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기

이중섭, 백년의 신화

Urimahn 2016. 10. 19. 18:06

 

  안내 포스터

 

이중섭(1916~1956) 탄생, 100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이 201663일부터 10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렸다. 1년여의 준비를 거쳐, 뉴욕 현대 미술관(MoMA) 소장의 은지화(銀紙畵)로 부터 개인 소장가들의 애장품들까지, 200여점의 작품들을 모으고, 많은 귀중한 관련 자료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하여, 25만이 넘는 관람객들이 참관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덕수궁 관

 

이중섭1916년 평안남도 평원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평양, 정주, 도쿄에서 학업을 쌓는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화가 활동을 시작하고, 함경남도 원산으로 돌아온 후 해방을 맞는다. 한국전쟁으로 제주도, 부산 등지에서 피란생활을 하고, 전쟁 직후에는 통영, 서울, 대구 등지를 전전하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하다가 19564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식민지, 전쟁, 분단 등으로 얼룩진 한국의 근대사를 관통하면서도 이중섭은 끈질기게 '예술가'로서의 삶을 고집한다. 일제강점기에도 민족의 상징인 ''를 서슴없이 그렸고, 한없이 암울한 현실을 자조하는 그림을 남기기도 한다. 가난한 피란시절에도 가족과 행복한 시절을 보내며, 순진무구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가 하면, 전쟁 후에는 강렬한 의지와 자신감으로 힘찬 황소작품들을 쏟아낸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감정표현에 충실한 '정직한 화공'이 되고자 했고, 한국의 전통미가 발현된 '민족의 화가'가 되기를 소원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진 후, 사기로 인한 빚에 시달리고, 생활고 속에서 '거식증'을 동반한 정신적 질환으로 불행한 말년을 보낸다. 결국 쓸쓸하고 애잔한 작품들을 뒤로 한 채 홀로 생을 마감한다.

 

이중섭은 화가로 화려한 삶을 누리지 못했지만 사후(死後)서양회화의 기초 위에 동양의 미학을 실현시킨 화가라는 평가를 받고, ‘국민화가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정부는 19581020, 고 이중섭 화백에게 문화훈장(文化勳章)을 추서(追敍)했다.

 

  자화상(1955)

 

1955년 밀항을 해서라도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가겠다는 계획이 실패하자, 이중섭은 자포자기에 빠져 그림도 그리지 않고, 밥도 먹지 않겠다고 한다. 주위에서 그를 정신 이상자라고 수군거리자, 이중섭은 전람회를 열기위해 대구에 와 있던 친구에게 자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린 자화상이다

 

1916-50/평원, 평양, 정주, 도쿄, 원산-화가가 된 중섭

 

이중섭은 19169월 평안남도 평원군 주운면 송천리 부농(富農)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5세 때 아버지(李熙周)가 별세하자, 외가가 있는 평양의 종로보통학교에서 수학한다. 이후 1930년 정주의 민족사관학교인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예일대학교 출신의 미술교사 임용련(1901~?)의 지도를 받으며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시작한다.

 

이중섭이 오산고등보통학교에 다닐 때 일제(日帝)의 한글말살정책에 반발하여 한글자모(字母)로 회화적 콤퍼지션(composition)을 많이 그렸으며,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는 작품에 풀어쓰기 한글(ㅈㅜoㅅㅓㅂ) 외에 영문이나 다른 글로 서명을 한 일이 전혀 없다.

 

1936년 일본 도쿄의 제국미술학교를 거쳐 1937~1941'문화학원'에서 유학했는데, 문화학원은 당시 일본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분위기의 사립학교였다. 문화학원의 선배들도 적극 참여했던 자유미술가협회(1940년 이후 미술창작가협회로 개칭)’에서 작품 발표를 시작해서 일본의 주요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며, 협회의 회원 자격을 얻는다.

 

1941년에는 도쿄에서 이쾌대, 진환, 최재덕, 김종찬 등과 함께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여 전시를 열었고, 미술계로부터 상당한 주목을 받는다. 1943년 태평양전쟁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가족들이 있던 원산으로 귀국하였으며, 19455월 해방 직전 문화학원의 후배였던 야마모토 마사코와 원산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 1941, 종이에 연필, 23.5 x 26.6cm

 

이 자그마한 연필화는 마치 습작처럼 보이지만, 매우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화면 왼쪽에 두 앞발이 희미하게 그려진 것은 실수로 그렸다 지운 흔적이 아니라, 바로 구부리고 있는 저 앞발의 다음 동작을 예시한 것이다. 즉 이 연필화는 두 개의 시간대를 합성한 것이다.

