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대교와 울돌목

 

2020112()

강남구청역에서 612분에 출발하는 분당선 하행열차를 타려고, 새벽 6시에 집을 나선다. 김 사장과 정자역 4번 출구에서 7시에 만나기로 했으니, 열차가 예정대로 정자역에 650분에 도착하면, 10분 정도 여유가 있다.

   이른 시간인데도 생각 보다 많은 사람들이 지하철을 이용하고 있다.

 

4번 출구로 나와 2~3분이 지나자, 김 사장의 구형 그랜저가 모습을 보인다. 20년이 훌쩍 넘은 오래된 차이지만, 운전을 좋아하고, 차를 아끼는 김 사장이 관리를 잘해서 아직도 깔끔하다.

 

차에 올라, “차 깨끗하네.” 라고 했더니, 이 친구, “귀한 손님들을 모라고 엊저녁 하늘이 세차를 해준 덕이지.”라고 익살을 떤다.

 

다음 행선지는 기흥 경전철 역 6번 출구다. 그 곳에서 용인에서 살고 있는 정 사장을 717분에 픽업하기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운전의 달인인 김 사장도 기흥 경전철 역은 처음이다 보니, 6번 출구와는 반대쪽인 8번 출구에 차를 대고 정 사장을 찾으니 보일 리가 있겠는가?

용인 경전철 기흥역()

 

한동안 전화로 승강이질 끝에 복잡한 4거리에서 유턴한 후, 6번 출구에 도착하여, 720분 경, 정 사장을 픽업하고, 차가 다소 밀리는 중부대로를 지나 경부고속도로 진입한다. 이어 안성휴게소에서 안성국밥으로 아침식사 한다.

  기흥역 출구 배치도

 

잔뜩 흐린 날씨, 고속도로에는 생각보다 차가 많고, 안성휴게소에도 제법 사람들로 북적인다. 김 사장 말로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집에만 묶여있던 많은 사람들이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 대신, 승용차를 몰고 나왔기 때문에 차들이 많은 거고, 방역조치를 철저히 취하고 있는 휴게소에 안심하고 사람들이 몰린 것이라고 한다.

  안성국밥

 

오늘은 남해의 다랭이마을과 미국마을, 그리고 상주 은모래해변을 거쳐 독일마을에서 1박 하는 타이트한 일정이다. 하여 어쩔 수없이 늙은이들이 새벽부터 서두른 것이다. 이어 김 사장은 천안-논산 고속도로로 바꿔 타고 일로 남으로 남으로 달린다.

  동영상

 

늙은이들이라 자주 휴게소에 들러야한다. 그래도 다음 휴게소까지 참을 수 없을 경우에는, 졸음방지 쉼터 화장실을 이용한다. 1245분 경 남해대교를 건너, 곰바우 횟집에 도착하여 점심식사를 한다.

   남해대교를 건너고

 

 곰바우 횟집

 

 곰바우 횟집 메뉴

 

제법 규모가 큰 횟집이다. 집 앞에 차를 세우자, 아주머니 한분이 반갑게 뛰어나와 안내를 한다. 텅 빈 식당, 손님이 한 사람도 없다. 코로나 바이러스 세계적 유행의 피해현장이 적나라하게 눈앞에 펼쳐진 모습을 보니 기가 막혀 할 말을 잃는다.

 

하지만 텅 빈 식당을 혼자 지키고 있는 아주머니는 여전히 친절하고 자상하다. 멸치쌈밥 스페셜정식을 주문하고 싶은데, 늙은이들이 되다보니 먹는 량이 많지 않고, 일행 중 한 사람은 날 음식을 먹지 못하기 때문에 멸치쌈밥 스페셜 2인분에 추가로 밥한 공기만을 주문해도 되겠냐고 물으니, 아주머니는 당연히 준비해 드리겠다며 웃는다.

 

정 사장은 술을 마시지 않고, 운전을 하는 김 사장도 술 한 방울이라도 마시면 절대로 운전대를 잡지 않는 사람이다 보니, 내 혼자만 술을 주문할 수 도 없는 터라, 200CC 소주병에 내가 좋아하는 백세주를 담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음식이 나오기 전에 반주용으로 100CC 정도를 슬그머니 마신다. 언제 이런 모습을 보았는지, 아주머니가 말없이 소주잔을 가져다준다. 두 사람이 술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술 주문도 못했다고 미안해하자, 아주머니는 말없이 웃는다.

