름이 계곡으로 몰려 들어오고 있다

머리에 구름을 이고 있는 야리가다케

뒤 돌아본 계곡
5시 4분, 홀연히 구름이 걷히고, 석양 속에 야리가다케가 신비로운 모습을 보인다. 한동안 걸음을 멈추고 넑을 잃고 바라본다. 5시 6분, 반류굴(播隆窟)를 지난다. 최초로 야리가다케에 오른 사람은 산악인이 아닌, 반류스님이라고 한다. 스님은 다섯 차례나 야리가다케에 오르고, 네 번째 오를 때는 이 굴에서 53일 동안이나 염불을 외며 수도를 했다고 한다.

홀연히 모습을 보이는 야리가다케

반류굴

안내문
반류굴을 지나자, 정면의 야리가다케가 더욱 뚜렷이 다가오고, 왼쪽으로 거대한 병풍바위가 보이는데, 그 아래에는 한여름을 지내고도 녹지 않고 남아 있는 운동장 크기 만한 설잔(雪殘)이 하얗다. 5시 30분이 지나자 어둠이 서서히 내리기 시작한다. 야리가다케가 어둠속에 실루엣만 보이고, 산장의 불빛이 반짝인다. 5시 53분, 이정표가 있는 셋쇼(殺生) 휴테 갈림길을 지난다. 아직도 야리가다케 산장까지는 1Km가 남았다.

병풍바위와 설잔

어둠 속의 야리가다케

셋쇼 분기점 이정표
해가 떨어지자 바람이 일고 갑자기 추워진다. 북 알프스에서 조난당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갑작스런 기후변화에 따른 저 체온증으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바 있다. 서둘러 배낭에서 고어텍스 재킷을 꺼내 입고, 그 위에 다시 바람막이를 껴입은 후, 모자 위로 후드를 뒤집어쓴다. 사방이 어둑해지자, 너덜길이 더욱 조심스럽다.
여섯시가 넘자 완전히 깜깜해진다. 갑자기 오른쪽 어둠 속에서 불쑥 사람의 모습이 나타난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우리 일행 중의 한사람이다. 같이 오르던 동료가 너덜길에서 넘어져 다리를 다쳐, 겨우 셋쇼 휴테에 데려다 주고, 가이드에게 상황을 알리러, 야리가다케 산장으로 가는 길인데, 다행히 나를 만났다며, 다리 다친 동료를 혼자 둘 수 없어 자기도 셋쇼 휴테에서 잘 터이니, 가이드에게 전해달라고 부탁을 한다. 많이 다쳤느냐고 걱정을 하니, 뼈는 다치지 않았지만 처음에는 출혈이 심해 걱정을 했지만, 지금은 지혈이 됐다고 한다.
그 양반은 다시 셋쇼 휴테로 돌아서고, 나는 손전등을 꺼내 발밑을 비추며 조심스럽게 너덜 위를 걷는다. 30여분 정도 더 올랐을 때 어둠 속에서 마주 내려오는 사람이 있다. 정 가이드다. 세 사람은 6시경, 산장에 도착하고, 10분 쯤 후에 또 한 사람이 도착했지만, 기다려도 세 사람이 모습을 보이지 않아 찾아 내려오는 길이라고 한다.
가이드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가이드는 셋쇼 휴테로 향하고, 나는 7시가 넘어 산장에 도착한다. 따듯한 산장 안으로 들어서니 온몸이 떨리고 몹시 춥게 느껴진다. 저 체온증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는 이야기가 피부에 와 닫는 느낌이다.

야리가다케 산장 -문 닫힌 접수처
7시 20분 경, 가이드가 모습을 보인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식사를 한 터이라, 따끈한 정종을 반주로, 가이드와 함께 산장의 제대로 된 식사를 하자 비로소 몸이 풀리며 피로가 가시는 느낌이다.
(2012. 10.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