 

이 소는 식민치하의 조선인, 그리고 이중섭 자신의 자화상이다. 이 소의 슬프고도 힘찬 기운을 알아차린 일본의 평론가는 이중섭의 작품은 작지만 오히려 강력한 메시지를 지녔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 누은 여자> 1941, 마사꼬 여사

 

이중섭이 일본 유학 시절 만나 평생 배필로 삼은 여인, ‘남쪽에서 온 덕()’이라 하여 이남덕이라 이름 붙여주고 눈감는 날까지 사랑했던 여인이다.

 

  <세 사람> 1945년경, 종이에 연필, 18.2 x 28cm

 

엎드리고, 쪼그리고, 드러누운, 각기 다른 자세를 한 세 인물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세 사람의 표정이 몹시 우울하다. 이 작품은 이중섭이 1943년 귀국하여 원산에 머무를 때 제작된 것이다.

 

1950-53/서귀포, 부산-전쟁 속에 피어난 예술

 

195012월 원산폭격을 피해 어머니를 남겨둔 채 아내 및 두 아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을 내려온다. 이때 그 이전까지 제작한 작품을 모두 어머니 품에 남겨놓고 오는 바람에, 이중섭의 1950년 이전 작품은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피난지 부산이 너무 비좁았던 관계로 1951년 제주도 서귀포로 거처를 옮기고, 피난민에게 주는 배급과 고구마로 연명하며, 해변에서 작은 를 수없이 잡아 반찬으로 먹는다. 그래서 이중섭은 게에게 미안하여 게를 그린다고 말한다. 제주도에서 약 1년 동안 가족들과 가난하지만 행복한 피란생활을 한다.

 

195112월 부산으로 돌아와 판잣집 단칸방에서 가난한 생활을 이어간다. 이중섭 아내는 참담한 생활고로 영양실조가 된 자식들을 위해, 두 아들과 함께 부산의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19527, 3차 일본인 송환선을 타고 동경 친정으로 건너간다. 홀로 남은 이중섭은 작품 활동과 전시회 참가, 잡지 삽화나 도서표지화 그리기 등을 계속한다. 그러나 부산에서 제작된 수많은 작품이 대화재로 불타서 대부분 없어진 것으로 전한다.

 

 <섭섬이 보이는 풍경> 1951년 나무판에 유채

 

피난 중에 잠시 머물렀던 제주도 서귀포에서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매우 적막하고 조금은 쓸쓸해 보여, 그의 여느 그림과는 사뭇 필치나 화법이 다르다. 아마도 아내는 생계를 위해 일을 하러 나가고, 그는 아이들과 하루를 보내면서 그림을 그렸기에, 여러 화법들을 시험해 보면서도 편치 않은 작가의 마음이 색조와 필치로 나타난 것 같다.

 

  <바닷가의 아이들> 1952~53년 종이에 연필, 유채,

 

천진난만한 아이들, 뛰어 노는 물고기, 자그마한 조각배, 까마득한 수평선, 이글거리는 태양... 이 모든 그림의 소재들이 단순한 선들만으로 충분히 완벽하고 풍요롭게 그려졌다. 때로는 물고기가 아이들보다 크고, 배는 아이를 싣지 못할 만큼 작지만, 등장하는 모든 요소들이 서로 엉키고 한데 어울려 지극히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 있다. 보는 이를 미소 짓게 하는 이 작품이 한국 전쟁의 틈바구니 속 피란지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이 놀랍다.

 

이중섭의 작품은 의외로 매우 단색조이다. 지극히 제한된 색채를 쓰되, 화면 위에 덧칠을 반복함으로써 아래의 물감 층이 언뜻언뜻 내비치는 효과를 사용한다. ‘보다 을 더욱 강조하는 그의 작품은, ‘선조(線條)’를 중시했던 한국의 전통미학을 유화에 적용해보려는 시도로 보인다.

