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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임진왜란 비겁한 승리”를 읽고(1)

Urimahn 2022. 2. 27. 10:53

  책표지와 평양성 전투 

 

김연수의 임진왜란 비겁한 승리를 강남전자도서관에서 대출 받은 전자책으로 읽으면서, 당시의 선조와 지금의 문재인이 자꾸 비교가 되어. 황당한 기분에 빠져들고는 했다. 저자는 임진왜란 비겁한 승리는 자랑스러운 역사로 여겨져 온 임진왜란의 어두운 기억을 파헤친 책.”이라고 부연(敷衍)하고 있다. 하여 이런저런 이유로 여러분들에게 이 책의 일독(一讀)을 권한다.

 

저자 김연수는 영남대학교와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한국전력에서 경영, 교육 컨설팅 분야에서 일하다 차장으로 퇴직하고, 이후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인가조선 지식인의 위선이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는 말에 공감하여, 역사 자료를 수집하고 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머리말

 

저자는 책머리에서 사학자 강만길의 말을 빌어, “조선은 임진왜란 때 망했어야 할 나라가 살아남아 이후 300년 동안 백성을 괴롭힌 부도덕하고 무능한 정권이었다며, 임진왜란은 이런 조선이 자초한 민족적 참화였다고 설명하면서, 당시 조선이 안고 있던 문제들이 무엇이었던가를 되돌아 볼 필요에서, 새삼스럽게 임진왜란을 거론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울러 그는 임진왜란의 발생원인과 그 전개과정을 살펴보면서, 실로 터무니없는 일이 발생했다고 개탄한다. 전쟁을 일으킨 임진년 당시 일본의 지배층은 국제정세에 무지한 무장집단으로, 조선과 중국 등 이웃나라의 역사와 문화, 정치와 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지적기반이 없으면서 주제넘게 동아시아일대를 주도하겠다는 꿈을 꾸었다고 질책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초상(사진=두산백과)

 

저자는 조선의 왕 선조는 국가의 위태로움은 내 몰라라하고, 왕권만을 지키려했으며,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하여 국가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한편 당시 동아시아 질서를 주도하던 중국은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왜란이 일어났다고 쓰고 있다.

선조 초상(펌)

 

대비 없이 전쟁을 불러들이는 조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전국(戰國)을 통일하고, 전투금지령을 내려 다이묘들 간의 군사행동을 금지하는 한편, 해적질을 업으로 삼던 왜구를 통일정권의 수군으로 편입시킨다. 아울러 다이묘들의 성곽을 산지에서 평지로 내려오게 하여 성을 방어용에서 거주용으로 바꾸고, 에도, 오사카, 교토, 나가사키 등 주요도시를 직할령으로 만들어 경제적 지배력으로 확대하여, 일본 역사상 하나의 봉건질서로 통합하는 과업을 성취한다.

 

이처럼 국가를 정비하자 도요토미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곧바로 조선과 중국으로 눈을 돌린다. 그에게는 100년간 다져진 상무전통과 수십만의 잘 훈련된 군대가 있었다. 이들을 활용하고, 조선을 앞 세워 명나라를 공격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확신하고, 다이묘들을 설득하여 전쟁을 일으킨다. 도요토미는 휘하 장수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도요토미는 왜란을 일으키기 6년 전부터 수차례 조선 남해안지방을 침범하여 조선해군과 전투를 벌려, 조선의 군사력을 시험하고, 이어 방자한 대마도 도주 귤강광(橘康廣-다치바나 야스히로)를 사신으로 보내 조선을 모욕한다. 대마도 도주 다치바나 야스히로에 관해서는 조선도 이미 그 신분이나 인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일개 무부(武夫)였다고 한다.

 

일본은 방자한 사신의 목을 베지 못한 조선을 보며, 조선이 속으로 일본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보았을 것이라고 저자는 쓰고 있다. 일본으로 돌아간 사신 다치바나 야스히로는 곧바로 살해되었다.

 

다치바나 야스히로가 사신으로 오고 간 다음, 1년도 지나지 않아, 일본은 다시 조선에 사신을 보내는데, 이 사신단에 정보 수집력과 분석력을 갖춘 유능한 현소(玄蘇-겐소)와 평의지(平義智-히라요시)를 회계사로 포함시켜 파견하고, 대마도 영주 종의지를 신분을 속인 채 부사로 파견하여. 1년 동안 조선에 머물게 한다. 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의 일이다.

 

일본은 이처럼 조선의 군사력을 시험하고, 일개 무부인 다치바나 야스히로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조선 조정을 모욕하면서, 조선의 반응을 살핀 후, 현소와 평의지를 사신단에 포함시켜 조선을 염탐하는 한편, 대마도 도주 종의지를 통해 일본의 의도를 은밀히 조선에 알리며 협상을 이끌려했으나, 양국의 시각이 너무나 달라,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고 기술한다.

 

일본이 3년에 걸쳐 여러 차례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자, 조선은 이에 응해, 일본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1950년 파견을 결정한다. 그런데 사신의 파견을 그토록 요청하던 일본은 조선 통신사가 일본 땅에 도착하자 태도를 바꾸어 통신사 일행을 외교적, 인격적으로 모욕하기 시작한다.