 

멸치 쌈밥은 남해고유의 레시피(resipe). 여기에 회 무침이 함께 나오니 말 그대로 스페셜정식이다. 모처럼 남해 고유의 맛을 즐기고 식당을 나와 노량대교 아래 울둘목(명량해협)을 둘러본다.

   명량해협

 

원균과 윤두수를 비롯한 일부 서인들의 모함을 받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서 파직당한 뒤 원균이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 칠천량 해전에서 대부분의 전선을 잃고,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 장수들과 1만 여명의 병사들이 전사하는 참패로 조선수군은 제해권을 상실한다. 원균은 육지로 탈출하였으나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하고, 경상우수사 배설만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남해 쪽으로 후퇴한다.

 

선조(宣祖)는 어쩔 수 없이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을 통제사로 임명하고, 이름만 남은 해군을 육군에 복속시키려 하자, 이순신은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 수군폐지불가론을 펼친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나이다. 죽을 힘을 다해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비록 전선의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을 박멸하고 제해권을 획득한 일본 수군은 목포 쪽으로 흐르는 북서해류를 타고 명량해협을 통과한 후, 전라도로 서진하여 일본 육군과 합류, 한양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계획을 간파한 이순신은 일본 함대가 어란포에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15969, 본진을 벽파진에서 해남의 우수영(右水營) 앞바다인 임하도(林下島)로 옮긴다.

 

명량해협(울돌목)은 수심이 얕아서 배가 항해할 수 있는 범위가 좁고, 밀물 때는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좁은 울돌목으로 한꺼번에 밀려와, 서해로 빠져 나가면서, 해안의 양쪽 바닷가와 급경사를 이뤄, 물이 쏟아지듯 빠른 조류가 흐른다. 이런 명량해협 물살의 또 다른 특징은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암초가 해협에 솟아 있어서, 급 조류로 흐르던 물살이 암초에 부딪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엄청난 소용돌이를 치게 된다

 

조선 수군들이 좁은 울돌목을 수척의 판옥선 뱃머리를 잇대어 막아 놓고 버티자, 300여척의 왜선들은 임하도 안쪽 포구에 갇힌 꼴이 되고 만다. 이에 이순신은 7척의 판옥선을 몰고, 임하도 바깥 해역을 우회하여, 몰려있는 적선을 기습하여 화포를 폭풍우처럼 발사하고, 화살을 비 오듯 쏘아, 왜선들을 괴멸시키고, 적장 마다시의 목을 베어 효수한다.

  명량해전 전개도

 

이리하여 서해로 진입, 북상하여 한양을 취하려던 일본의 전략은 물거품이 되고, 왜군은 결국 159812월 노량해전을 끝으로 패퇴하고 만다.(이상 백과사전에서 발췌)

 

한동안 울돌목을 굽어보며 이순신 장군을 기린 후, 차에 올라 다랭이마을로 향한다. 우리들이 이번에 남해를 첫 방문지로 잡은 것은 이전 방문 때에는 가보지 못했던, 다랭이마을과 독일마을을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19번 도로를 타고 달리던 차가, 22분 경, 서해안도로(1024번 도로)로 바꿔 타고 남하하여, 250분경 가촌에 도착하여 다랭이 마을을 굽어본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갯벌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바다를 보면서 달린다.

 

다랭이마을 전경- 다랭이마을 홈페이지에서 펌

 

선구리를 지나 1024번 도로를 타고 동진하다 보면 왼쪽으로 관광안내소와 특산물판매장이 있는 다랭이마을 사랑채 건물을 만나게 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관광안내소에 들러, 다랭이 마을에 대한 정보를 얻은 후, 도로 건너편 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내린다.

   다랭이마을 입구 주차장

 

랭이마을 사랑채

 

 다랭이마을입구

 

 다랭이마을소개(사진 클릭하면 커짐)

 

다랭이마을 종합안내(사진 클릭하면 커짐)

 

다랭이마을은 어촌인데도 포구가 없다. 마을이 해안절벽을 끼고 있고, 거친 파도와 많은 바위 때문에 조각배조차 정박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태풍도 잦아 배의 쉼터가 되지 못해 남해에서 선착장이 없는 유일한 갯마을이 바로 다랭이마을이다.