 

  < 물고기와 아이들> 52~53년, 종이에 잉크 유채, 27 x 39.5cm

 

세 명의 어린이가 각자의 물고기를 안거나 타고서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문 채 연결되어 있다. 물고기는 전통적으로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데, 이 물고기들을 안고 있는 천진한 아이들의 모습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아무런 걱정도 재앙도 없는 세계다. 태양에 그을린 듯 붉은 색조를 띈 아이들은 초록빛의 물고기와 보색을 이룸으로써, 화면에 강렬하고 싱싱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화면 아래 대향이라는 사인은 이중섭의 어머니가 지어준 호로, ‘큰 고향이라는 뜻이다. 이 호는 주로 이중섭의 초기 작품에 나타나기 때문에, 작품의 제작시기를 1950년대 초로 추정한다.

 

 욕지도 풍경 1953

 

작가는 통영에 있는 욕지도의 풍경을 담으면서, 바닷가 절벽 위에서도 꿋꿋하게 자라는 나무를 클로즈업하고,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바위 표면을 강조한다. 나무, 바위, 바다 등 모든 소재들이 합창을 하듯 통일된 붓질로 넘실대고 있다.

   

1953-54/통영-''의 걸음으로

 

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전쟁 직후 19546월경까지 공예가 유강열(1920-76)의 주선으로 통영 나전칠기 기술원 양성소에서 강사로 재직하면서,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의욕적인 작품 활동을 계속한다. 아름다운 통영의 풍경을 그린 유화작품이나 유명한 '' 연작들이 이 때 제작되었다. 이중섭의 개인전이 최초로 열리기도 했고, <4인 전>에 참여하는 등 본격적으로 화가의 경력을 쌓아갔다.

<부부> 1953 종이에 유채, 51.5 x 31.5cm

 

부부의 재회를 춤추는 한 쌍의 새로 표현했다. 애절한 개인사가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이중섭의 전통에 심취한 조형실험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분명 종이 위에 그린 유화인데 마치 점돌 위에 그린 듯 질감이 텁텁하다. 빛바랜 듯한 색감을 표현하려 물감을 두껍게 몇 겹씩 바르고 충분히 말린 다음 긁어낸 흔적도 보인다. 오래된 고분 벽화의 일부를 뚝 떼어 박물관에 진열한 것만 같다.

 

   <황소> 53~54년 종이에 유채, 32.5 x 49.5cm

 

황소가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울부짖는 한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포효하는 듯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에 강렬한 기운이 가득하다. 마치 서예의 필체를 연상시키는 검은 선들이 황소의 깊이 패인 주름을 형성하고, 지나온 인고의 세월을 증명하고 있지만, 커다란 눈만큼은 여전히 순한 모습으로 선한 품성을 반영하고 있다.

 

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조선인에게는 인내와 끈기의 상징, 즉 조선인의 상징이었다. 전쟁직후 1954년경 이중섭은 비록 가족과는 이별한 상태였지만 곧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은 채, 통영에서 부호들의 후원을 받으며 최고의 작품들을 제작하고 있었다. 이 때 제작된 이중섭의 <황소>는 그 어떤 다른 소들보다도 특별히 강력한 기운을 발산한다.

 

소 그림을 많이 그렸던 이중섭이 풀밭에 매어놓은 소()를 하루 종일 관찰하다 소 주인으로부터 소도둑으로 경찰서에 고발당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달과 까마귀> 1954, 29 x 41.5cm

 

달을 배경으로 모여드는 까마귀들은 서로를 반기는 것처럼 느껴진다. 서로를 의지하며 아껴주는 모습이다. 이런 가족과도 같은 모습은 그가 바라는 꿈이 아니던가?. 그 꿈을 깔끔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흰 소> 1955년 종이에 에나멜 유채, 34.4 x 53.5cm

 

흰 소는 일제 강점기의 조선인의 상징이었다. 흰 옷을 입는 조선인, 인내심과 끈기로 역경 속에서도 묵묵히 삶을 개척하는 조선인에 대한 암호 같은 것이 바로 흰 소였다. 그래서 이중섭은 유독 흰 소를 좋아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결성된 조선인 유학생들의 단체명이 처음에는 백우회였다가, 일본 당국의 탄압으로 명칭을 변경했다고 한다.