 

조선통신사가 교토에 도착하고 몇 달이 지나도록 도요토미는 조선의 국서를 받지도, 통신사를 만나지도 않았다.

 

일본에 건너간 조선통신사는 일본이 왜 자신들을 불러들였는지 그 이유조차 끝내 알지 못한 채 1591128일 교토에서 귀환하는데, 떠나는 날이 됐는데도 일본은 답서를 주지 않더니, 겨우 사신단이 조선으로 돌아갈 배를 기다리고 있던 바닷가에서 일본의 답서를 전달한다. 헌데 도요토미가 보낸 국서내용이 놀랍게도 선전포고가 아닌가?

 

통신정사 황윤길, 통신부사 김성일이 조선을 침략하겠다는 명백한 위협을 담고 있는 히데요시의 답서를 들고 일본에서 돌아온 것은 선조 243,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이다. 히데요시는 명을 치겠다며 조선이 그 선봉에 서라고 조선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조선은 바로 전쟁준비를 서둘러 적어도 10만의 병력을 길렀어야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적어도 연간 50만석의 비용이 필요했다고 한다. 당시 중앙조정의 공식적인 1년 예산이 10만 석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평소 비상시를 대비한 비축이 없었으니 갑자기 이 막대한 재원을 감당할 도리가 없어, 조선 조정은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왜란을 맞게 된 것이다.

 

임진년의 패주

 

임진년(1592) 413, 조선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적군을 맞았다. 부산 앞 바다에는 척후선도 없었다. 조선 땅 어디에도 적을 맞아 싸울 준비가 된 군사는 없었다. 일선에는 전쟁을 지휘할 장수가 없었고, 조정에는 나라의 역량을 모아 전쟁을 책임지고 수행할 전략가가 없었다.

부산진 순절도(펌)

 

아무런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일본군을 맞은 조선군은 달아나기에 바빴다. 일본군의 침입소식이 서울에 처음 알려진 것은 417일 이른 아침이었는데, 임금에게 보고 한 것은 17일 오후 4시가 넘어서였다. 궁궐 깊은 곳에 있던 임금에게 대신들의 면대가 곧바로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정은 17일 이일(李鎰)을 경상도 순변사로 삼고, 성응길(成應吉)과 조경(趙儆)을 좌우방어사로 삼아 세 갈래로 왜군에 대비케 하고, 별동대로 죽령과 새재를 지키게 했다. 장수들은 사경(四更- 새벽 1시에서 3시 사이)에 대궐을 나섰다. 휘하 군관들은 모두 각자가 선택하게 하였다. 그런데 순변사로 임명되어 즉시 경상도로 내려갔어야 할 이일은 그 뒤로 3일이 지나도록 서울을 떠나지 못했다. 데리고 갈 수 있는 병사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이 보유한 최정예부대를 이끌고 신립이 충주에 도착한 것은 426일이었다. 장수들은 모두 조령을 지키자고 했으나 신립은, “적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판에서 맞아 기병으로 짓밟으면 이기지 못할 리 없다.” 라고 주장하며 남한강을 등지고 배수진을 쳤다.

충주 탄금대전투

 

일본 조총의 위력을 몰랐던 신립은 조선군 최후의 병력과 최정예 장교단을 한 순간에 전멸시키고 말았다.

 

신립의 패전 소식이 서울에 전해진 것은 418, 서울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선조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창덕궁으로 신하들을 불러들였다. 대책은 오직 하나, 임금의 파천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신하들 중 어느 누구도 먼저 파천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임금으로서는 답답한 노릇이었다.

파천 발의

 

조정 신료들은 파천(播遷)을 입에 올려 비루한 선비로 비난 받는 것은 그들이 목숨처럼 떠받들어온 춘추대의와 천하의 명분을 거스르는 일이었다. 그들은 목 놓아 통곡하며 도성을 사수하자며 임금을 압박했다. 결국 선조는 얼굴빛이 변하여 내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 논의의 물꼬를 틑 사람은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였다. 그는 엣날에도 파천한 사례가 있다.”며 임금의 파천제안에 간접적으로나마 먼저 동의를 표명한 것이다.

 

그러자 모두 웅성거리며 이산해를 비난했다. 사헌부, 사간원이 즉각 들고 일어나 이산해의 파면을 청했다. 이처럼 파천에 대한 책임을 영상 이산해에 슬 쩍 뒤집어씌우고 나서, 그들은 태도를 바꾸어 파천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에 들어갔다.

 

어쨌든 어가파천은 이렇게 결정이 되었다. 이때 선조가 도망하지 않고, 서울 도성에서 농성하며 일본군과 최후의 승부를 겨루었다면 그것은 일본이 바라던 전격전(電擊戰)으로 조선은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죽어나는 백성들

 

결국 왕의 도망은 의병이 활동할 시간을 주었고, 이순신이 활약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으며, 중국이 개입하여 전황을 변화시킬 게기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왕의 비겁함이 조선을 구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이제 전쟁은 일본이 의도했던 전격전에서 장기전, 국제전으로 변한 것이다.

 

 

(2021. 4.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