 

다랭이마을 해변(홈페이지 사진)

 

어업을 할 수 없었던 마을 사람들은 언덕비탈에 108개 석축을 쌓고, 언덕 위에서부터 바다까지 크고 작은 680여 개의 논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한다.

 

 다랭이마을 층계 논(홈 페이지 사진)

 

이런 다랭이마을이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면서, 명승지로 탈바꿈하고, 국내는 물론 외국에 까지 널리 알려져 면목을 일신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시초는 아주 작은 것에서 유래한다. 1999년 이 마을 출신 김종철 씨가 면장으로 부임하면서 마을 뒤쪽의 설흘산 등산로를 개발한다. 외지에서 온 등산객들이 산에 올라 다랭이마을의 환상적인 경관을 보고,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더니, 다랭이마을이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명소 부상하게 된 것이다.

 

다랭이마을 주요 연혁(다랭이마을 공식 홈페이지에서 발췌)

2002년 전통테마마을 (농진청)

2003년 팜스테이마을 지정 (농협중앙회)

2005년 국가명승 제15(문화재청)

2005년 농촌전통테마마을 평가 홈페이지 부문 최우수 (농진청)

2006년 농촌 전통 식단 부분 우수상 (농진청)

2010년 농촌체험휴양마을 (남해군 1)

2012CNN 한국의 명승 50

2012년 색깔있는 마을 100(농림부)

2013() 남해 가천마을 다랑이논 보존회 설립

2018년 자연생태우수마을 (환경부)

 

지금은 다랭이 논에서 벼농사를 짓는 집은 없다고 한다. 마을이 관광명소로 바뀐 이후 주민들은 살던 집을 개량하여 민박을 치거나, 식당을 운영하고, 다랭이논은 밭으로 변해 마늘을 경작한다고 한다.

   다랭이마을 안내도(사진 클릭하면 커짐)

 

자 이제 다랭이마을을 둘러보기로 하자.

 

시멘트포장 비탈길을 내려서는 오른쪽 길가에 다랭이마을 명소를 소개하는 팻말이 보인다. 이어 이정표가 있는 사거리에서 왼쪽 길로 들어서서 다랭이 마을의 대표적인 맛집 다랭이반상&카페를 지나 박원숙의 커피 & 스토리로 들어서고, 테라스에 앉아 유자차를 마시며 주위를 둘러본다.

 

  다랭이논

 

 다랭이 지겟길

 

 암수바위

 

 사거리 이정표

 

 다랭이반상&카페

 

박원숙의 커피 & 스토리

 

 

 

테라스의 세 늙은이

 

 박원숙 커피 테라스에서 내려다 본 화이트 돔

 

박원숙 커피숍을 나와 왼쪽 길로 진행한다. 해바라기 맛집 등을 지나 암수바위에 이른다. 남해 섬의 생김새는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암수바위는 이런 모양의 남해 섬 회음부에 정확하게 위치하고 있고, 따라서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신성한 곳이라고 한다.

   해바라기 맛집

 

 할매 막걸리

 

 암수바위

 

높이 5.9m의 숫바위와 4.9m의 암바위로 이뤄진 암수바위는 발기한 남자의 성기와 애기를 밴 어머니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전국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조선 영조27년 이 고을 현령의 꿈에 한 노인이 "가천에 묻혀있는 나를 일으켜 달라"고 부탁해 땅을 파보니 암수바위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 바위를 발견한 뒤로 매년 제사를 지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암수바위를 뒤로하고 바닷가로 향한다, 탁 트인 바다가 시원하고 저 멀리 보이는 섬 하나가 눈길을 끈다. 데크 길을 걸어 바다 끝 전망대로 갔다가 서둘러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사거리로 향한다.

   바닷길로 내려서고

 

 데크 길을 따라 바위해안을 걷고

 

 해안전망대

 

 설홀산(482m)과 다랭이 논 그리고 바위투성이 해안

 

 아름다운 노변방초

 

 자연속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마을

 

 

차가 기다리는 곳에 이르니, 벌써 4시가 넘었다. 헌데 아직 갈 길은 멀다.

 

 

(2020.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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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Urim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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