 

이 소는 마치 흰 바탕에 으로 그린 듯한 느낌을 준다. 유채물감으로 그렸는데도, 표면의 물기가 완전히 흡수된 동양화와 같은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물기 없는 붓으로 문지르듯이 표현한 동양화의 갈필그림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효과는 서양의 기초에 동양의 기운을 담으려 했던 이중섭의 의도적인 처리기법이다.

 

   <욕지도 풍경> 1953년 종이에 유채, 39.6 x 27.6cm

 

통영항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욕지도(欲知島)라는 섬이 있다. 천황산과 깎아지른 해안절벽이 장관을 이루고, 바닷물이 맑고 깨끗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작가는 이 욕지도의 풍경을 담으면서, 바닷가 절벽 위에서도 꿋꿋하게 자라는 나무를 클로즈업하고,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바위 표면을 강조했다. 나무, 바위, 바다 등 모든 소재들이 합창을 하듯 통일된 붓질로 넘실대고 있다.

 

                                        

           <선착장을 내려다 본 풍경> 1953년 종이에 유채, 40.9 x 28.2cm

 

1950년대 통영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였던 중앙동 일대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선착장의 아름다운 정경을 담은 풍경화다. 전경에는 기와지붕들이 보이고, 화면 중앙에 남망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이어지는데. 저 멀리 아름다운 한려수도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이중섭은 1953년부터 1954년 통영에서 지내며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누린다. 경남도립 나전칠기기술양성소에서 미술 이론과 실기를 가르쳤고, 통영 유지들의 도움으로 개인전, 단체전을 개최하는 등 상당히 좋은 환경 속에서 의욕적인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1954~1955/서울-희망의 노래

 

가족들과는 떨어진 가운데 홀로 서울생활이 시작된다. 누상동, 상수동 등 지인의 집에서 기숙하며, 19551월에 미도파화랑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준비하는데 몰두한다. 아내가 일본에서 책을 사다 한국에서 판매하여 그 차익으로 수익을 내는 사업을 했으나, 중간업자가 돈을 떼먹는 바람에 극심한 빚에 시달리게 된다. 이중섭은 이 빚을 갚고 일본에 있는 가족들과 만나기 위해, 개인전을 통해 작품을 팔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이 전시에서 작품은 약 20점이 팔렸으나, 수금이 되지 않아 곤경에 빠진다.

 

  <길 떠나는 가족> 1954년 종이에 유채, 29.5 x 64.5cm

 

아직은 태양이 완전히 떠오르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 온 가족이 길을 떠나는 장면이다. 누런 소가 끄는 수레에는 엄마와 두 아이가 타고 있고, 아빠는 의기양양한 자세로 한 팔을 치켜든 채 황소를 끌고 있다. 수레 위의 한 아이는 아무 걱정도 없이 새 한 마리와 장난을 치고 있고, 꽃잎들이 축복하듯 이들의 주변을 장식하고 있다. 빛이 화면의 왼쪽에서부터 들어와 이 무리를 비추어줌으로써, 화면 전체는 강렬한 극적 효과를 갖게 된다.

 

              

  

                         

<벚꽃 위의 새> 1954 종이에 유채, 49 x 31.3cm

 

푸른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배경 위로 벚꽃 가지 하나가 화면을 가로 지른다. 마침 벚꽃은 꽉 차게 피어서 눈부시게 화려하다. 이 때 새 한 마리가 날아와 활짝 핀 벚꽃 위로 황급히 내려앉는 바람에, 꽃잎들은 하릴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떨어지는 꽃잎은 바람을 타고 가볍게 흩날린다.

 

이 작품은 지극히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등장하는 소재는 단순하지만, 이들은 모두 저마다의 몫으로 서로서로 호응하며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고 있다. 특별할 것이 전혀 없는 장면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 같다. 초점을 잃은 희뿌연 화면은 마치 꿈속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투계> 1954-55년 종이에 유채, 28.5 x 40.5cm

 

대각선으로 화면을 가르며 닭 두 마리가 싸움을 하고 있다. 오른쪽 위의 붉은 닭이 날아올랐다 방향을 선회하며 공격하고 있고, 왼쪽 아래 푸른 닭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궁지에 몰렸지만, 부리를 쫙 열고 소리를 꽥 질러 필사적으로 응수하고 있다. 대각선 구도, 유려한 선의 흐름, 거친 표면 효과 등은 역동성과 운동감을 표현하기 위한 작가의 새로운 시도이다. 이런 작가의 시도를 통해 과격한 동작이 일어나는 한 순간을 효과적으로 포착하게 된다.

