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생각을 했나?
순례길 6일차, 오늘의 목적지 "에스테야"가 보이는 꽃길을 걷는다. (5/14, 13:17)
산티아고 순례길에 관한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들어왔지만, 나는 기독교신자도 아니고, 또 스페인이라는 나라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하여서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생각이 바뀐 것은, 지난 3월, 7박 8일 일정으로 북 규슈 자유여행을 다녀온 것이 계기가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껏 해외여행은 모두 패키지여행에 의존하다 보니,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여행사가 정한 코스와 일정에 따라야만 하는 것이 아쉬워, 언제고 한번 자유여행을 해보겠다고 정해둔 곳이 가까운 일본의 규슈와 오키나와이다.
일본은 철도가 잘 발달된 나라다. 웬만한 곳은 어디건 기차여행이 가능하고, 재팬 레일패스로, 철도를 이용하여, 일본 각지를 가장 경제적으로 편하게 여행할 수가 있다.
규슈여행도 JR규슈레일패스를 이용하게 되는데 JR규슈레일패스에는 1) 전 규슈(3일 권, 5일 권) 2) 북 규슈(3일 권, 5일 권 3) 남 규슈(3일 권)패스가 있다. 이용자는 지역, 기간, 그리고 가격이 각기 다른 5가지 레일패스 중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것을 골라 이용하도록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외국인들만 이용할 수 있는 이 레일패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용기간이다. 3일 권은 연속 3일 동안, 5일 권은 연속 5일 동안에 사용해야 한다. 규슈로 출장 온 세일즈맨이나 이용하라는 소린가?, 여행 온 외국인은, 3일이나 5일 동안 내내, 다른 구경은 생략한 채, 기차만 타고 다니란 말인가? 규슈레일패스는 여행기간을 3일이나, 5일로 제한하는 것이 문제다.
하여 나는 JR 북 규슈레일패스 5일 권을 10만원에 구입하고, 여행지역을 구마모토 이북의 북 규슈지역으로 한정, 후쿠오카를 제외한 북 규슈 여타지역을 아래와 같이 5일 동안에 둘러보았다.
- 1일 : 하카타-다케오 / 다케오 올레길 걷고 일박
- 2일 : 다케오- 아리타 / 도산신사 방문
아리타- 사세보 / 사세보 사료관, 해군기지 조망, 중심가 둘러보고
사세보- 나카사키 / 데지마, 차이나타운 탐방 후 나카사키 일박
- 3일 : 나카사키 평화공원, 원폭자료관, 구라바엔 탐방 후,
구마모토로 이 동, 수이젠지 조수엔 탐방, 구마모토 일박
- 4일 : 구마모토 성 탐방 후, 버스로 아소로 이동, 멀리 아소산을 바라 본 후,
기차로 벳푸로 이동, 일박
- 5일 : 벳푸, 유휴인 둘러보고 하카타로 이동
이처럼 JR 북 규슈레일패스 5일 권을 완벽하게 사용하고, 후쿠오카지역은 3일 동안 주로 지하철을 이용하여 둘러보고 귀국했다. 나중에 여행기를 정리하면서, 생각을 해 보니, 두 가지 면에서 크게 잘 못된 여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첫 번째 잘못은 규슈전체를 돌아보지 못하고, 북 규슈 탐방에만 그친 점이고, 두 번째 잘못은 여유를 갖고, 볼 것을 보고, 먹을 것 먹으며, 자유롭게 여행을 즐기겠다는 생각과는 달리, 패키지여행보다도 더 타이트하고 빡빡한 여행을 했다는 점이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왜 이런 결과가 나왔나? 일차적은 원인은 JR규슈레일패스 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겠다. 5일 동안에 규슈전체를 둘러보는 것이 불가능하여 남 규슈는 포기하고 북 규슈만 둘러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지나치게 비용효율만을 따지는 내 사고방식에서 비롯한 것이라 하겠다. 기차이용에 사용기간 제한으로 문제가 있으면, 비용은 다소 더 들겠지만, 버스 등 다른 교통수단으로 보완하여, 규슈전체를 여유 있게 돌아볼 생각은 왜 못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면서 반성을 하게 된 것이다.
내일 모래면 8순에 이르는 나이인데도 매사에 여유 없이 사는 자신이 한심스럽다. 여행을 가도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 홀로 떨어져,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집사람은 이런 나를 보고, 본전을 뽑으려고 저런다고 비아냥댄다. 매사에 사전계획을 세우고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마음 상해한다. 성질이 나면 억제하지 못하고 폭발하여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도 한다. 이제는 이런 자신에서 벗어나 여생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은여생은 여유롭고 즐겁게 지내야겠다고 다짐을 한다.
이럴 즈음, 우연히 아래 글을 읽고 공감하며, 순례길에 대한 관심이 새로워져, 김남희 씨의 산티아고 순례길 후기를 읽은 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볼 생각으로 집사람에게 운을 떼니, 집사람은, “나이생각을 생각하라,”며 한마디로 반대한다.
“나이 들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것은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는, 욕심, 시기심, 원망, 불만, 분노, 근심, 걱정, 불안 등을 버리기 위해서 이다.”
집사람을 설득하는 한편, 우선 프랑스 길의 출발지인 생 장 피트포르까지 가기 위한 항공편과 철도편을 예약한다.
- 인천 ~ 파리 : 5월 7일 16:45 인천 출발, 5월 8일 07:05 파리도착
- 파리 ~ 바욘 : 5월 8일 09:52 몽파르나스 출발, 13:37 바욘 도착(TGV)
- 바욘 ~ 생 장 피트포르 : 5월 8일 14:52 바욘 출발, 16:10 생 장 피트포르도착
하지만 출발을 1주일여 남긴 시점에서, 프랑스의 레일파업으로 예약한 철도편의 운행여부가 불확실하다는 소식에 이어, 운행여부가 확인되는 시점은, 현지시간으로, 출발 전날 오후 5시 이후라는 연락을 받는다.
순례길 걷기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철도파업에 대한 걱정으로 좌불안석(坐不安席)하는 나를 보는 아들 녀석은 천하태평이다. “레일파업으로 5월 8일과 9일, 기차가 움직이지 않으면, 그 이틀 동안은 파리를 구경하면서 쉬시고, 5월 10일 기차를 타시면 되는데, 무얼 걱정하느냐? 라는 이야기이다.
듣고 보니, 변경할 수 없는 짜인 스케줄이 있는 것도 아니니, 과연 그렇다. 한 세대 차이인데, 아들 녀석의 생각에는 그 만큼 여유가 있고, 내 생각은 왜 이리 답답한지 모르겠다.
산티아고 순레길을 걷고 나서, 좀 달라졌으면 좋겠다.
(2018. 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