 

먼저 빨강, 파랑, 노랑 등 기본 삼원색으로 기본 형상을 그리고, 그 위에 검은 색을 입힌 후 물감이 마르기 전에 넓은 칼로 긁어내어 작품을 완성하여, 고구려 무덤 벽화에 나타나는 조형적, 색채적 특징을 계승한 것으로 보여 진다. 맨 마지막에는 회색 테두리를 둘러 이 장면이 일어나는 세계와 관객의 세계를 구분 짓는데, 이러한 방식은 이중섭의 다른 작품에도 흔히 등장한다.

 

1955/대구-좌절의 순간들

 

19551, 서울전시에 이어 4월 대구의 미국공보원 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절친했던 시인 구상(1919-2004)의 도움으로 마련된 이 전시회는 서울에서 보다 더 비참한 결과를 가져온다. 이후 '가장(家長)'의 역할을 해내지 못한 채 "예술을 한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무슨 대단한 예술가가 될 것처럼 세상을 속였다고 자책하며, 거식증을 동반한 정신적인 질환에 시달린다. 대구 외곽 왜관에 있던 구상의 집, ‘관수재에 머무르며, 요양생활과 작품제작을 계속한다.

 

  <시인 구상의 가족> 1955, 종이에 연필 유채, 32 x 49.5cm

 

시인 구상의 가족을 그린 작품이다. 구상은 맨발로 쪼그리고 앉아 환한 미소로 세발자전거를 타는 아들과 놀고, 부인과 딸은 그 뒤에 다소곳이 서서 행복한 부자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이중섭은 화면 오른쪽 평상에 앉아서 무표정한 얼굴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이중섭은 일본에 있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수도 없이 자전거를 사 주겠다.’는 편지를 보냈지만 그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하고 있었기에, 자전거를 타고 노는 구상네 부자가 특별히 부러웠을 것이다. 악수하듯이 내민 이중섭의 손이 구상 아들의 손끝에 아슬아슬하게 닿아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중섭은 구상의 아들을 보며, 자신의 아들을 떠올리고 있다.

 

 

1956/서울(정릉) - 마지막 기억

 

병원을 전전하던 이중섭은 195512월경부터 서울의 정릉에서 화가 한묵(1914~), 소설가 박연희(1918~2008), 시인 조영암(1920-?) 등과 함께 생활했다. 이 때 문예지의 삽화를 그리기도 하고, <돌아오지 않는 강> 연작을 포함한 마지막 작품들을 남겼다. 그러나 거식증으로 인한 영양실조, 간장염 등으로 인해 다시 병원생활을 하다가 195696일 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서울 망우리공원에 묘소와 묘비를 마련했다.

 

<나무와 달과 하얀 새> 1956, 종이에 크레파스와 유채, 14.7 x 20.4cm

 

병원을 오가던 그가 안정을 찾아 정릉에 머물던 시기에 그린 작품이다. 추운 겨울날의 나목, , 그리고 나무 위의 새들이 조화를 이루어, 부드럽고 평화로운 느낌을 준다.

 

<돌아오지 않는 강> 연작 1956, 종이에 연필과 유채,

 

이중섭이 화가 한묵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 일이다. 한묵은 <돌아오지 않는 강> 연작이 그려지던 때의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루는 시내에서 돌아와 방문을 여니 신문광고를 잘라 벽에 붙여 놓고 나보고 보라는 듯이 씩 웃고 있었다. 당시 상영 중이던 '돌아오지 않는 강'이라는 영화 제목이었다. 그걸 강조하기 위해 굵은 선으로 테두리를 그려 놨는데 바로 밑에는 아내에게서 온 편지를 잔뜩 붙여 놓았다

 

<돌아오지 않는 강.> 네 개의 연작은 그 구성이 모두 같다. 집 창문에 몸을 기댄 남자와 머리에 무언가를 이고 돌아오는 여자가 대칭적으로 묘사된 구도다. 여인의 표정은 알아볼 수 없는 반면 그림 속 사내는 마치 여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듯 보인다. 기다리는 여인은 어머니일 수도 있고, 마사꼬일 수도 있다. 아니면 두 사람 모두 일수도 있다. 살아생전 다시는 만나볼 수 없는 여인들! 이중섭의 애절한 마음이 가슴에 와 닿는 절필 작이다.

 

엽서화 - 무언의 대화

 

이중섭은 일본 유학기 도쿄의 문화학원에서 후에 아내가 되는 야마모토 마사코를 후배로 처음 만났다. 문화학원을 졸업한 후에도 이중섭은 1943년까지 도쿄에 머무르며 마사코에게 수많은 '그림엽서'를 보냈다. 한 면에는 가득 그림을 그리고, 다른 면에는 오로지 주소만 적혀 있으며, 글은 전혀 없는 '무언의 엽서'들이다.

 

90여점의 엽서화가 알려져 있으며, 그 중 일부가 전시되고 있다. 처음에는 먹지를 대고 선을 그린 후 옅은 색채를 가미한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그림을 그리다가, 점차 자신감과 투지가 불타는 그림으로 발전한다. 엽서화의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두 연인의 사랑이 점차 진전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연애 시절 이중섭과 마사코가 산책하던 중 마사코의 신발 뒤축이 보도블록 사이에 끼면서 발가락을 다쳤다. 이중섭은 그녀의 발을 살피며 어루만지다 손에 피까지 묻었다.

 

이 그림은 그 장면을 포착해 그런 것이다. 거의 모든 요소를 곧은 선으로 처리했다. 상처를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 여자의 발, 남자의 손, 남자의 다른 쪽 팔로 이어진다.  엽서 뒷면에는 속달이라는 소인이 찍혀 있다

 

<마사꼬>

 

엽서 중에 마사코를 그린 그림을 쉽게 찾을 수가 있다. 그림 속 여인의 머리카락은 앞부분이 봉긋하게 말려 올라 가 있다. 이 모습이 마사코 특유의 머리 모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 1941.4.2 종이에 먹지 그림 수채, 14cm*9cm

 

이 그림의 하단에 '마사'라고 일본어가 보인다. 이중섭이 그림의 서명 옆에 제목을 써둔 것이다. '마사'~~마사코의 이름 가운데 '마사'를 일본어 문자 '가타가나'로 쓴 것이다.

 

바로 그 꽃나무의 요정은 야마모토 마사토의 모습이다. 이 엽서를 그려 발송한 42일 수요일은 개학 다음 날로, 꽃으로 뒤덮인 교정을 샅샅이 다녔지만, 이미 학교를 졸업한 마사코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은지화 - 은지에 새긴 영혼

 

은지화는 이중섭이 창안한 새로운 기법의 작품이다. 양담배를 싸는 종이에 입혀진 은박을 새기거나 긁고 그 위에 물감을 바른 후 닦아내면, 긁힌 부분에만 물감자국이 남게 된다. 그렇게 해서 깊이 파인 선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드로잉이 완성되는데, 평면이면서도 층위가 생길 뿐 아니라 반짝이는 표면효과도 특징적이어서 매우 매력적인 작품이 된다. 이러한 기법은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이나 금속공예의 은입사 기법을 연상시킨다. 누구보다 한국의 전통을 존중했던 작가가 의도적으로 전통 기법을 차용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중섭은 상당히 오랜 기간 약 300점의 은지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제주도 서귀포 시절 행복했던 가족들의 모습을 추억하는 것에서부터, 비극적인 사회 상황과 자신의 처참한 현실을 암시하는 내용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장면들이 예리한 칼로 새겨져 있다. 이중섭은 이 은지화들이 후에 벽화를 그리는 밑그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거대한 벽화를 그려서, 예술이 공공장소에서 많은 이에게 향유되는 꿈에 부풀곤 했다.

 

영남대 영문학과 교수(1976-97)인 맥타가트(Arthur McTaggart) 박사는 이중섭이 위대한 화가라는 것을 맨 먼저 알아본 서양인이었다. 그는 이중섭의 은지화(銀紙畵) 석 점을 구입하여 모마(MoMA)’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뉴욕 현대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에 기증했다. 1929년 근대 예술을 미국에 보급할 목적으로 설립된 MoMA는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이중섭의 은지화를 예술성뿐 아니라 소재 사용과 작가의 창의성으로 봐서도 실로 매혹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금번 이중섭 전시회를 위해 MoMA에서 소장하고 있는 은지화들이 바다를 건너 서울에 왔다.

 

<은지화(두 아이)> 연도미상 종이 위에 은지에 새김, 유채, 8.5 x 15cm

 

서로 완전히 끌어안아 일체가 된 두 아이의 모습을 담은 이 작품은 은지화 중 유일하게 화면 위에 대향이라는 호를 새겨 넣었다. 상당히 초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단호한 필선과 강렬한 손의 표현이 두드러진다. 아름다운 장면이면서도 왠지 모를 슬픔과 애절함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신문을 보는 사람들> 1950년대 초반

 

주한 미국 대사관 재무관이었던 아서 맥타가트가 1955년 사서 이듬해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기증한 작품이다. 드물게 제법 또렷하게 채색한 은지화다. 삼각형으로 접힌 선을 신문 돌리는 사람(오른쪽 위)의 팔 윤곽으로 사용하는 등 이중섭은 은박지의 접힌 자국마저도 구도에 활용했다.

 

    <가족에게 둘러싸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 1950년대

 

가족과 함께 살고 싶고, 그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작가의 애절한 심정을 은박지에라도 토해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나 보다.

 

편지 화 -: 사랑의 편린

 

이중섭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7월경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남겨진다. 이후 그는 여러 지역을 정처 없이 떠돌며 가족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낸다. 처음에는 언제든 곧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즐겁고 다정다감한 편지를 많이 썼다. 특히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들을 염려하며, 그림을 곁들인 사랑스러운 편지들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1955년 중반 이후 점차 절망 속으로 빠져들면서 편지를 거의 쓰지 않았으며, 심지어 아내로부터 온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중섭이 보낸 편지들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약 70, 150매에 이른다. 이 중 일부가 여기 전시되고 있다. 이 편지들은 이중섭의 생애와 작품의 관계를 연구하는 근거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록적 가치를 지닐 뿐 아니라, 자유자재의 글씨와 즉흥적인 그림이 어우러져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보기에도 손색이 없다.

 

  <이중섭이 아내에게 쓴 편지> 195411월경

   

당신이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 아고리

머리와 눈이 점점 더 맑아지고, 초롱초롱해져서,

너무도 자신감이 넘치고 또 흘러 넘쳐

번득이는 머리와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리고 또 그리고 표현하고 또 표현하고 있어요.

끝없이 훌륭하고......

끝없이 다정하고......

나만의 아름답고 상냥한 천사여......

더욱더 힘을 내서 더욱더 건강하게 지내줘요.

화공 이중섭은 반드시

가장 사랑하는 현처 남덕씨를 행복한 천사로,

드높고 아름답고 끝없이 넓게 조각해 보이겠어요.

자신만만, 자신만만

나는 우리 가족과 선량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진실로 새로운 표현을, 위대한 표현을 계속할 것이라오.

내 사랑하는 아내 남덕 천사 만세, 만세.

 

195411월경 일본에 있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다. 서울 누상동에서 작업을 하며, 19551월에 있을 개인전 준비에 한창일 때 쓴 것이다.

 

아고(あご)는 일본 말로 이다. 여기에 이중섭의 성 를 합쳐, 만든 아고리는 미사꼬가 이중섭을 부르는 애칭이다.

 

<이중섭이 두 아들에게 쓴 편지> 1954년경

 

태현이에게.

멋진 아들 태현아. 편지 고맙다.

덕분에 아빠는 건강해서 감기도 걸리지 않고,

더욱 더 힘을 내어 열심히 그림을 그린다.

엄마랑 동생이랑 같이 보았던 영화, 재미있었니?

아빠가 나중에 한 달쯤 지나서......도쿄에 가면 꼭 자전거 사줄께.

마음 놓고 건강하게 공부도 열심히,

엄마랑 태성이와 사이좋게 기다리고 있거라.

아빠는 하루 종일 태현이와 태성이와 엄마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구나. 곧 만날 생각을 하니.....아아, 아빠는 너무 즐겁다. 아빠가

 

태성이에게.

용감한 태성이, 잘 지내니? 아빠는 건강하게 그림 잘 그리고 있다.

태성이가 늘 엄마 어깨를 주물러 준다면서?. 정말로 착한 아이로 구나.

아빠는 태성이의 상냥한 그 마음에 감격했어요.

앞으로 한 달만 있으면 아빠가 도쿄에 가서 자전거 사 줄께.

건강하게 엄마랑 태형이 형하고 사이좋게 아빠를 기다리고 있거라.

아빠

 

1954년경 이중섭이 두 아들에게 각각 보낸 편지다. ‘자전거를 사주겠다는 약속은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 수도 없이 등장하지만, 1956년 임종할 때까지 이중섭은 일본에 가지 못했고, 자전거를 사주겠다는 약속도 끝내 지키지 못한다.

 

   <제주도 풍경> 종이에 잉크 35 x 24.5

 

일본에 건너가 헤어져 있는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한 그림이다. 서귀포에서 살 때 반찬으로 무수히 잡아먹은 새끼 게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게를 그렸다고 한다.

 

<가족을 그리는 화가> 1954, 종이에 펜, 채색 26.5 x 20cm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해 보낸 그림이다.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어 꿈에서라도 만나보고 싶은, 아내와 두 아이, 그리고 자신이 얼싸 안고 환하게 웃고 있는 장면을, 마마, 야스가타, 야스나리 라고 부르며, 코믹한 자세로 코믹하게 그리고 있다.

 

1위는 황소아닌 벚꽃 위의 새

 

조선일보 김미리 기자가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을 본 관람객 547명을 대상으로 유화 작품 중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을 설문한 결과를 기사화 한 내용을 옮겨 싣는다.

 

황소, ‘가족도 아니었다. 이중섭 하면 자동 연상되는 황소 그림이나 아이들을 그린 작품을 제치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이 1위를 차지한 건 의외의 결과다. 관객들은 새로운 이중섭의 면모에 감동했다.

 

비취색 은은히 감도는 배경을 벚꽃 가지가 가로지른다. 하얀 새가 가지에 사뿐히 내려앉았지만 만개한 벚꽃은 그 무게를 못 이긴 채 후두둑 낙하한다. 새의 시선이 머문 곳엔 파란 청개구리가, 화면 구석엔 깜짝 놀라 날아가는 노랑나비가 있다. 황소로 대변되는 이중섭의 기운, 생동하는 필획과는 사뭇 다른 보드라운 서정이 보는 이의 마음을 잔잔하게 해준다.

 

2(71)는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돌아오지 않는 강’(1956). 소년이 지친 표정으로 창문에 기대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본다. 집 뒤로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돌아오는 어머니가 보이지만 그 모습은 관객만 볼 수 있을 뿐 소년은 하염없이 어머니를 기다린다. 전쟁으로 북에 남겨두고 온 어머니를 향한 이중섭의 그리움이 짙게 밴 작품이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권덕훈(29)씨는 생의 끝자락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서린 작품이라 그런지 보는 내내 애잔했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이중섭이 가족과 제주도에서 피란 생활을 하면서 단란했던 때를 그린 바닷가의 아이들’(1952~1953)과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한 황소’(1953~1954)가 각각 53표를 얻어 공동 3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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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중섭의 유화가 좋았다. 강렬한 색채와 거칠고 힘찬 톤으로 자신의 감정을 거리낌 없이 분출한 <>, <길 떠나는 가족> 등을 보면서, 반 고호의 그림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번 <이중섭, 반세기의 신화> 전은 파란만장한 그의 생애, 폭 넓은 작품세계, 그리고 부부애와 가족사랑 등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어, 여기저기에서 그에 대한 자료들을 검색해보고, 그 내용을 발췌하여, 블로그에 정리한 것이다. 주로 전시회 안내자료, 靑松 건강칼럼 (521), 긍가 이경남 화가, 그리고 조선일보 김미리 기자의 기사 등에서 자료를 옮긴 것이다.

 

 

 

(2016. 10.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